여느때와 다름없이 교무실 내 책상위에는 학생들의 편지와 음료수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에 이어서, 어느 월요일 저녁 이상하게 선생님들 대화 소리에 귀가 기울여졌다.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 선생님의 말에 내 심장이 반응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담임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서
감동적인 얘기를 들었으예.
존경하는 인물과 그 이유를 제일 잘 말한 반 아이에게
초콜릿을 주기로 했다네예.
다들 위인을 말 했는데 한아이가 박용호 할아버지라고
발표 했다카데예.”
박용호라는 분이 누구냐고 듣고 있던 장 선생님이 물었더니 박 선생님은 더 신이 난 듯 아이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아빠가 그라든데예. 우리 동네에서 박용호 할아버지가
제일 가난하데예. 그란데 동네에서 제일 많이 보육원에
후원금을 낸다고 했으예.”
선생님들이 의미심장한 탄성을 질렀다. 나 역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
그 다음날도 이상하게 동료 선생님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최 선생님의 문자를 확인하고 회갑이신 아버지께서 세 통이나 보내셨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박 선생이 조바심이 난 목소리로 비밀 얘기 아니면 공개 좀 해보라고 말했더니 최 선생님이 들뜬 목소리로 문자내용을 읊었다.
“니한테 문자 쓰는 것 배워서 노인정에서 영웅 되뿌렀다.
오래 연습 했는데도 어렵꾸마.
눈 어둡고 손가락이 굵어서 그칸가 싶다.
더 연습해서 자주 보내꾸마. 사랑한데이.”
참 애정 넘치는 부녀지간…… 내 맘속의 용암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어 급히 화장실로 갔다. 나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목 놓아 울었다. 사랑이란 단어와 친해 본적 없어서 생긴 상처가 곪을대로 곪고 응어리가 끓을 대로 끓어 드디어 화산이 터진다 싶었다. 마음속에 불덩이는 항상 있었어도 늘 부글거리다 말았는데 울기까지 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용암 분출 후의 잔재? 실컷 울고 거울을 봤더니 눈 밑에 마스카라가 번져있는 모양이 마치 판다곰 같았다. 갑자기 웃음보가 터져서 언제 울었냐 싶게 쿡쿡대며 웃었다. 이것도 치료과정중에 나타나는 긍정적인 감정의 기복일까? 아니면 조울증 병세 약화일까?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그립다는 생각도 그저 나이 탓일거라 합리화하며 서울 집에 전화를 걸었다. 먼저 거는 일이 없던 내가 전화하자 엄마는 큰일이나 난줄 아는 걱정 어린 말투였다. 미안한 생각이 있었으나 마음과 마음과 달리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쳤다거나 죽었다는 소식만 기다려요?
목소리 그리워서 전화 했더니만!”
“목소리만 그립니? 얼굴 보러 집에 좀 와.
아빠도 유해지셨어. 너 연락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는데…”
아빠라는 말을 듣자, 뜻하지 않게 앙칼진 원래의 내 말투가 더 진하게 나왔고 전화도 끊어 버렸다. 치료 때문인지 나이 탓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도 왜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는 것이었을까? J씨의 말처럼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과거의 쓴뿌리 자체가 제거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두 살 위인 오빠가 저지르는 불량 사건들로 실추된 부모님 면을 세워드렸던 사람은 나였다. 학교에 불려가서 머리를 조아리던 엄마의 속상함을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항상 모범생, 착한 딸 모습을 지키려고 긴장하며 살았었다. 15년 전 초등학교 6학년 겨울, 중학교를 배정 받는 날이었다. 중학생이 되면 부모님 자존심 회복 대상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는데, 오빠의 나쁜 명성이 자자한 같은 학교로 배정받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불행이었다. 오빠 때문에 상처 받은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건 나의 모범적인 생활뿐임을 알았기에 엄마를 황망하게 바라만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은 곪아 가는데도 난 그렇게 살았다. 오빠로 인해 고등학교 때까지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었다. 그랬었기에 앙칼지게 말하는 것도 과거 일들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대학교도 서울과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왔고,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사랑을 주는 법도 모른 채 철저하게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주위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감동 받아 울음이 난다던지 하는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신과 치료의 긍정적인 영향일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와의 통화에서 보인 내 반응은 치료받기전의 나와 달라진바가 없어서 끔찍했다. 그 무렵 일어난 변화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긴 일시적인 감정변화일 뿐이라 결론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