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공동주택을 벗어 난 은재는 추레한 몰골을 열심히 정리하며 단짝 친구 정아의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이 상황을 털어 놓을 곳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은재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커피숍 문을 향해 다다다 달려갔다.
“강 정아!”
“어머, 은재야? 네가 이아침부터 웬일이야?”
오픈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험한 몰골로 나타난 은재를 본 정아가 수건으로 테이블을 닦다말고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럴만한 일이 있었단 거 아니겠니.”
“쯧쯧…. 보나마나 또 사고를 거하게 친 게지. 자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사고냐. 한 번 들어나 보자.”
은재의 힘없는 말투에 대충 상황파악을 끝낸 정아가 테이블을 닦던 수건을 팽개치고 은재를 자신의 옆자리로 끌어다 앉혔다.
그래도 친구라고 정아를 보자 긴장이 풀린 은재가 다리를 휘청거리며 정아의 옆자리에 얌전히 착석했다. 그늘진 은재의 눈가를 본 정아가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보며 차가운 얼음물 한 잔을 갖다 바쳤다. 안 그래도 목이 타들어가던 은재가 정아가 떠다준 물을 한 번에 원샷하더니 얼음을 와그작 깨물어 먹으며 운을 뗐다.
“나 일 때려치울까?”
밑도 끝도 없는 은재의 발언에 팔짱을 끼고 경청 할 자세를 고쳐 잡던 정아의 표정이 빠직하며 일그러졌다.
“얼토당토않게 뭔 소리야? 일을 때려치운다니?”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바른대로 말 해. 무슨 일이야? 히스테릭 팀장하고 한 판 붙기라도 한 거야?”
정아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재차 은재에게 물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 너 혹시 저번에 이야기했던 그 남자 기억나?”
“혹시 꿈·남·사 대작전의 주인공이신 그 분?”
“으응. 그 사람 얼굴 나 이제 어떻게 보니? 오늘 아침만 생각하면 접시 물에 코 박고 콱! 죽고 싶은 심정이야 정말.”
앞 뒤 다 자른 은재의 말에 조급증이 난 정아가 은재의 등짝을 퍽퍽 때리며 자세하게 설명 할 것을 종용했다. 그런 정아의 액션에 은재가 한 숨을 내쉬며 어제 파티 장에서 있었던 일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일을 정아에게 낱낱이 쏟아냈다.
“………그렇게 된 거야.”
“어머머 세상에. 너 얼굴 좀 화끈거리긴 하겠다야.”
은재의 말을 토씨하나 흘리지 않고 다 새겨듣던 정아가 마침내 은재가 말을 끝마치자 호들갑을 떨며 테이블을 탕탕 내리쳤다. 그 바람에 은재의 앞에 놓여있던 물 컵이 테이블의 가장자리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아휴, 나 진짜 그 남자 얼굴 못 보겠어. 일 하다보면 계속 마주칠 텐데 그 꼴을 보이고 어떻게 꼬시냔 말이야.”
은재의 한숨 섞인 푸념에 정아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너,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있는 쪽 없는 쪽 다 판 마당에 걱정하지 말라니.”
은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은재의 시선을 받아내던 정아가 검지를 펼쳐 좌우로 흔들어대며 혀를 찼다.
“쯧. 넌 이래서 안 되는 거야. 난 또 뭐 그 남자한테 엄청난 실수라도 저질렀나 했더니 그런 것도 아니잖아? 너 연애를 너∼어∼무 오래 쉬더니 감이 좀 죽은 거 같아. 연애 눈치 그런 건 어디서 공부 좀 해올 순 없는 거니?”
“친구야, 조금 더 알아듣게 설명해 줄 수 없을까?”
아무래도 정아 자신이 보기에 이 칠칠맞고 덜 떨어진 친구 은재는 정말이지 연애감각은 제로인 게 분명했다. 물론 은재가 그 남자 집에서 술에 취해 자고 나온 건 부정할 수 없는 쪽 팔린 일이지만, 수상한 것은 대표라는 그 남자의 태도였다.
파티 장에서 홀로 서 있던 은재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부터 시작해서 그 싸가지 없는 모델이 깽판을 쳤어도 매너 있게 자신이 사과했고, 술에 취해 자신의 집에서 잠이 든 은재에게 숙취 해소제까지 들려주며 저녁식사 약속까지 지키려하는 남자라…….
딱 봐도 엄청 수상한 행동이었다. 제 3자가 대충의 상황만 들어도 상대방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표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친구는 정말이지 이런 쪽의 눈치란 개미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답답해서 속이 터져나갈 수밖에.
