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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5화 진화
작성일 : 20-09-23 10:57     조회 : 38     추천 : 0     분량 : 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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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화 진화

 

 혼인한 첫날이었지만, 노미는 할 일이 많았다. 닭이 알을 낳았는지도 봐야 하고, 소여물도 주어야 하고, 누렁이(개) 밥도 챙겨주어야 하고, 장독대도 물걸레로 닦아야 하고, 마당도 쓸어야 하고, 얼마 전 새끼를 낳은 나비(고양이)도 살펴주어야 했다. 혼례준비를 하느라 며칠 동안 돌아보지 못한 채전밭에 나가 밭거지(씨부리기 전에 땅을 준비하는 일)도 해야 하고, 들에 나가 달래, 쑥 같은 나물도 캐와야 했다. 점심 준비를 해야 하고, 어제 잔치 뒷정리도 해야 하고, 또 저녁준비를 해야 했다. 밤이면 바느질을 하거나 다듬이질을 하거나 수를 놓아야 했다. 혼인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골 마을 어린 색시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끝이 없었다.

 

 어머니는 설거지하는 노미를 보고는 황급히 말리셨다.

 

 “아이고, 야 야, 새색시가 무슨 설거지고! 드가라! 며칠은 집안일 안 하고 신랑이랑 가마히 있어야 하는기다.”

 

 “가마히 있으면 뭐 하는교? 어무이 혼자 집안일을 우예 다 합니꺼. 돼쓰예, 혼례 했다고 가마히 있으란 법이 어딨는교?”

 

 하며 하던 설거지를 마저 했다.

 

 “됐다 안 하나. 신랑이 흉본데이. 퍼뜩 드가가 신랑 간식이라도 챙기주고 온나. 어서!”

 

 어머니는 노미를 억지로 일으켜서 등을 떠밀어 부엌에서 내쫓았다. 뿌루퉁해진 노미는

 

 ‘그러면 마당을 쓸면 되지.’

 

 라고 생각하고 마당 빗자루를 찾았다. 마당 빗자루를 들고 섰는데 마당을 누가 쓸었는지 방금 지나간 빗자루 자국이 선명했다.

 

 “거 마당은 아까 아침 일찍 정서방이 쓸었데이.”

 

 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깜짝 놀란 노미는 깜빡 졸다 깬 채로 아직도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진화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진화가 찡긋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놈의 심장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뜀박질을 하는지....

 

 “저기..., 보소, 내 소금 좀 줄 수 있습니꺼? 양치 좀 할라 하는데....”

 

  노미는 불에라도 데인 듯 화들짝 놀라서는

 

  “야? 아.... 알았습니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금을 가지러 장독대로 갔다. 그제야 노미는 자기가 혼인을 했구나, 이제는 혼자가 아니구나, 저 사람은 여기 낯선 곳에 와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내가 이래 내 일만 한다고 돌아다니면 외롭고 민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어린아이처럼 내내 노미가 이리 가면 이리 보고, 저리 가면 저리 보고 하던 진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노미는 손에다 소금을 한 움큼 쥐고 표주박에 물을 떠서는 진화에게 다가가 건넸다. 오늘 처음으로 진화의 얼굴을,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소금과 표주박을 받아 든 진화도 노미의 반짝거리는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자꾸 가슴이 뛰는지 왜 자꾸 체한 듯이 가슴이 답답한지 알 수가 없었다.

