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씨와 있는 것은 늘 특별한 경험이었다. J씨는 어둠이 왜 어두운지 알기 위해 나를 들여다보았고 나는 빛이 왜 밝은지 알기 위해 J씨와의 데이트를 계속 진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J씨가 추천해준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봤다. 분명 예전에 볼 때와는 달랐다. 감상 중에 머리를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부분을 되감기해서 자막을 한자 한자 곱씹듯 읽었다.
‘하루 중 나만을 위한 것을 생각하는 시간은 좋은 시간이고
날 제외한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생각하는 시간은 참 값어치 있는 시간이다.’
며칠 전 학원에 출근할 때 일이 생각났다. 학원 건물 계단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신경하게 오르느라 계단에 누가 있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계단 한 세트를 올라 두 번째 계단 세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데 건물 관리 아저씨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여기 있지 말라켓는데 몇 번째인교? 이놈의 노인네가! 귀 먹은 기가?”
뒤돌아 아래쪽을 봤더니 계단의 한쪽 끝에 쪼그리고 앉아 빵과 우유를 먹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입안에 빵이 있어서인지 당황해서인지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굽실거렸다. 건물 관리 아저씨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빵을 뺏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허리를 채 펴지도 못한 상태로 주섬주섬 빵을 주워들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그것을 보고도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 일이 떠오르는 순간 반사적으로 내 손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차가운 내 마음을 혼냈다. 경비 아저씨의 임무는 알겠지만 힘없고 불쌍한 노인을 그렇게 막말하며 내치는 건 옳지 않았다. 그러나 난 강 건너 불 보듯 하게 동요하지 않았었다. 과연 내 정서의 메마름은 어느 정도였을까? 상태를 보려해도 내 마음의 옷은 벗기 힘들만큼 고름과 진물로 옷이 딱 붙어있을 것이다. 아니다. 잘 벗겨지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정전기가 따갑게 일고 있을 것이고 메마른 마음의 몸에는 버짐까지 허옇게 피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단적으로는 가뭄에 땅이 쩍쩍 갈라진 것 같은 상태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소름이 끼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날 제외한 사람을 위하는 참 값어치 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결심해 보았다. 그 순간 왜 J씨가 ‘살아 있는 미프라친카치아 되어보기’ 숙제를 내주었는지, 왜 이 영화를 추천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직 코끼리의 뒷다리만 본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뭔가에 반응하고 있는 내 자신이 기특하다는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날 출근을 하면 선생님들과 함께 식사하자고 말해볼 결심을 했다.
실패했다.
난 선생님들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말을 못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근처 커피숍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혼자 가기엔 안성맞춤인 한산한 커피숍이라 좋지만 매일 먹다 보니 그 집의 메뉴들이 질릴 대로 질렸다. 절반도 못 먹은 오므라이스를 내놓으며 후식으로 녹차를 주문했다. 테이블에 늘 준비되어있는 각설탕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네 개째의 껍질을 벗기고 있는 중에 종업원이 왔다. 녹차를 내려놓으면서 종업원이 이제는 안다는 듯이 각설탕을 보고 싱긋 웃어보였다. 커피숍을 처음 간 날, 녹차에 각설탕을 네 개 씩이나 넣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커피 주문을 녹차로 잘 못 받은 줄 알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종업원의 표정이 생각나서 나도 같이 웃었다. 누군가가 맛보면 경악할 만큼 달디 단 녹차 설탕물을 입이 데일까봐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거리의 소음이 밀려 들어왔다. 신문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들어 문 쪽을 봤다. 30대로 보이는 두 여자가 들어와 앉았다.
“커피 쏠게.”
“니 요즘 얼라들 말도 쓰나?”
“워낙 천진난만 하다카이~”
둘의 대화가 수다스럽지만 다정해 보이는 것이, 혼자있던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듯 했다. 주문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두 여자는 동시에 카푸치노를 외치고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우째 이리 마음이 통하노~”
“니캉 내캉 친구 아이가~”
아! 그랬다 친구! 그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적이 내 사전엔 없었다는 게 문제였구나 싶었다. 불량했던 오빠를 잘 아는 내 동창들을 늘 피해 다녔던 학창시절이었고 결국 타지인 이곳까지 와서 혼자였다. 내가 바로 고독한 미프라친카치아였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고, 친구를 사귀기위해서 움직이는 미프라친카치아가 되어보겠다고 결심 한 것이 그날이었다.
아름다운 매력만 풍긴 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것을 즐겨왔기 때문에 친구 없음이 슬프지 않았었다. 철저하게 혼자인 것을 즐겼던 내가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자체가 큰 치료 성과였다. 친구를 사귀려고 휘트니스 센터의 댄스 반과 요가반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다 40대 이상의 아주머니들뿐이었다. 학원 강사인 직업상 오후 5시 출근을 하는 까닭에 낮에 갈 수 밖에 없는 그곳이 주부들로 북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실망감은 예상외로 컸다. 그렇다면 어디서 친구를 사귈 것인가? 그 흔하다는 동호회 사이트를 기웃거려 봤지만 저녁시간에 일하는 중고등부 수학선생이다보니 모임시간에 나갈 수 없어서 그 또한 허사였다. 그렇다면 생활 패턴이 비슷한 학원 강사들의 모임인 ‘학강모’에 가입해 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나름 학원 강사들 사이에서는 유명강사로 이름이 나있는 상태였고 특히나 말 많은 좁은 이 바닥에서 내 별난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친구 없이 나름대로 자 ㄹ살아왔는데 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친구타령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을까 싶었다. 그래서 J씨를 만나러 가기 시작한 것과 착실하게 정신과 약 챙겨 먹은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J씨를 만나면 언제 후회했냐 싶게 치료받으며 조금씩 변화되는 내가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가는 내 정신 상태가 정신질환의 한 현상인지 아니면 옛 자아와 변화과정에 있는 자아가 충돌하는 중에 생기는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 감정의 기복 역시 J씨에게 맡긴 채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즐겨보기로 했다.
J씨의 격려 때문이었을까?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쓰라림으로 부르트듯이 사람들이 스칠 때 쓰라리고 부르틀 내 마을을 달래면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