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씨의 진료실에서 각자 써온 편지를 서로에게 읽어주었다. 익숙해 보이는 J씨와는 달리, 나는 민망해 소파에 공벌레처럼 몸을 움츠리고 앉아 기어가는 목소리로 낭독했다. J씨는 경청한 후 그녀의 편지를 낭독했다.
J선생님에게.
‘사소한 일이 위대한 결과를 가져옴을 볼 때, 사소한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브루스 바튼.
언제 편지를 써봤는지 낯설어 늑장을 부리다가 이제야 씁니다. 살아가는 동안 별 관심 없이 무심코 지나치는 일들이 무척 많습니다. 버스는 당연히 다니는 것이고 인사는 만나면 으레껏 하는 것이고, 고맙다는 말은 하면 좋은 것이고 이 추위가 가면 꽃은 당연히 피는 것이구요. 물론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여태껏 사소하게 그냥 지나쳐 온 것들이 요즘 저에게 감동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선사합니다. 겉치레라 여겼던 한마디 인사말과 감사의 말이. 활짝 핀 꽃에서 나오는 생명의 기운처럼 풍겨서 주위 사람들에게 활력이라는 위대한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도, 사소하지만 위대한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편지지도 메마른 미프라친카치아 잎이 연상될 정도로 바스락거리더니, 내용을 담은 잉크를 머금으면서 조금은 촉촉해진 것 같아요. 선생님 덕분에 저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고, 상처 준 이들을 용서하는 법을 조금은 알 듯 합니다.
윤주씨에게.
예전에 진달래가 만발한 산에 오르다가 향기 좋은 싸리 꽃무리를 만난 적이 있어요. 작은 떨기들에 코를 대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발아래 더 작은 보랏빛 제비꽃이 반겼어요. 갑자기 향기 없이 화려하기만 한 진달래가 눈에서 멀어지더군요. 사람들은 화려한 꽃에게 먼저 눈을 빼앗겨 버리지만 결국 오래도록 남는 것은 작은 꽃들의 향기인 듯해요. 요란한 화장과 비싼 옷으로 포장한 사람은 눈요기지만 겉모습은 수수해도 인간미 있는 사람에게서 진정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나지 않을까요? 끝으로 좋은 글 하나 인용하고 이만 줄일게요.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되고, 진달래는 진달래꽃답게 피면됩니다. 세상에는 아름답지 않은 꽃이 없듯이 쓸모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의 인생이든 무게와 가치는 귀합니다. 다만 내가 나의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뿐입니다.’ -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J씨의 편지 낭독을 듣는 중에 공벌레처럼 움츠려졌던 몸이 조금씩 퍼지며 전율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 했다. 내가 편지를 읽는 동안 J씨의 반응도 지금의 나와 흡사하지 않았을까? 내 나이 스물여덟에 피붙이보다 더 진한 자매에를 뼈 깊숙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J씨는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나만을 바라보기 위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놓은 규정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고 작별 인사를 고하는 것 같았다. 내 눈 주위가 붉어진 것을 들킬까봐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몇 차례나 했다. 편지 내용을 듣고 나는 말이 많아졌다. 공벌레 같은 자세에서 서서히 펴진 몸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있었다. 나오는 말을 통제하려는 생각은 저 만치 떨쳐 버렸다. 끓는 감정으로 뒤섞인 끈끈한 공기를 휘저으며 그녀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숨을 길게 한 모금 들이켜서 심장에도 보내줬다. J씨의 감정이 어떤지 몰라, 책에서 발췌한 구절보다 선생님이 쓴 편지가 더 감동이라는 말로 우회해서 표현해 봤다. J씨는 믿고 잘 따라와 주는 내 진심을 느낄 수 있는 편지여서 감동받았다고 화답했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 나에게 조언을 덧붙였다.
“일상의 여러 상황에 눈물을 흘린다거나 감동받는 반응들이
나이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죠?
음……전 항상 윤주씨 편이에요. 오해 말고 들어 줬음 해요.
나이 든다는 것, 윤주씨 스스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생기죠?
특히 감정의 변화나 어떤 상황들에 의도하지 않았던 반응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나와서 당황스럽다고 했잖아요.
혹시 아빠와 오빠도 그렇지 않을까요?
두 분은 그대로이고 윤주씨만 나이 드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래도 아직 백 퍼센트 용납되지는 않아요. 이상하죠?”
"이해해요. 하지만 윤주씨, 남을 온전히 용납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해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서로 마음을 얻기 위한 대화가 필요해요.
그리고 용납하려고 서로가 노력하는 거에요.“
“대화할 마음은 있어요.
그런데 아빠와 오빠 호칭만 들어도 이가 부딪치고
턱이 떨리는 증상이 아직까지 있다구요.”
“전에 말했듯이 맘속의 쓴뿌리를 제거해야 해요.”
“쓴뿌리 제거는 어떻게 하는 거죠?”
“용납되지 않아도, 의지적으로 오빠와 아빠를 용서한다고
스스로에게 고백해봐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효과가 있어요?”
“한번 해 봐요. 미프라친카치아 이야기 기억하죠?
오빠와 아빠도 미프라친카치아에요.
과거에 윤주씨에게 상처준 것 때문에 미안해하면서도
용서를 구할 용기가 안생겨 다가오지 못하고
윤주씨가 다가가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예전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이 윤주씨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침묵하고 계실지도 모르잖아요.
서로 닿으면 시들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거리를 두고 사는 '미프라친카치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J씨가 말하면서 내 옆으로와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누군가가 이 모든 상황을 조종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변화가 낯설고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J씨가 잡아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만이라도 내 오빠와 아빠에게도 전달해 보겠노라고 비장한 각오를 품어 보았다. J씨는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과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다닐 그란닌의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읽어보라고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