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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23화 홍익인간
작성일 : 20-09-29 06:13     조회 : 34     추천 : 0     분량 : 8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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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3화 홍익인간

 

 며칠 후, 원래 가을걷이가 끝나고 추석이 지나면 아이들은 공부에 매진하는 시기였다. 그날은 진화가 오랜만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남화도 그런 형을 도우러 함께 서당에 나와 있었다. 추석 때 당한 공출로 모두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더 공부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진화는 어린 학생들을 격려했다. 진화는

 

 ‘弘益人間(홍익인간)’

 

 이라고 쓴 글자를 학생들 앞에 펼쳐 걸었다.

 

 “자, 다 같이 읽어보아라.”

 

 하고 말하자 아이들은 큰 소리로

 

 “홍, 익, 인, 간”

 

 이라 읽었다.

 

 “잘하였다. 그 뜻을 풀어 말해 볼 사람이 있느냐?”

 

 그러자 한 아이가,

 

 “‘넒을 홍, 유익할 익, 사람 인, 틈 간’ 이옵니다.”

 

 했다.

 

 “잘하였다. 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느냐?”

 

 아이들이 잘 몰라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 말씀은 우리 민족의 조상이신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 하신 말씀이니라. 이것을 건국이념이라 한다.”

 

 아이들은 또렷한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때 제일 나이 어린 꼬마 제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한이었다. 남화반 제자인데 오늘은 형들 공부하는데 청강생으로 끼어있었다.

 

 “스승님, 건국이 무슨 뜻이옵니까?”

 

 하며 한이는 자기 스승인 남화를 바라본다.

 

 “건국이란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다.”

 

 하고 남화가 사뭇 스승다운 목소리로 귀여운 제자에게 가르쳐주었다.

 

 “나라가 넘어졌사옵니까?”

 

 하고 한이 말하자, 형들이 모두 ‘와하하!’ 하고 웃었다. 형들이 웃어대자 한이는 무안해졌다.

 

 “나라가 넘어졌나요? 그때도....”

 

 순간 교실이 숙연해졌다. 남화와 진화는 잠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남화가 자기 제자에게 말했다.

 

 “한아, ‘건국’이란 나라가 넘어져서 세운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뜻이니라. 단군께서 이 땅이 아름다운 것을 보시고, 이곳이 사람이 살기에 참 좋구나 하고 생각하시어 우리나라를 이곳에 새롭게 만드셨느니라. 그것을 나라를 세웠다. 건국했다고 한다.”

 

 그제야, 한이도 형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진화와 남화는 귀여운 제자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진화는 수업을 계속했다.

 

 “이 뜻을 펼쳐 말해보겠느냐?”

 

 하며 진화는 걸어놓은 족자의 글 ‘弘益人間(홍익인간)’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자신이 없는지 훈장님만 바라보았다.

 

 “‘홍익인간’ 이 뜻은 이러하니라. ‘넓을 홍, 유익할 익, 사람 인, 틈 간.’ 이것은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홍익’이 무엇이냐? 나만이 아니라 이웃을, 내 나라만이 아니라 남의 나라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온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단군께서는 이 나라를 세우실 때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저 내 배만 부르게 하자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온 세상을 이롭게 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 또한 가르치셨다. 세상을 널리 교화하여 가르치라는 뜻이니라.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은 서로 싸우지 아니하였다. 신과 사람 또한 싸우지 아니하였다. 이런 높은 뜻을 받들어 이 나라의 백성 된 너희들은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려워도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느니라. 세상에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하느니라.”

 

 어린 학생들은 그 뜻을 마음에 새기려는 듯 사뭇 표정들이 진지했다.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재성이가 손을 들더니 진화에게 물었다.

 

 “하지만, 훈장님, 일본도 세상을 이롭게 한다며 전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도 ‘홍익인간’ 하고 있는 것이옵니까?”

 

 재성이는 늘 생각이 깊고 마음 쓰는 것이 남다른 아이였다. 진화는 이런 제자의 질문에 어찌 대답해줄까 잠시 고민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재성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생각은 저들이 하는 것은 홍익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목적은 그렇다고 하나 그 방법이 극악무도하옵니다.”

 

 하는데 재성이는 눈물을, 울분을 애써 삼킨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목적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하더라도 그 방법과 수단이 악하면 그 목적 또한 옳다, 선하다 할 수 없다.”

 

 그때 옆에 앉은 다른 아이가 말했다. 항상 기개가 남다른 인규였다.

 

 “하지만 훈장님, 이런 시기에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힘이 없으니 짓밟히고 빼앗기는 것 아닙니까? 힘이 있어야 세상을 이롭게 하든지 말든지 하지요.”

 

 한다. 진화는 울분에 쌓인 제자들을 지그시 둘러 보았다.

 

 “그래서 그만둘 것이냐?”