그리고 그 김 환이라는 모델에게도 무언가 있는 듯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델 섭외 때부터 은재와 티격태격 해왔던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파티 장에서의 어찌 보면 선을 넘은 듯한 행동. 은재가 말하기를 그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꼬투리를 잡은 거라 말하지만 제 자신이 보기엔 단순한 꼬투리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의 질투. 정아는 자신의 촉이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튀어 나온 질투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멍청한 친구는 어쩌면 두 남자에게서 사랑 받을 지도 모르는 행복한 상황에서 일을 때려치운다는 답답한 소리만 해대고 있으니, 원.
은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 같은 정아의 모습에 심술이 나 손등을 슬쩍 꼬집었다. 상담을 받으러 왔더니 원하는 해결책은 내주질 않고 도리어 입을 다물어버린 정아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아얏!”
난데없이 손등을 꼬집힌 정아가 그새를 못 참고 자신을 닦달하는 철없는 친구에게 살며시 눈을 흘겼다.
“그만 뜸 들이고 이제 얘기해. 걱정하지 말라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니까.”
“굳이 일 그만두지 않아도 된단 이야기다, 이것아.”
“우 씨. 자꾸 답답하게 빙빙 둘러서 이야기할래? 팩트만 이야기 해, 팩트만!”
“그 남자들 너한테 호감 있는 것 같으니, 일 그만두지 말고 얼굴 도장이나 자주 찍어.”
정아가 던진 말에 은재의 얼굴에 미묘한 홍조가 떠올랐다.
호감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호감이라니? 어디 부분이 너한텐 그렇게 보인거야?”
살짝 기분이 좋았지만, 최대한 감정을 다잡으며 은재가 정아에게 확실한 포인트를 요구했다.
“이 맹추야. 너 관심 없는 남자가 여자한테 술 먹었다고 숙취 해소제 챙겨주고, 계속 밥 먹자고 그러디?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딱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단다.”
“그게 뭔데?”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에겐 돈과 시간과 정성을 쏟지 않아. 물론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우리의 꿈·남·사 대작전도 어쩌면 수월하게 풀리겠는 걸?”
정아의 말에 은재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아는 자신보단 연애 경험도 많고, 인기도 많았으니 그녀의 조언을 듣는 것이 지금 은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 알았어. 근데 대표님이 나한테 호감을 보인다는 건 네 말 들으니 어느 정도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네가 말하는 그 ‘남자들’이라면, 나머지 한 명은 누구야?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네가 생각하는 남자가 맞아. 근데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나도 너한테 장담하긴 어려워.”
“뭐? 김 환이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은재의 표정이 욱을 떠올릴 때완 다르게 거칠게 들썩였다. 정아가 그런 은재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워워. 이 은재 정신 차려. 아직 확실하지 않다니까. 강 대푠가 뭔가 하는 그 사람은 너무 눈에 띄게 너에게 잘해주니까 나조차도 그냥 네 설명만 듣고 백퍼센트 호감이라고 느꼈지만, 너희 회사 모델은 잘 모르겠다.”
“너는 확실하지도 않는 말을 그렇게 막 던지면 어떻게 하니? 진정이 안 되잖아.”
은재가 쀼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진 않으니까 하는 말이야. 넌 널 그냥 골탕 먹이려 그 난리를 친 거라고 했지만 그 남자, 내가 보기엔 분명 너의 꿈속의 남자님을 질투하는 것 같았거든.”
“질투? 지이∼일투?”
정아의 말에 은재가 콧방귀를 꼈다. 자신과 환은 쥐똥만큼의 감정도 없었다. 매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사람 기분을 벅벅 긁어 망쳐놓는 사이인데 질투라니.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은재가 고개를 양 옆으로 세차게 흔들고, 더불어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워 엑스표시를 해댔다.
“절대, 네버!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그 자식이랑 나랑 첫 만남부터 얼마나 강렬하게 재수 없었니? 네가 다 들어서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리고 그 자식…, 뭐 솔직히 인정하긴 싫지만 허우대 멀쩡하고, 생긴 것도 괜찮으니 여자 많을 거라구. 나한테 질투? 전혀 그럴 스타일 아니야.”
“풋. 이 은재, 장담하단 큰 코 다칠 걸. 여하튼 내 상담은 끝났으니 이제 어서 가. 그 꼴을 하고 앉아 있으니 오던 손님도 너보고 다시 돌아가겠다! 이제 영업 방해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썩 집으로 돌아 가줄래?”
정아의 말에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은재가 클러치를 주섬주섬 챙겨 일어섰다. 정아는 밍기적 거리며 일어나는 은재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주며 귓속말을 남겼다.
“연애세포 살리는 연습 좀 해 이 친구야. 그리고 오늘 얘기한 건 전부다 우리의 추측이니까 너무 설레발 치지 말고 자연스럽게, 무조건 자연스럽게. 알았냐? 파이팅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