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재는 뒤통수에 날아와 꽂히는 따끔따끔한 환의 눈빛에, 그냥 이대로 못 들은 척 가버릴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어느 새 다가와 자신 앞에 선 환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하긴요. 일 하는 중이죠.”
“일…?”
환이 은재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그녀의 옆에 있던 욱에게로, 또 욱이 잡고 있던 은재의 손으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일이라기 보단 데이트 쪽에 가까워 보이는데 난. 업무란 게, 비즈니스 파트너 대표와 손을 잡고 하는 건가”
은재의 동공이 순간 당황스러움에 어마어마하게 흔들렸다.
환의 느릿하고 차가운 어조에 은재가 자신의 왼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핏줄이 올올이 솟아있는 남자다운 손.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따듯하게 자신의 손을 감싸 쥐고 있는 욱의 온기가 갑자기 확 느껴져 은재는 슬며시 욱의 손을 쳐냈다.
“아, 이건….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예상치 못한 전개에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은재가 두서없이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였다.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던 욱이 입을 열었다.
“김 환. 이 은재 씨한테 이러는 거 무례한 행동이라고 보는데. 담당자와 모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더니. 꼭 바람피우다 들킨 여자 친구 추궁하듯이 구는데…, 무슨 짓이냐 이게.”
욱의 차분한 일침에 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런 둘의 대치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은재가 욱과 환 사이로 냉큼 끼어들어 팔을 휘휘 저었다.
나름의 환기랄까.
은재의 난입으로 인해 두 남자의 기 싸움이 살짝 옅어졌다.
은재는 그 틈을 타 잽싸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기 두 분! 뭐 별 일도 아닌데 이런 공식석상에서 감정싸움 하는 건 좀 그렇죠?”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시끄러운 론칭파티 였지만 은재와 환, 욱이 서 있는 B구역 근처에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이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관망 중이었다.
은재의 중재 아닌 중재에 환이 주위를 한 바퀴 쓰윽 둘러보더니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별 일도 아닌데 제가 잠시 오버했나보네요. 담.당.자.님. 그런데 이제야 두 번째 만나는 비즈니스 담당자분의 손을 덥석 잡고 있는 대.표.님.도 그다지 예의가 있어보이진 않네요. 그럼, 불청객은 이만 사라져드려야죠?”
환의 가시 돋친 말에 욱의 눈썹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런 욱을 몇 초 동안 지긋이 바라보던 환이 옆에 조용히 찌그러져있는 은재에게 눈길을 주며 의미심장한 한 단어를 내뱉었다.
“취소.”
욱이 듣기엔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 싶겠지만, 은재는 대번에 환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 저녁 8시로 잡힌 약속은 취소란 그의 무자비한 통보였다.
취소란 말을 뱉어 내곤, 환은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불정도로 휘리릭 슈트 자락을 날리며 인파속으로 사라져갔다. 점점 작아져가는 네이비색의 점을 눈으로 쫓다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은재가 말없이 서 있는 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욱은 환이 사라진 직후부터 줄곧 은재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은재의 시선이 욱에게로 향하자마자 허공에서 둘의 눈빛이 부딪혔다.
어색한 공기가 은재와 환의 사이를 미묘하게 맴돌다가 사라졌다.
이 상황이 뻘쭘해진 은재가 하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일까요…? 하하하….”
경련이 일어나려 하고 있는 은재의 입 꼬리를 본 건지 만 건지, 욱은 아까의 다정한 말투와 행동 대신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강 욱으로 돌아가 예의바르고 사무적인 기획사 대표가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은재 씨. 괜한 제 호의가 짐이 되었군요. 그 날 환이 녀석과의 식사를 망친 것 같아 좋은 구경 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부린 오지랖에, 제가 당해버렸네요.”
욱이 약간은 쓴 미소를 지으며 은재에게 사과했다.
욱의 사과에 손사래를 치며 은재가 대답했다.
“아. 아녜요. 그 날 밥을 못 먹은 건 제가 아니라 김 환 씨 인걸요. 그리고 혼자 있는 절 무안하지 않게 챙겨주시려 한 고마운 마음을 제가 모를 리는 없잖아요? 비록 오해가 생겨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은재의 예의바른 대답에 욱의 눈이 살풋 가늘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욱의 생각보다 그녀는 훨씬 더 좋은 사람, 그리고 익숙한 사람이었다.
마치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 아닌 것처럼. 꼭 오래전부터 만나왔던 편안함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욱이 첫 날 수미식당에서 만난 은재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친숙함, 그리고 아련한 첫 사랑같은 느낌.
그런 감정을 욱은 겨우 두 번째 만난 은재에게서 받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젠 진짜 정식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 은재 대리님? 환이 녀석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일이 없게 단 둘이 저녁 어떠세요.”
욱의 멘트에 은재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저 간단한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던 방금 전의 일에, 욱이 너무 과한 사과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김 환이 싸가지 없는 건 진즉에 알았는데, 굳이 이렇게 대표님이 구구절절한 사과를 하실 필요까지야…. 어찌 저런 대표 밑에 망나니 같은 소속 직원이 있는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수수께끼야. ’
욱이 회심의 카드인 저녁식사 이야기를 꺼냈건만, 은재의 표정은 영 알쏭달쏭했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녀의 표정에 욱이 살짝 당황스러워 할 때였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은재가 뜻밖의 대답을 꺼냈다.
“좋아요 저녁! 근데 둘 말고 셋 이요.”
“…네?”
욱의 머릿속에 계산되어있지 않던 은재의 대답에 순간 멍해진 욱이 반 박자 늦게 되물었다.
“대표님과 저, 둘 말고 대표님과 저 그리고 김 환 씨 까지 해서 총 세 명. 셋이서 먹어요. 그 저녁이란 거요. 어차피 김 환 씨랑은 콘셉트 회의 때문에 만나야했고, 대표님은 저한테 미안하니까 밥 사고 싶은 거잖아요. 저한테 그렇게 미안하면 콘셉트 회의 겸 식사자리, 대표님이 통 크게 쏘세요. 그럼 서로 윈윈 아니겠어요?”
은재의 당찬 대답에 욱이 ‘으음’ 하고 의미모를 신음을 내뱉더니 몇 초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제와 보니 이 대리님의 거래 실력이 상당하네요. 혹…, 환이 녀석을 꾄 것도 이런 실력덕분인가요?”
“그건… 아마 아닐걸요?”
진심어린 욱의 질문에 은재가 곤란하단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어딘지 모르게 눈동자가 불안해진 것도 같은 은재가 욱이 더 이상 뭘 더 캐묻기 전에 휘적휘적 앞을 향해 걸어 나가며 소리쳤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에? 대표님, 전 이만 퇴근해야겠어요. 회사에서 전달받은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거든요.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녁약속은 그 싸가지 없이 사라진 소속직원을 통해서 연락주세요! 그럼.”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처럼 허둥대며 사라지는 은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욱은 별안간 폭소를 터트렸다.
은재가 숨기는 말 못 하고 도망쳐야했던, 환을 꾀어내 계약을 성사시킨 비밀은 이미 며칠 전 봉 매니저에게 낱낱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은재가 조급한티를 내며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가식 없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아직도 시끄러운 파티 현장이라, 그의 웃음소리는 이내 실내의 눅진하고 습한 공기 속으로 묻혀갔지만 예쁘게 휘어져있는 반달눈웃음이 이제는 인파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은재에게로 향해가고 있었다.
“정말 묘한 느낌이 드는 여자야. 이 은재 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