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음에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줄까? 그런데 이것도 종류가 워낙 많은데, 너희가 좋아할만한 걸 고른다면…….”
예능, 드라마 등 수많은 동영상을 재생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애니메이션 폴더를 뒤지기 시작한 현희수. 수십 개나 되는 동영상에서 첫 스타트를 끊을 것은 어떤 것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드르릉~”
“으잉? 이게 뭔 돼지 멱따는…….”
시원하게 콸콸 흐르고 있는 계곡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 같은데? 당장 고개를 돌려보니 똬리를 튼 채 연신 코를 골고 있는 능구렁이 리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카디우스, 리스, 오늘 많이 피곤했구나?”
리스에 이어 알카디우스도 쪼그리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희수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싶었을 텐데, 아무래도 낮에 도적들을 혼내준 일도 있고, 200년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자동차로 인해 피로가 잔뜩 쌓인 듯싶다. 그리고
“휴우, 나도 이렇게 눈이 아픈데, 전자파라는 걸 처음 접해본 얘들은 오죽하겠어?”
에이패드에 시선을 빼앗긴 게 벌써 몇 시간인지, 당장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소중한 두 눈 영영 잃게 될 것 같아 슬슬 불안감이 든다.
“일단 가벼운 리스 녀석부터 텐트로 옮겨주고 알카디우스를… 응?”
리스를 향해 막 손을 뻗으려는 찰나, 희수는 왼쪽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져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아, 이런.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깊이 잠이 들었는지 알카디우스의 머리가 희수의 어깨에 살며시 얹어진 상황. 달콤한 잠을 온전히 지켜주기 위해서는 일단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데.
“뭐 할 수 없지. 텐트가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딱히 춥거나 불편한 부분은 없으니까.”
친구들에게 아르피아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 자동 텐트의 혜택을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활활 잘 타고 있는 모닥불이 추위도 충분히 막아주고 있고. 결국 희수는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오늘 고마웠어, 알카디우스. 부디 좋은 꿈꾸길 바래.”
고운 은발을 살며시 쓰다듬는 현희수.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도적들과 싸우다 손등에 상처까지 입은 알카디우스를 생각하면 고맙고 또 미안하다.
“자식, 너도 정말 수고 많았다.”
편애(?)하면 분명 요 히드라 녀석, 잔뜩 삐질 것이 뻔하니 알카디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따뜻한 손길을 건네줘야지.
그렇게 능구렁이 특유의 부드러운 비늘을 어루만져준 뒤, 희수도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함께 깊은 잠에 빠졌다.
******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 가득한 고요한 계곡에서 능구렁이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나더니 제일 높이 솟은 나무를 발견하고 서둘러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단잠을 깨울 정도로 소름 돋는 기운이라니! 대체 뭐가 튀어나온 거야?”
나무 꼭대기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저 멀리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읽어내고 있는 리스.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던 방금 전과 달리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엿보인다.
“저 방향은, 우리의 목적지 포트린 마을 같은데?”
심상치 않은 상황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땅으로 훌쩍 뛰어내리는 리스. 잠시 후 조그만 능구렁이 육체가 머리 세 개 달린 거대한 히드라로 변신했고, 최대한 신속하게 포트린 마을을 향해 기어갔다.
자동차가 접근할 수 없는 숲 한가운데를 가로지르자 포트린 마을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지만.
“우웃! 이 소름 돋는 강력한 기운은 설마?!”
다시 능구렁이로 변신하여 마을 안으로 발을 디딘 리스는 계곡에서 느꼈던 기운의 실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마을 정도는 단번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가진 소유자가 마을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길게 죽 늘어서 있는 건물들을 엄폐물 삼아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리스의 눈앞에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젠장! 얼핏 알카디우스의 기운과 비슷하게 느껴져 혹시나 했는데··· 드래곤이었어!”
온몸이 눈부신 은색 비늘로 이루어진 알카디우스와 달리, 저 드래곤의 비늘은 온통 녹색이다.
게다가 착한 마음씨와 어울리게 온화한 느낌이 나는 알카디우스와 달리, 저 녀석은 시커먼 눈동자와 어울리게 어두운 기운이 오싹 소름을 돋게 만들고 있다.
“그린 드래곤! 저 포악한 놈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뭘 할 속셈이지? 저기 맨 앞에 서있는 노인은 마을 촌장 아닌가?”
“이것 봐! 포트린 마을 촌장 보일!”
리스의 예상대로 그린 드래곤은, 앞에 모여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 앞에 대표로 서있는 노인을 불렀다.
“마, 말씀하십시오. 데지르님.”
“이 귀하신 몸의 식량이 바닥난 지 한참 되었는데 어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는 거지? 어디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린 드래곤 데지르. 식량이 없어 쫄쫄 굶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올챙이처럼 불룩 튀어나온 배를 살살 문질러 꼬르륵 물 흘러가는 소리를 발생시켰다.
“데, 데지르님이 처음에 보름에 한 번 씩 공물을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보름이 되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은 상태입니다.”
