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성궁의 대면방. 테메레르 대성기사와 백발의 노인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의 복장은 별다른 치장이 되어있지않은 순백색의 신도복이었는데 노인에게서 풍겨오는 미미한 기운이 노인이 평범한 신도가 아니라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리아 성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테메레르 대성기사가 말했다.
"그 아이가 많이 혼란스러워 했겠군. 그럴만 하지. 마왕군과의 전쟁이 끝나고 난 뒤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아이니까. 신이 자신을 놓아주었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가 이제와서 신께서 자신을 원한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안좋겠나."
"하벤 대신관님. 아리아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새로운 성녀의 신탁에는 조력자에 대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명확한 악도 지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력자라는 자가 악으로 지정되어버리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정말로 큰일이 일어날 수 도 있을겁니다."
"그런건 걱정하지마라. 조력자라는 존재가 누군지도 모르거니와 이 성국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콕 찝어서 조력자라는 존재를 선택해 벌할 만큼 성녀의 찍기 실력은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신탁이 내려온 만큼 확신을 갖기위한 조사를 한 뒤에 움직일거다. 그러니 조력자라는 존재가 일부러 성국에 피해가 갈만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벌어질 일은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럼 안심하고 다시 아리아 성녀를 설득......"
땅! 땅! 땅! 땅!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위치는 백화성궁 2층 신성 기도실이다! 현재 성모님이 괴한과 함께 있다! 모든 성기사들과 병사들은 신성 기도실로!]
"......"
"......음. 설마?"
하벤 대신관이 설마...? 하고 생각할때 테메레르 대성기사는 방송을 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신성 기도실을 향해 달려갔다.
신성 기도실 안.
"어... 전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진정하고 대화를 나누어 보는게 어떨까요?"
후욱!
"닥쳐라! 감히 성모님을 암살하려고 하다니! 설마 신탁에서 말한 거대한 악의 하수인인가?!"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기도실은 엉망이었다. 먼저 도착한 병사들이 자신들의 창을 휘두르며 침입자를 공격하고 있었고 침입자는 창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 조금 곤란한데...'
공격을 회피하던 나타는 이 일이 있기전의 상황을 회상하며 이를 갈았다.
"오빠. 여기가 바로 성국의 자랑중 하나인 백화성궁이예요."
"오. 엄청 크네? 마치 성 같은걸?"
"대단하죠? 여기는 성녀님이 사는 곳이라구요? 그래서 일반인들은 출입금지예요."
"아쉽네. 들어가서 구경해보고 싶은데."
"몰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긴 한데... 들어가고 싶으세요?"
"들어가다가 들키면 큰일나는거 아니야?"
"걱정마세요. 여기 사시는 분들은 다 성격이 좋으셔서 들켜도 가볍게 혼만 내고 보내주시거든요."
'그건 너한테만 그러는거고!' 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나타는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하며 소녀의 안내를 받아 백화성궁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갔는데...
"성모님을 지켜라!"
바로 그 성모라는 분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순간에 당당하게 들어와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성모라고 불린 여성과 함께 들어왔던 병사들이 문을 열고 나갈려던 순간에! 정말 운이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나타였다.
"핫!"
다행히도 병사의 수준이 자신보다 낮았기에 나타는 여유를 가지며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이 온다면...
"하. 진짜 싸우기 싫은데..."
자신은 무기도 들고있지 않았다. 갖고있는건 사먹은 음식이 담겼던 간이접시와 손가락만한 꼬지뿐...
덜컹!
"저기있다! 침입자를 잡아라!"
문이 열리며 다수의 병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나타를 발견하자마자 넓게 퍼지며 나타를 둘러쌓았다.
"이건 불가항력이야... 정말 어쩔 수 없네. '성장'."
완전히 갇혀버린 나타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듯이 품에서 손가락만한 꼬지를 꺼내며 말했다. 나타의 말이 끝나자 조그만 꼬지에서 녹색빛이 나오더니 그 작은 꼬지에서 새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역시 크기가 작아서 자라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네."
"이상한 사술을 펼치고 있다! 모두 공격!"
사방에서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나타를 향해 날아들었고 나타는 대략 단검정도의 크기로 성장한 꼬지를 휘두르며 병사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회피했다.
