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제이미는 말 없이 도구를 꺼내서 , 지혁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뒤에서 보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수 없었다.. 발치에 고양이가 잠들어 있다...
고양이라- 전엔 없었던 거 같은데.. 그사이에 생긴 모양이었다. 완전히 고립되서 사는 줄 알았는데-
생명을 들인다는 건- 뭔가 바람이 통하는 구멍이 생겼다는, 말하자면 볕이 드는 창이 났다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이 남자는 변하는 것만 같다.
얼굴도- 그리고 상처가 난 부위도 말이다- 매번, 이 남자는 조금씩은 다쳐 있다.
하민이가 알면, 아마 속상할 테지-
얼음장처럼 여전히 차갑기만 한 남자-
그러나 하민이랑 사귀고 있을 때도 그랬는지는 알수 없다.
하민이가 내게 얘기한 남자는 좀 대책없이 유쾌한 타입이었는데.... 이 남자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자신이 억지로라도 밀어 붙인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민은 자신에게 의미가 특별한 아이였다.
친구 그 이상이었다. 분명 사랑은 아니었지만 우정 그 이상의 어떤것이었다. 그녀는 특별했고
가차없이 자신이 낙오 되어있을때- 가족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녀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절대 자신의 잣대로 날 짓누르지 않을 사람- 그야 말로 - 꽉 막히고 빛 한줌 없던 자신에게
맞설 힘과- 빛을 함께 들여준 사람...
자신이 자신으로 있게 끔 해준사람-..
그녀는 제이미에게 은인이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이 사람을 도와 주길, 우리가 자신을 잊지 않고 얘기 해 주기를
그리고 우리가 친해 지기를.. 그래서 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저 사람을.. 하민 자신이 나한테 그랬듯이
조금은 지탱해 주기를 바랄꺼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와주기를- 저 사람이 , 만약 하민이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어떠한 계절이 떠났는데도 그 계절 속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은 채-
속절없는 기다림을 하고 있는 저 사람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길 바랄 거라고-.. 제이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민의 남자-.... 자신이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저 하민, 그녀로 이유는 충분하다.
말하자면 은혜갚기였고- 그 이상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가 고통스럽지 않게 그녀를 기억해 줬으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도움이 된다면야 뭐든지 해주고픈 그런 맘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랬다. 호텔을 박차고 나온데는 그런 맘이 있었다. 맞 부딫히지 않으면 , 자신이 피하면 이 남자는 끝까지
자신을 피할테고- 하민은 그에게 그저 상처로만 남을 테니까..
때론 아름다운 기억은 비수가 되어- 누구보다 잔혹하게 사람을 찢을 수 있으니까-
하민이는 기억을 아름답게 하는 힘이 있었으니- 지혁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얼마나 괴로울지-
제이미는 충분히 알수 있었다-..
그저 그 비수를 심장같은 급소에서 비켜나게만 할수 있어도.... 좋겠다고-..
그는 생각하고는- 그만 슬퍼진다.
제이미는 낮게 ,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현실은 , 제이미 그에게도 현실감이 없다-
그녀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그건 하민이에게 어울리는 결말이 아니었다.
스테이크용 고기가 맛있는 향을 풍기며- 굽히고 그는 뒤를 돌아 보았다.
지혁과 눈이 마주친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움직이기 불편해 보이진 않는데도 -
어이가 없다못해 기가 차 하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을 가볍게 무시하고 안에 있던 그릇을 꺼내서 척척 식탁을 차렸다.
저런 눈빛에 기가 죽어서야 저 남자랑 마주 앉을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생글 생글 웃어주었다.
에릭이 나한테 그랬다. 한국엔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다' 는 속담이 있다고 에릭이 그 말을 했을때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질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것도 같다- 웃고 나니, 오히려 생글거리고 나니 저 남자가 어쩔수 없이
상대를 못하겠단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그저 기다리고만 있으니까...
"자 먹을까요?"
-
지혁의 눈에도 제이미가 차린 식탁은 근사해 보였다. 나한테 저런 식기가 있었던가? 생전 처음보는 그릇에
담긴 잘 구워진 스테이크-.. 그리고 알맞게 오븐에서 데워진 각종 야채까지.. 그리고 샐러드도- ,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집 안에 가득 찬 요리 냄새가 낯설고 왠지 간질거렸다.
"음... 앉아야 하는데-"
제이미는 바로- 말도 없이 바로 의자를 치워 내가 다가서 앉을수 있게끔 하였다. 뒤도 밀어 주려 하기에
아니라고 손짓하자 다시 싱긋 웃으며 미안하다는 듯 한 제스춰를 취하며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지혁은 말 없이 휠체어를 천천히 밀었다.
그보다 왜 아까부터 이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건지를 모르겠다..
들어와서 할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뭔가 할 얘기가 있으니 이리 대책도 없이 처들어 왔을텐데-
그보다 내가 쫓아라도 내면 어쩌려고 이렇게 왔지.... 자신도 내 쫓지 않은게 스스로 의아한데
나에게서 무슨 확신을 얻었다고- 나에게 이리 향했단 말인가...