 

 진화도 밝은 햇살 아래 노미의 맑은 얼굴을 처음 똑바로 보는 것이었다. 새카만 눈동자, 작지만 오똑한 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봉긋한 입술, 집안에 여자라고는 어머니뿐이었던 진화는 어린 여인을 이렇게 가까이 찬찬히 바라본 적이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 말할지 알 수 없지만, 진화는 이 소녀가 몇 년 전 자기에게 버들잎 띄운 물바가지를 건넸던 그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일본에서 막 돌아와 영산에 계신 집안 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동트기 전에 나선 길이었지만 영산까지는 멀었다. 처음 가는 길이라 물어물어 가야 하는 길이었다. 목이 말라 어디든 우물을 만나면 물을 한 바가지 마셔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샘터에 한 소녀가 물을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녀가 유별하니 말을 건네는 것이 어려웠지만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크게 실례되는 일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어 기침을 하고 물 한 바가지만 달라고 했다. 그 소녀는 언뜻 보기에도 꽤 어여뻤다. 소녀는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뜯어 띄어주었다.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하니 천천히 마시라고 했다. 진화는 속으로

 

 

 ‘내 찬물 급하게 마시면 체하는 체질인 줄 어찌 알았을까?’

 

 싶었다. 진화는 나그네에게 물을 줄 때 버들잎 띄워주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진화는 소녀가 시키는 대로 물을 천천히 마셨다. 그 사이 슬쩍슬쩍 그가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소녀를 훔쳐보았다. 따스한 봄볕 아래, 바람은 간지럽게 부는데, 소녀는 멍하니 어딘가를 보는데, 눈이고, 콧날이고, 입매고, 곱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렇게 진화는 일부러 물을 천천히 마셨다.

 

 따스한 봄볕 아래, 바람은 간지럽게 부는데, 소녀는 멍하니 어딘가를 보는데, 눈이고, 콧날이고, 입매고, 곱지 않은 데가 없었다. 진화는 입이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진화는 일부러 물을 천천히 마셨다.

 

 어느 봄날의 그 샘터의 한순간이 멈추어 버린 듯했다. 그리고 영산 가는 길을 물었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소녀는 참으로 자세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음성이 어찌나 맑고 또렷한지....

 

 진화는 자기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그래서 아이들 목소리나 말하는 것만 들어도 그 아이 성품이 어떤지, 얼마나 영특한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아름답기도 했고, 또 영특하기도 했다. 게다가 친절하고 따듯한 성품을 가진 듯했다.

 

 소녀와 더 있고 싶었지만, 소녀는 서둘러 물동이를 이고 떠나려 했다. 물동이를 이어준다는 핑계로 소녀를 가까이서 봤다. 가까이서 보니 더 숨이 턱 멎을 만큼 고운 소녀였다. 그러나 소녀는 쌩하니 물동이를 이고 가버렸다. 진화도 어쩔 수 없이 가던 길을 가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척척 걸어가다 진화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소녀가 자기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서둘러 멀리 사라져버렸다.

 

 

 진화는 생전 처음 본, 낯선 동네의 낯선 소녀가 그렇게 한동안 자꾸자꾸 생각났다. 진화는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신이 우스워 혼자 수줍게 웃곤 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 정한 혼처가 이미 있었다. 정식으로 정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집안 어른들이 늘 너는 크면 아무개 집에서 아내감을 찾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아무개 집에 큰 우환이 있었다. 어른들은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으시려 했다. 다만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 집안 어른이 일본 경찰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했다. 진화네 집 안에서는 혼담이 오고 갔다는 사실조차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렇게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집안 장손을 아무에게나 장가보낼 수 없었기에 어른들의 고심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다 하는 양반집들이 풍비박산이 나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에게 이미 양반도 상놈도 없었다. 심지가 굳은 이들은 일본의 핍박을 피할 수 없었고, 용맹이 없는 이들은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화의 어머니가 멀리 어딘가를 다녀오시더니 좋은 혼처를 보고 왔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 아무개 집안과의 약속이 마음에 걸리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보고 왔다는 처녀는 동생 윤화 짝으로 주고, 진화는 어떻게든 아무개 집안과 혼인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의외로 완강하셨다. 당신이 보고 온 처녀는 진화 짝이고 윤화는 이미 석이네랑 이야기가 되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진화의 어머니는 워낙에 성품이 강직한 사람이라 좀처럼 누구를 쉽게 마음에 들어 하는 법이 없으셨다. 그런데 이번에 보고 오신 처자는 어찌 된 일인지 매우 마음에 들어 하셨다.