 

 “예?”

 

 제자들은 엄한 스승의 목소리에 어찌 대답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래서 그만둘 것이냐 말이다. 힘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다. 영원히 누리는 권세도 없고, 영원히 받는 핍박 또한 없는 것이 역사이다. 그것을 몰라 단군께서 ‘홍익인간’ 하라 하셨겠느냐? 너희가 힘이 있든 없든, 이 땅에 태어나 사는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힘이나 얻자고 서로 총칼을 들고 싸운다 하더라도 너희는, 우리는 그래도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이 나라를 세운 우리 조상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니라. ‘재세이화(在世理化)’가 무엇이냐. 남을 현혹하는 말로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할 바른 법, 바른 정치, 바른 경제의 도를 깨우쳐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너희들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바른 도리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깨우치고 또 그 깨우친 것을 열심히 널리 알려야 하느니라.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고 가르침이다. 너희들 지금은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이 뜻을 끝까지 받들겠느냐?”

 

 하고 진화가 다정하면서도 엄하게 말하자, 아이들은 사뭇 감동 어린 표정으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곁에서 먹을 갈며 듣고 있던 남화도 진화와 눈을 마주치며 깊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때였다. 벼락같이 누군가 서당 대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마당으로 들어서며 마루 위로 올라서는 군홧발 소리가 나면서 아이들이 공부하던 공부방 문이 박살이 났다.

 

 “지금,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가? 누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허락했나?”

 

 하며 뛰어 들어온 이들은 며칠 전 왔던 완장 찬 조선 사내와 순사들이었다. 순사들은 이미 서당 간판을 떼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쳐 부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자기 집으로 도망쳤다. 칼을 든 순사가 진화와 남화를 꿇어 앉히고 목에 칼을 겨누었다. 도망치던 두 아이가 진화의 집을 향해 달렸다.

 

 

 “선생님! 선생님!”

 

 진화의 집 마당으로 뛰어 들어온 아이들은 사색이 되어 노미를 불렀다. 이 아이들은 진화에게 한문도 배우지만 노미에게 한글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노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부엌에 있던 노미가 한달음에 마당으로 나왔다.

 

 “인규랑 재성이 아이가? 너희들이 웬일이가?”

 

 재성이가 울먹이며 노미에게 일렀다.

 

 “순사들이... 순사들이 또 와서 막 훈장님들을 잡아갈라 합니더!”

 

 재성이 옆에 선 인규는 분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린 두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놀란 아이들을 달랠 틈도 없이 노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서당을 향해 뛰었다.

 

 서당 대문은 활짝 열려있고, 서당 간판은 산산조각이 나서 마당에 나뒹굴고 있고, 공부방 문은 부서져 있고, 벽에 걸었던 ‘홍익인간’이란 글월은 처참하게 찢겨 진화 앞에 흩어져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진화와 남화는 넋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붙들려 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노미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두 사람 앞에 털썩 앉았다. 함께 뛰어온 아이들이 울며 서 있었다. 진화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만 집에 가 있으라고 달랬다. 한 대 얻어맞았는지 진화는 볼이 퉁퉁 부어있었다. 진화는 그런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홍익인간은 무슨...’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도 사실이다. 남화와 노미가 그런 진화를 부축하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진화는 아파서가 아니라 분해서 온종일 앓아누웠다.

 

 

 이리저리 미리 조금씩 빼돌렸다고는 해도 이 많은 식구가 겨울을 나기에는 곡식이 턱없이 모자랐다.

 

 “다들 배급받으러 가시오. 몸빼바지 입는 거 잊지 말고!”

 

 하며 부녀회장이 알리고 다녔다. ‘몸빼바지’라는 것은 허리와 발목에 줄을 넣어 통이 넓게 만든 일할 때 입는 바지로 일본식 일바지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배급을 타러 읍내에 갈 때는 여인들은 반드시 몸빼바지를 입고 가야 했고, ‘천왕폐하 만세’로 시작하는 일본말 구호를 완벽하게 외워서 외쳐야 했다. 배급을 받으러 가는 일은 주로 여자들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치마저고리만 입던 여인들이 바지를 입는 것은 여간 남사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고 보기에도 흉해서 모두 몸빼바지를 입고 나서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식구들을 먹이려면 이런 수모는 감수해야만 했다.

 

 노미도 부녀회장이 던져주고 간 몸빼바지를 입고 나섰다. 도련님들이 그런 노미의 모습을 입을 딱 벌리고 보고 섰는데 노미는 너무 창피해서 정말 딱 죽고만 싶었다. 그래도 착한 민화는

 

 “형수님이 입으니 그나마 그.... 바지도 이쁘네예.”

 

 하며 맘에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솔직한 윤화는

 

 “그기 그기 사람 입는 깁니꺼. 시상에, 흉해라.”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모두 윤화를 째려보았다.