자신을 안내해주었던 꼬마가 일찌감치 나왔던 개구멍으로 다시 도망간걸 확인한 나타는 정면으로 찔러오는 창을 꼬지를 이용해 위로 튕겨냄과 동시에 자세를 낮추고 창이 떠서 상체가 비어있는 정면의 병사에게 달려들어 갑옷을 꼬지로 후려쳤다.
카앙!
철제 갑옷이 찌그러지며 병사가 뒤로 튕겨나갔다.
"읏!"
병사가 튕겨나가며 미세하게 생긴 틈으로 뛰어들려했던 나타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발견하고 즉시 꼬지를 들어 검을 막았다. 휘둘러지는 검의 충격에 밀려난 나타는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피이이..."
자신의 가슴쪽에는 아글라시얀이 들어가있었다. 옷 속 주머니에 들어가서 나타의 시야를 담당하고 있었던 아글라시얀이 공격당할뻔 하자 나타는 상황이 진짜 심각해졌다고 생각하며 어느세 병사들이 들고있는 검과 비슷한 길이로 자란 꼬지를 확인하고 자세를 잡았다.
"이 자세를 잡아본게 언제쯤이었는지... 버렸던 검술이었는데 이렇게 재활용 하는구나..."
두손으로 꽉 쥔 꼬지를 자신의 허리부분까지 올리며 왼발을 뒤로 물렸다.
"하아앗!"
왼쪽 옆구리를 노리며 찔러오는 공격을. 자세를 잡으면서 뒤로 뺐었던 왼발 뒤꿈치를 들고 오른발 앞꿈치를 들어 곧장 몸을 비틀어서 창을 찌른 병사와 마주보는 상황을 만든 나타는 꼬지로 창을 막고 몸을 돌리며 왼발과 같은 위치로 변한 오른발로 공격했던 병사를 차서 넘어뜨렸다.
나타는 다른 병사들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다. 첫 일격을 방어하기 무섭게 넘어진 병사로 인해 비어버린 공간으로 달려가 주변의 병사들을 향해 꼬지를 휘둘렀다.
철저하게 공격을 막으며 공격이 막히며 생기는 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검격에 병사들이 우후죽순 쓰러지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
도착한 성기사와 사제들의 수호를 받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아리아는 포위한 병사들을 일합으로 쓰러뜨리는 침입자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흡!"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올려쳐 상대하던 병사를 띄운 나타가 떠오른 병사의 복부를 다리를 들어 세게 밀어버렸다. 병사들이 갑옷을 입고 있어서 걷어차는거나 미는거나 별 차이 없을거라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발로 밀어 넘어뜨린 병사가 별 피해없이 일어났지만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일어나는 시간에 다른 병사들을 밀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있었으니까.
'진짜... 피해를 입히면 나중에 골치아파진다... 최대한 안다치도록...'
죽일 수 있었다면 다 죽일 수 있었지만 자신은 여행자의 신분이었다. 게다가 먼저 잘못한건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빨리 머리가 식어서 현명한 판단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감옥 같은데서 몇주 있겠지만 내 잘못도 크니까... 빨리 이 사람들을 진정시켜줄 높은 사람이 와줬으면 하는데...'
"모두 멈춰라!"
크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며 나타를 공격하던 병사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행동을 멈췄다.
'오. 드디어 말이 통하는 분이 나타났구나.'
병사들이 천천히 물러나며 다시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고 나타는 모두를 멈추게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칼?"
시선을 옮기자 바로 눈앞에 서슬퍼런 칼날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기를 버려라. 지금 당장."
"네. 항복입니다 항복. 하핫!"
남자의 말에 나타는 웃으며 꼬지를 바닥에 떨구고 두 손을 들었다.
백화성궁의 깊은곳에는 죄를 지은 신관이나 사제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 있었다. 감옥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속죄실이란 이름의 방이었고 그 안에는 화장실용으로 파놓은 간이 변기와 적당한 청결함을 유지시켜주는 세면대만 있는 비좁은 방이었다.
나타는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때는 구경 좀 했지만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방이었다. 1분동안 훑어보고나니 더 이상 볼게 없었기에 나타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보게 하며 마주보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나타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대 백화성궁 위층 회의실에서는 새로 부임한 성녀를 비롯해 여러 높은 신관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따로 조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모님을 노리고 침입한 것만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악의 하수인입니다!"