“그래? 내가 그렇게 얘기했던가? 나이를 300살 이상 먹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좀 가물가물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뒷머리를 긁적이기까지 하는 데지르. 얼핏 보면 좀 모자라 보이는 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이미지는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제부터 일주일에 한번 씩 공물을 바치는 거다. 보름까지는 내가 배가 고파서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다.”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보일은 기가 막혀 목소리를 높였다. 늙은 인간의 목소리가 높아봤자 드래곤에게 씨알이나 먹힐지 알 수 없지만.
“약속? 이봐, 늙은이.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약속을 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몸뿐이야.”
보일이 따지듯 내뱉은 말투가 심기를 건드린 건지, 데지르가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몸은 권리, 너희 인간들은 의무만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린 건가? 토 달지 말고 내가 정해준 방식대로 따르기만 하면 모든 게 편해진다고 단단히 일러둔 것 같았는데?”
“하지만 일주일마다 공물은 무리입니다! 최근 가뭄이 심해 농작물 생산량이 줄었고, 이웃 마을도 사정이 어려워 교류가 전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보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데지르가 짜증과 함께 분노를 터뜨렸다.
“에잇! 이 늙은이가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이 데지르님이 포트린 마을을 정성껏 보살펴주고 계신데, 그 대가로 약간의 음식을 바라는 게 잘못됐다는 것이냐!”
이제는 날카로운 그의 눈동자에서 살기마저 느껴진다.
“그렇게도 은혜를 모르다니! 짐승만도 못한 벌레들!”
콰앙!
결국 데지르의 분노는 단순한 고함으로 그치지 않고 기어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굵직한 통나무를 방불케 하는 꼬리가 허공에 휘둘러져 애꿎은 건물 한 채가 폭삭 무너져 내렸는데,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폐건물이라 인명피해가 없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허억······.”
저 무지막지한 꼬리에 얻어맞았다가는! 보일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물먹은 종이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건물 한 채가 무너지며 발생한 엄청난 소음에 여기저기서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전쟁이라도 벌어졌나 싶어 연신 졸린 눈을 비비던 사람들은 곧 거대한 그린 드래곤의 자태에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구경꾼들이 늘어났군. 그렇다면 공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줘야겠지?”
데지르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기분 나쁜 웃음을 선사한 후 무너진 건물더미를 향해 녹색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건물더미에서 치직 하는 이상한 소음이 발생하더니 곧 역한 냄새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린 드래곤 특유의 포이즌 브레스! 돌, 나무, 유리 등을 가리지 않고 접촉하는 모든 사물을 녹여 끈적거리는 스프로 만들어 버린다.
“콜록! 콜록!”
“할아버지!”
사람들이 역한 악취에 코를 막으며 신음하는데,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듯한 검은머리 아가씨가 달려와 보일을 부축했다.
“카린!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할애비가 당부하지 않았느냐!”
“죄송해요, 할아버지. 하지만 너무 걱정되어서 그만······.”
“아무 일 없을 테니 어서 돌아가거라! 할애비도 곧 따라갈 테니 어서······.”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손녀가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할아버지와 손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뒤덮었다.
“호오, 촌장. 당신에게 이렇게 예쁜 손녀가 있었다니. 보면 볼수록 정말 탐스럽게 생겼는데?”
“데, 데지르님. 이 아이는 저의 유일한 가족입니다. 공물은 말씀하신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아니 내일이라도 당장 마련해 드릴 테니 그만 돌아가주십시오.”
늙은 몸으로 어떻게든 카린을 가리려 했지만 거대한 드래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데지르의 관심은 이미 공물에서 점점 멀어진 뒤였다.
“촌장, 이틀의 시간을 줄 테니 그 아이를 예쁘게 단장시켜 나에게 보내도록 해라. 인간은 예쁠수록 고기 맛도 아주 일품인 법이니 이번에는 그것으로 공물을 대신하도록 하지.”
“아, 안 됩니다! 이 아이 만큼은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대신 드신다면······.”
보일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데지르에게 들릴 리 없다.
“정 마음에 걸리면 그 아이와 맞먹는 미모의 인간을 대신 바쳐도 좋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틀 안에 대체자를 구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단 말이지.”
“아아, 카린, 카린······.”
“할아버지…….”
결국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보일. 졸지에 그린 드래곤의 재물로 지목된 카린도 할아버지와 함께 비 오듯 눈물을 쏟을 뿐이다.
“크흐흐흐! 이렇게 감동적인 장면을 감상하게 되다니, 오늘은 아주 재수가 좋은 날이야!”
데지르는 그런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을 한편의 코미디라 여기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뒤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촌장, 현명한 생각을 하는 게 좋을 거다. 아르피아 대륙에서 이 데지르님에게 대적할 상대는 없을 뿐 더러, 혹시라도 수상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포트린 마을은 끈적거리는 스프 외에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하게 될 테니까.”
“으으…….”
보일과 카린,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겁에 질려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상황. 데지르는 마을 사람들을 조롱하듯 킥킥 기분 나쁜 웃음을 실컷 흘리고 유유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