그는 내 표정따위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꽤나 우아한 동작으로 고기를 썰고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맛있어요- 드세요-"
샐러드도 주스도 아닌 고기라..... 얼마만의 고기일까? 요리를 할줄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먹는걸 즐기질 않으니... 눈 앞의 구워진 고기는 이 식탁에 정말 현실감없이 올라 앉아 있었다..
더 이상의 얘기도 맘이 복잡해 지혁은 그저 말도 말았다.
먹으라는 말에도 지혁이 대답을 않자 말 없이 제이미는 지혁의 접시를 가져가 고기를 다 잘라주었다.
지혁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칼질을 못하나 싶어서 이러나- 제이미는 접시를 내밀었다.
그러며 능숙한 한국어로 되묻는다- 억양도 마치 한국인같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네요-"
지혁이 잠시 말을 못하다 대답했다.
"나보고 하는 말인가요?"
제이미는 싱긋 웃었다.
"왜 나를 그렇게 티나게 싫어하죠?"
솔직한 질문이었다. 그 솔직함에 지혁은 그만 입을 다시 다물었다 제이미는 상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요리는 죄가 없으니 먹어요-"
제이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었다.
저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거지? 단기간에 한국어가 더 늘었군-
억양부터 말까지 아주 정확하다- 당황할때만 약간 버벅대는 정도인것 같다.
지혁은 대답않고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한참을 둘은 말 없이 앉아있었다-
한참 뒤에야 제이미는 천천히 조용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민이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에요 언제나 내게 힘이되는 사람이죠
내가 한국어를 공부한 것은 하민이 때문이거든요-.. 믿기나요?"
제이미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사람을 변화 시킬줄 알죠-"
그 대목에서-
지혁은 결국 욱 치미는 성질을 못참고 성마르게 대꾸했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시간을 안다고 해서, 아주 자신만만해 하네요-
그래요 나는 그 시간을 모르죠- 그러나 당신이 그녈 사랑했던 사랑하지 않았던 나와는 관계 없어요
나와 그녀의 시간안엔 적어도 당신이 전혀, 없었으니까....."
지혁의 말은 이를 갈듯 내뱉어서 제 목소리 같지 않고 지나치게 낮았다.
그 반응에도 놀란듯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는듯 제이미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러더니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나와 그녀가... 연인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지혁은 즉답했다 싸늘한 목소리로
포크를 내려놓고- 더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그건 아닐수도 있겠죠- 적어도 당신은 그랬던 모양이네요-"
제이미가 그때 , 또 씩 웃었다... 상상도 못했기에 더 화가났다-
뭐라 받아치려 입을 여는데 제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얘길 안했네.. 정말 믿을수가 없네-"
혼자 중얼거린다- 지혁이 눈을 치켜뜨자 제이미가
손으로 살짝 막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저.... 게이에요- 나에 대한 이야길 하나도 안한 모양이네요 정말.."
....
잠시 지혁은 생각이 멎었다.
"그녀 답네요- 남에 대해서 절대 속단하는 편이 아니죠-... 아니... 자신의 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상처나- 말을 한마디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죠-.... 그래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진 알겠네요- 날 왜 싫어하는지..."
멍하니 있는 지혁에게 제이미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감동이네요....
아직도 , 질투죠? 아마? 하민이가 왜 당신을 택했는지 알겠네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당신 아직도 하민이를 그만큼이나 사랑하는군요-"
제이미는 와인잔을 들곤 잔을 살랑 살랑 돌렸다, 좀체 의중을 알수 없는 그눈빛
지혁은 아주 천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맙소사.......
"그쪽이 게이라고요?"
지혁이 거짓말 하지 말라는 투로 물었다 , 그 목소리의 무례함에 자신도 놀랐다.
이런 질문- 정말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입에서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제이미는 눈을 마주치며 찡그렸다.
"왜요- 게이가 다 여성스러울꺼라 생각하나요?"
.......
그래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아니.... 좀 속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제이미는 옷차림도- 말투도,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제이미는 ... 아니 그렇다면 자신의 바탕에 깔린
그 약간은 불쾌할 정도의 질투를 제이미는 한발 앞서 알고 있었단 말인가? 먼저 얘기할 만큼?
자신의 그 개인적인 사실을?
지혁은 미안한 감정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제이미는 이유 없이 자신의 신경질과
과민한 반응을 받아주고 있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으며-
제이미는 아랑곳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 나의 집은 언제나 완벽했죠- 한살 위 형도... 부모님도.... 저는 제가 그렇다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스스로를 힘들게 했죠- 계속 인정하지 않으면... 아니.... 그렇게 하면 달라질거라고 믿었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것은 하민이었어요-"
제이미는 거기서 코 끝을 찡그리듯 아주 살짝 웃었다.