 

 “댕겨오겠습니더. 지가 가야 배급이라도 타오지예.”

 

 하며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석이네는 미순이 어머니가 몸빼바지를 입고 나섰다. 다들 서로 민망해하며 읍내까지 걸었다.

 

 

 읍내에 도착한 노미와 동네 여인들은 배급을 주는 읍사무소 앞마당에 모여 섰다. 다른 동네에서도 많은 여인들이 와서 줄을 서 있었다. 다들 차례대로 줄을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어디서 온 누구인지 확인을 받고 식구 수 대로 배급을 받았다. 배급받기 전에는 ‘반짜이(만세)!’를 세 번 외치고 ‘황국신민서약’을 일본말로 큰소리로 복창해야 했다.

 

  “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와레라 하 코오코쿠신민나리 추우세에 못테쿤코쿠 니호오 젠)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我等皇國臣民ハ互ニ信愛協力シ、以テ團結ヲ固クセン”

 (와레라 코오코쿠 신민하타가이니 신아이쿄오료쿠시 못테 단케츠오 카타쿠세)

 우리 황국 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굳게 단결 하련다

 

 “我等皇國臣民ハ忍苦鍛錬力ヲ養イ以テ皇道ヲ宣揚セン”

 (와레라 코오코쿠 신민하닌쿠탄렌료쿠오 요오이 못테 코오도오오 센요오센)

 우리 황국 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노미는 이 긴 글을 그것도 일본말로 달달 외우느라 꽤 고생해야 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은 다 외우지 못해 뺨을 맞는 이들도 많았다. 미순이 어머니도 어김없이 뺨을 맞았다.

 

 할머니는 이 시절 어찌나 이것을 달달 외우셨는지 이 얘기를 내게 들려주시던 때에도 앞부분을 거의 다 외우고 계셨다.

 

 식구가 아홉 명이나 된다고 했는데도 배급으로 주는 곡식의 양은 식구 적은 집들과 다르지 않았다. 모래가 잔뜩 섞인 보리와 반이나 썩은 콩을 한 자루씩 받았다. 기가 막혔다. 다들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완장을 찬 사나이가 좌중을 향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겠구나 싶어 노미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그런데 그는 모여 있는 여인들을 향해 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자, 다들 양들이 부족해서 불만들이 많을 것입니더. 대일본제국의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성전을 치르며 대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이때 우리가 어찌 배불리 먹으며 호의호식 하겠습니꺼. 다들 어려울 것이나 모두 허리띠 단단히 동여매고 자랑스러운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이 거룩한 위업에 함께 동참해야 할 것이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의 환호를 신호로 모두 박수를 쳤다.

 

 “자, 자, 그러나 우리 은혜로운 천황폐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크나큰 영광의 기회를 주고자 하시오. 무려 쌀 두 가마!”

 

 쌀 두 가마라는 말에 모여 있던 여인들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쌀 두 가마를 하사하시기로 하셨소. 자! 모두 천황폐하! 반짜이! 반짜이! 반짜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모두 다같이 ‘반짜이!’를 외쳤다.

 

 “여기 모인 여인들 중에 기름 짤 줄 아는 사람 손 드시오.”

 

 하며 완장찬 사내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들 무슨 소리인 줄 몰라 어리바리하고 있는데,

 

 “콩으로 기름을 짜는 일을 할 사람들이 필요하오. 낮에는 이렇게 콩으로 기름 짜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군인들 빨래도 해주고, 바느질도 해주고 하는 간단한 일만 하면, 한 달에 쌀이 두 가마!”

 

 누군가 탄성을 질렀고, 너도 나도 손을 들었다.

 

 “이렇게 한 일 이년만 일하면 집을 한 채 살 수 있는 큰돈을 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요. 자, 자, 지원자 손 드시오!”

 

 하며 그는 마당에 서 있는 여인들을 둘러보더니 마당 주변에 포위해 있던 군인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여자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 젊은 처녀들을 중심으로 골라 한쪽으로 줄을 세웠다.

 

 기름 짤 줄 아는 사람 손들라는 말에 노미도 엉거주춤 손을 들고 서 있었더니 한 군인이 다가와 노미 손목을 획 낚아채 젊은 처녀들이 서 있는 쪽으로 줄을 세웠다. 둘러보니 아무리 많이 봐도 스물 안팎의 처녀들부터 열 대여섯인 소녀들로만 줄을 세워 두고 있었다. 손을 들고 있는데도 줄에 서지 못한 한 아주머니가 완장 사내에게

 

 “반장님! 내도 기름짤 줄 아는데예.”

 

 했다. 그러자 반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아래위로 아주머니를 노려보더니

 

 “아지매는 나이 들어가 일 못합니더.”

 

 한다.