"어허, 비르마즈 대사제.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아직 그자가 악의 하수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소. 게다가 현장에서 처음으로 교전한 병사가 한 증언이 있지 않았소? 성모를 노렸다면 자신을 바로 처리하고 노릴 수 있는 실력이었다고 했소. 그말은 그 사내가 성모를 노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되는거 아니오?"
"그렇게 따진다면 그것도 노림수 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확실하게 결정나기 전에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알겠소? 비르마즈 대사제."
"후...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확실히 명확한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는건 옳지 않지요."
"성녀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성녀님은 신께서 직접 말을 전해주신분. 그 남자를 보고 뭔가 느껴지신게 없습니까?"
가만히 있던 하벤 대신관이 성녀에게 물어보았다.
"죄송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군요."
그렇게 말한 하벤 대신관이 팔짱을 낀 자세로 눈을 감았다.
철컹. 끼기기긱.
속죄실의 문이 열리며 꼬마아이가 들어왔다.
"너는... 후후.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거야."
"제가 여기 개구멍을 여러곳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제가 여기로 데리고 오지만 않았어도 오빠가 이런일을 겪을 일이 없었을텐데..."
나타의 여행 가이드를 자처했던 소녀가 울먹이며 나타에게 사과했다. 나타는 울먹이는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괜찮아. 너무 마음쓰지마. 내가 가고싶어 했던거잖아? 넌 안내만 해주었지. 바보같이 들킨건 나야. 그러니까 울지마. 뚝!"
나타가 우는 소녀의 눈매를 손으로 닦아주며 다독여주었다.
"이럴때가 아니예요! 어서 빠져나가요. 지금은 다른 분들한테 수면침을 놓아서 재워놓은 상태예요. 간수분들이 다 자고 있는 틈에 빠져나가요!"
소녀가 나타의 손을 잡아끌며 속죄실을 나가려고했다.
"난 여행을 즐기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네... 일정에도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되어버렸네."
한숨을 쉬면서도 소녀의 뒤를 따라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나타였다. 한편 갑작스러웠던 상황에 놀라 안정을 취하러 숙면실로 들어간 성모 아리아는......
"스으으... 으응... 으음."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리아... 아리아. 나의 충실한 신도여..."
잠을 자는 아리아가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를 건드렸느냐... 그는... 나의 예언과는 전혀..."
스윽.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리아가 눈이 감긴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신발도 신지않은 상태로 성모는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달칵.
백화성궁의 외벽 뒤쪽의 성벽이 튀어나오며 그 안에서 어린 소녀의 머리가 빠져나왔다. 벽돌이 상당히 컸기에 소녀는 가뿐하게 구멍에서 나올 수 있었다.
턱!
"윽. 어깨가 끼인다..."
뒤이어 나오던 남자가 끼이는 어깨를 구기고 구겨서 억지로 구멍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오빠 살 좀 빼세요."
"이건 살 뺀다고 될 문제가... 아야야, 아니야!"
소녀가 남자의 손을 잡고 한참을 끌어당긴 후에야 남자가 겨우 나올 수 있었다.
"후! 괜히 운동해가지고..."
드디어 백화성궁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나타가 뻐근한 어깨를 빙 돌리며 말했다.
"피피피피피!"
답답한 새장에 갇혀서 많이 불편했었는지 나타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글라시얀이 나타 머리위를 힘차게 빙빙 돌았다.
"정말 죄송했어요."
빠져나온 후 소녀가 나타에게 다시한번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다시 말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제 사과하는건 끝! 다시 안내 해줘야지."
"네? 떠나야 한다니까요!"
나타의 말에 소녀가 놀라서 소리쳤다. 소녀의 경악한 표정을 보면서 나타는 웃었다.
"하하하! 이대로 떠나는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거든! 이왕 일이 이렇게 된거 마지막을 즐기자. 가장 크고 활발한 축제가 있는곳으로 가자. 내가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 감옥까지 찾아와서 날 구해준 은인한테 아무것도 못해주고 떠나는건 뒤가 찜찜하거든. 가자! 최대한 안들키면서 마지막 축제만 즐기고 깔끔하게 떠나야지!"
나타가 기운차게 말하며 소녀의 손을 잡았다.
"... 풋! 정말 제멋대로예요 오빠."
나타의 말도 안되는 대답에 결국 포기한 소녀가 웃으며 나타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