"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죠- 그녀는 나를 잘 알고 있었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것을 금방 알더군요"
지혁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숨긴걸 말인가요?"
제이미는 그제야 지혁의 눈을 올곧이 바라보았다.
"그렇죠- 하민이는 그런 아이잖아요- 가슴 속에 숨긴, 말 안한것까지 , 알더군요-"
"......"
"우습지만 그때의 난 당신과 많이 닮았었죠"
제이미의 말에 지혁이 놀라자 제이미가 살짝 짖궃게 웃었다.
"놀랍도록 차가운게 , 그렇죠- 그때 부모님도 형도 날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혼자였어요-
그렇다고 나를 부정할수가 없었죠- 아니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죠- 그걸 도와준게-"
"하민이라는 거군요-"
지혁이 말을 끝마치자 , 제이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아이였죠- 따뜻하죠"
지혁은 문득 이 남자와 자신이 이 테이블에서 독대하고 있다는게 새삼스러웠다.
그 눈빛에 빠르게도 제이미는 피식 웃으며 어이없어 하듯- 먼저 얘기했다.
"... 당신이 여자라고 다 좋은게 아니듯 저도 당신은 제 타입 아니니까 , 걱정말아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이건 그저 호의의 식사에요 여기 머무르게 해준- "
씩 웃는다- 뭐 그런 생각을 한건 아니었는데-... 지혁은 속으로 씨근거렸다 , 자기는 내 타입인줄 아나-
"내 비밀을 말하고 나니 당신이 날 경계하는게 좀 나아진거 같은데-"
눈치가 빠르군-
간파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래 말하자면 경계의 가장 속의 마음은 추한- 질투심일지도 몰랐다-
하민이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 남자가 이야기 하는 저 사람 기억속의 하민이가 특별해 보여서..
물론 그녀는 누구에게나 특별해 질만한 아이였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그녀의 어릴적을-
그녀의 소녀적을 알고 있는 그런게 부러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그녀의 시간을 품고있는 그가
부러웠으니까-
"... 하민이를 많이- 가족 이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가 슬퍼하지 않는다곤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은 한참을 침묵했다- 이 남자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이 남자가 말하는 말이 싫었다.
그러나 이렇게 까지 자신에게 다가온 그를 보니, 이해 할 것도 같았다.
이건 은혜갚기였다. 말하자면-
하민이에게 은혜를 갚는 차원인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그제야- 제이미의 진의를 이해했다-
-
하임은 한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세진과 손을 흔들며 헤어진 뒤-
돌아 오는 길은 왠지 더 긴것만 같다. 주머니에 아직도 가득 담긴 사탕- 입안에서 자그락 자그락 소리나는 사탕-
굳이 그 가게까지 갔을 세진을 떠올리고- 다시 그 성의에 고마워 진다- 먼길 주머니 속 만은 따뜻하다-
온기를 품은 사탕- 달콤하지만 씁쓸하다- 씁쓸하지만... 따뜻하다-
옆집을 지나치며- 조용히 귀를 기울여본다- 뭔가 도란 도란 말소리가 들리는 듯 한데.... 다른 사람이 있나?
하임은 잠시 멈춰선다. 그러나 문을 두드릴 용기는 내지 못한다. 아까의 약간은 어색한 시류가 흐르던 적막한
둘 사이를.. 오늘 또 한번 감당할 자신이 없다. 얼굴에 약은 발랐을까?- 발은 좀 괜찮을까?
문에 살짝 손을 대 본다- 싸늘한 문의 감촉- 그의 감촉도 이러할 것이다-
하임은 결국 자신의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집은 오늘따라 더 서늘하다- 이제 여름도 끝나버린 모양이다- 불을 켜니 보이는 책상위의 제인에어-
하임은 그 책에 시선을 두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깨끗히 했다- 개운한 얼굴-
... 아직 잠들기엔 이르지만- 이런 기분으로 뭘 더 할수 있을까- 작업 분량은 이미... 충분하다
하임은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곤 책상 스탠드만 두고 불을 끈다-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따뜻한 차 한잔을 태운다- 테라스로 당장 나서진 않고- 잠시 옆에서 비치는 따뜻한 불빛을 쳐다본다- 아무래도 테라스의 빛 같진 않다-
그는.....
오늘은 이 마저도 생략하려는 모양이다- 얼굴에 닿는 차의 옅은 김이 얼굴에 따스히 달라 붙는다-
살짝 별빛이 비치는 듯 해 창의 문을 열었다- 살짝 고개를 내밀어 옆을 보았다-
의외의 얼굴이 있었다-
속을 알수없는 눈동자- 그때 마주쳤던 그 외국인이었다-
바싹 얼어붙은.... 하임의 눈빛을 눈치챈건지- 그 외국인이 고개를 돌려 하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인사를 걸어왔다- 격의 없이 웃으면서-
"안녕?"
하임은 이렇다 할 대답을 못하고- 별빛만이 아름답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