 

 “와예? 지가 기름 짜는 일이라 하믄 우리 동네에서 젤로 치는대예. 눈치 볼 남편도 없어가 지는 밤이고 낮이고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더.”

 

 하며 제법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장은

 

 “마, 됐고! 혼인 한 사람들은 제외입니더.”

 

 그랬더니 미순이 어머니가

 

 “저기 저 색시는 혼인한 사람인디요.”

 

 했다. 미순이 어머니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사내는 잠시 노미를 찬찬히 묘한 눈으로 훑어보더니 곁에 서 있던 일본군 대장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일본군 대장도 노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혼인했더라도 아직 젊은 사람이면 괜찮소.”

 

 하고 완장 찬 사내가 일본군 대장의 말을 전했다.

 

 “자, 자, 다들 이제 돌아가시오!”

 

 하며 순사들은 좌중을 해산시켰다. 어느새 마당에는 젊은 여인들만 남았다. 모두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족히 오륙십 명은 넘어 보이는 젊은 여인들, 아니 소녀들이 한 줄로 서서 자기 이름과 나이, 출신 마을 등을 적었다. 그 옆에 지장도 찍게 했다.

 

 “아니, 지금, 오늘 간다고예?”

 

 하고 한 처녀가 당황하여 물었다.

 

 “그렇다. 오늘 간다. 곧 트럭이 도착하면 모두 탄다!”

 

 하는데 아까의 그 친절하던 목소리도 표정도 아니었다. 다른 처녀가 울먹이며,

 

 “지는 아부지한테 허락받아야 됩니더. 지는 오늘 가는 줄 몰랐어예.”

 

 한다.

 

 “어디로 가는교?”

 

 하고 역시 겁에 질린 목소리의 다른 처녀가 물었다.

 

 “시끄럽다!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정신대’의 일원이 된 것을 감사히 여겨라!”

 

 하고 반장이 고함쳤다. 드디어 노미 차례가 되었다. 노미는 쭈뼛쭈뼛하며 서기 앞에 섰다.

 

 “이름!”

 

 “아야마(吾山) 입니더.”

 

 하고 노미는 자신의 개명한 이름을 댔다. 그때는 관공서에서는 무조건 조선이름이 아니라 개명한 이름을 대야만 했다. 개명한 이름을 대지 않으면 경찰서에 붙들려 가 매를 맞았다.

 

 “나이!”

 

 “열아홉입니더.”

 

 “어느 마을이요!”

 

 하는데 노미는 잠시 망설였다.

 

 “저도 서방님한테 허락받아야 됩니더. 암만해도 오늘은 안되고예, 물어보고 다시 오겠습니더.”

 

 했다. 그러자 서기는 매서운 눈으로

 

 “그럴 시간 없다! 마을!”

 

 하고 고함을 친다. 노미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화가 나서 일본말로 소리쳤다.

 

 “私、結婚してるんです。夫の許しがないと…”

 와타시 켓콘시테룬데스 옷토노 유루시가나이토

 (저, 결혼했어요. 남편에게 허락받아야 하는데....)

 

 노미가 갑자기 일본말로 말하자 서기와 순사들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일본군 대장이 일본말로 노미에게 물었다.

 

 “旦那の名前は?(단나노 나마에와?)”

  (남편의 이름은?)

 

 노미는

 

 “鄭眞和です。改名した名前は烏川です。”

 (테에 마사카즈데스 카이메에시타 나마에와 우카와데스)

 (“정진화입니다. 개명한 이름은 우카와입니다.”)

 

 하고 일본말로 대답했다. 그러자 반장이 대장에게 무언가 속닥거렸다. 대장은 노미를 기분 나쁘게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반장은 노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에게는 기별을 넣을 것이고, 집에는 쌀도 가져다줄 테니 일단 차가 오거든 타시오.”

 

 노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소녀들이 아까부터 어디로 가느냐고 내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근처에 새로 생긴 공장이 있나 보다 낮에 일하러 갔다가 밤에 집에 오나보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사와 기록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고, 모든 절차가 끝나자 모두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트럭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트럭 두 대가 먼저 공터로 들어왔다. 눈에 익은 트럭을 보자 노미는 추석 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소를 잡아가는 놈들이 사람은 안 잡아가겠나?’

 

 하던 진화의 말도 떠올랐다. 징과 꽹과리, 노미의 놋그릇들을 실어갔던 그 트럭이었다. 황순이를 끌고 갔던 그 트럭이었다. 이번에는 노미가 끌려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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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4화 첫날 밤 2020 / 9 / 23 38 0 6129   
4 제3화 혼인 하는 날 2020 / 9 / 23 41 0 5538   
3 제2화 열아홉 노미 2020 / 9 / 23 46 0 6475   
2 제1화 열일곱 노미 2020 / 9 / 23 76 0 5689   
1 시작하기 전에 2020 / 9 / 23 340 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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