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이익'
도로 한 복판 속, 아스팔트를 긁는 마찰음과 동시에, 횡단보도 정지선을 살짝 넘은 빨간색 마티즈 한대가 요란스럽게 멈춰 섰다. 마티즈를 뒤따르던 다른 차들도 일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거칠게 급정거했다.
"야 이 미친년아. 운전 똑바로 안 해?"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검은색 승용차 안에서 터져 나오는 걸쭉한 욕지거리와 함께, 사방에서 클락션 소리가 대낮의 사거리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은재는 횡단보도를 건너 유유히 사라지는 건너편의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남자야, 내 꿈속의 남자. 실제로 존재했었단 말이야?'
황당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인파속으로 사라져버린 의문의 남자를 허공에서 좇고 있는 은재에게 누군가 쿵쿵거리며 인기척을 내고 있었다.
"이봐, 아가씨. 지금 장난해? 신호 바뀐 거 안보여? 출발 안 해?"
인기척을 느끼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재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험상궂은 인상의 대머리 아저씨가 반쯤 열린 은재의 차창을 거세게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번뜩 정신을 차린 은재가 상황파악을 위해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로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자신의 마티즈 뒤로 빼곡히 늘어선 차들과 하나둘씩 열리는 운전석의 문짝들이 자신에게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망할 놈의 자식! 하필 이럴 때 눈에 띌게 뭐야?'
은재는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쓴 소리를 집어삼키며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아저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출발할게요."
핸들을 고쳐 잡고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은 은재의 빨간색 마티즈가 '쯧쯧. 이래서 여자들은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된다니까!' 라고 입을 나불대는 대머리아저씨를 뒤로 한 채, 사거리 횡단보도를 쌩 하니 벗어나고 있었다.
* * * *
"푸흐흐흐. 그러니까 지금 니가 그 남자를 실제로 봤다고? 그 남자를? 10년 동안 니 꿈에 꾸준히 출현해주신 그 분을?"
"아 그렇다니까. 횡단보도 앞에서 똑똑히 봤어!"
"말도 안 돼. 너 또 꿈꾼 거 아냐? 꿈속에서 니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그 남자가 횡단보도 건너간 거 아니고?"
"야, 강정아. 너 나 자꾸 미친년 취급할래? 진짜라니까. 진짜 봤어. 나 일주일전에도 그 남자 나오는 꿈 꿨었단 말이야. 근데 신기하게 꿈속이랑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옷 입고 지나갔다니까?"
"쯧쯧. 헛것본거겠지. 이 60억 인구 중에서 닮은 사람 하나 없겠냐? 우연의 일치일 뿐 이야. 정신 차려. 너 요새 일거리 많다더니 노가다 한다고 기가 허해졌나보지."
"어휴.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내가 미친년이지."
"에이, 이은재. 내가 니 말 안 믿어줘서 섭섭하냐? 진짜 니가 그 남자를 본 게 맞다면 언젠간 또 마주치지 않겠어? 한 번 더 보게 되면 그 땐 진지하게 들어 줄 테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 말라고. 어? 우리 자기 전화 온다. 야, 끊어. 나중에 다시 해라."
"뭐? 야 이 치사한 계집애야 다시 안..."
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정하게 끊겨버린 휴대폰. 은재는 종료버튼을 누르며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꿈 꾼 건가.'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꿈과 현실사이에 혼동이 생기는 것 같은 느낌에 파닥파닥 도리질을 치던 은재는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의 끈을 놓으며 생각했다.
'그래. 60억 인구 중에서 닮은 사람 하나 없겠어? 잘못본거겠지. 생각하지말자.‘
* * * *
“헉.”
불현 듯 눈을 뜬 은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분명 정아와의 통화를 끝내고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너무나도 생생한 꿈 때문에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번에도 꿈의 주인공은 그 남자였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내미는 남자에게 막 자신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남자의 모습이 흐려지며 꿈에서 깨버렸다.
‘뭐야, 이 거지깽깽이 같은 꿈은. 손이라도 잡아볼 걸, 재수도 지지리 없지. 꿈에서조차 남자 복은 없네.’
오랜만에 편안히 들었던 잠에서 깨버린 은재는 머리맡에 놓여있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곤 주저 없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윽 벌써 7시야? 출근이나 해야겠다. 그래 남자 복 대신 일 복이 아주 터졌네. 풍년이야 풍년.”
은재는 쇼핑센터 주차장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마티즈를 주차해놓고서는 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손목위에서 반짝이는 시계는 아슬아슬하게 8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각을 싫어하는 은재이기에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침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찰 나, ‘땡’ 하는 알림과 함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적절한 타이밍.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문 안쪽으로 발을 디디려는 순간, 자신을 치고 지나가는 남자 한 명. 그 때문에 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한 귀퉁이에 이마를 찍어버린 은재가 자동반사적으로 얕은 신음을 흘렸다.
“아―! 씨….”
은재가 이마를 찍은 후유증으로 타지 못한 엘리베이터는 야속하게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시계로 눈을 돌린 은재는 9시 1분을 가리키는 분침을 확인하곤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저기요!”
날카로운 은재의 목소리가 지하주차장을 울리며 귓가로 날아가 꽂혔는지 막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려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남자가 멈춘 것을 확인한 은재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남자 뒤에 섰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남자의 뒷모습이 은재를 향하고 있었다. 검정색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길거리에 널리고 널린 흔한 옷차림이었지만 180cm는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의 키 때문인지 생각보다 옷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몇 초간 남자의 뒷모습을 감상하던 은재가 정신을 차리고선 남자에게 말했다.
“저기요. 제가 지금 그 쪽 때문에 회사에 늦었거든요.”
“.....”
“그 쪽이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지금 이마도 찍었다고요. 그것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놓쳤고요.”
“.....”
화를 꾹 눌러 참으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던지는 자신에게 남자는 여전히 뒷모습만을 보여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자 아까 찍힌 이마가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이봐요. 지금 피해자는 나예요. 당신은 가해자라고요! 죄송하다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이게 뭐하는 거예요? 당신 덕분에 지금 내 이마가 이렇게 부어올랐잖아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은재가 예의고 뭐고 없이 소리를 꽥 지르자 그제야 남자가 은재 쪽으로 바라보고 서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 참 시끄럽네. 이마 한 번 박은 것 가지고 쏘아대기는. 돈을 들인 이마 같지는 않은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뭐라고요?”
남자의 예의 없는 말에 얼굴을 쳐다보려 정면을 응시했지만 시야에는 검정색 니트를 입은 남자의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았다. 발이 아파 힐을 신고나오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은재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군. 말 대신 이걸로 보상하지.”
사과 같지도 않은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부어오른 이마위로 찹찹한 손 하나가 얹어졌다. 생각보다 커다란 손은 은재의 이마와 함께 눈도 가려버리고 말았다.
1초―, 2초―, 3초.
정확히 3초 후 거둬진 손과 함께 남자는 어벙하게 서있는 은재를 남겨둔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지고도 몇 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은재는 띠롱띠롱 거리는 핸드폰의 문자메세지음을 듣고서야 제 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전혀 나쁘지 않았다.
은재는 오히려 이마에서 손이 떨어지는 순간을 아쉬워 한 자신을 자책했다.
‘이은재, 너 미친 거 아니야? 정신 차리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