 

 진화도 그 처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외양을 신경 쓰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 아들들 잘났다, 잘생겼다 하는데도 단칼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소나 돼지 새끼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아들들에게도 늘 잘났다는 말에 우쭐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한 마디도 색시 될 사람의 외모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으셨다. 키가 큰지 작은지, 몸매는 통통한지 마른지, 낯빛은 환한지 아닌지 하는 당연히 해 줄만한 이야기인데도 절대 이야기해주지 않으셨다.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것조차 상스러워하셨다.

 

 어른들이 오고 가시고, 장인 장모 될 분들도 뵈었다. 두 분 모두 성품이 쾌활하시어 진화는 이런 분들 딸이면 매우 성격이 괄괄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분 다 키가 자그마하시고 얼굴도 특별히 눈에 띄시는 정도는 아니어서 색시 될 사람도 고만고만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특별히 실망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어릴 적부터의 가르침 덕분에 진화 또한 사람을 외양으로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진화는 동네 소녀들 중에서도 얼굴은 예쁘게 생기지 않아도 잘 웃고 마음씨가 착한 소녀들을 귀여워했다.

 

 

 사모관대를 쓰고 신부집으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진화는 자신이 혼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에 별 감흥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당연히 치러야 할 통과의례였고 누가 되었든 자신의 아내가 된 이는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당시 남자들, 특히 양반집 종손의 운명이고 의무였다. 어른들께 배운 대로 나무 기러기를 장모님께 드리고 초례청에 서서 서로 절을 하고 모든 것이 그저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신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흰 비단이 내려지는 순간 진화는 눈을 몇 번이나 다시 감았다 떠야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 소녀였다. 몇 해 전 샘터에서 본 바로 그 소녀였다. 그리고 보니 바로 이 마을 아닌가.

 

 몇 해 전 잠깐 본 소녀였지만 문득문득 그 소녀는 진화의 꿈속에 찾아왔었다. 자기를 보고 웃어준 적이 없는데 꿈속의 그 소녀는 자기를 향해 방실하고 웃었다. 멍하니 달이라도 보고 있는 날이면 소녀는 달 속에도 둥실하고 나타났다. 진화는 자기도 모르게 수줍어져 혼자 웃었다. 달 속의 그 소녀도 수줍게 자기를 보고 웃었다.

 

 

 그 소녀는 그렇게 진화의 꿈 속, 달 속, 가슴 속의 여인이었다. 그랬는데, 그런 그 소녀가 그 여인이 지금 혼례상 건너편에 족두리에 활옷을 아름답게 차려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두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진화는 노미를 만났다.

 

 

 보통 새신랑은 신부집에서 한 달 혹은 두 달을 보내는 것이 관습이었다는데 도대체 그 시간 동안 신랑들은 무엇을 했을까. 자기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이도 있었고, 내내 처가에서 기거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양반집들은 이 기간이 일 년이 되기도 해서 첫 아이를 낳고 시집으로 가는 경우도 흔했다. 여자의 시집살이만큼이나 남자의 처가살이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언제부터 왜 이런 풍습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간은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실상의 연애 기간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루 종일 진화는 노미를 따라다녔다. 노미가 소여물을 주면 옆에서 거들고, 누렁이 밥을 주면 옆에서 누렁이 머리를 쓰다듬고, 노미가 닭장에 들어가면 노미가 꺼내오는 달걀을 받아주었다. 헛간에 막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을 살피면 그 귀여운 놈들을 함께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진화는 노미가 국수를 삶는 동안 옆에서 물을 퍼다 주고, 노미가 말아 준 국수를 세 그릇이나 맛나게 먹었다. 신랑 신부 손에 흙 묻히지 말라고 어른들이 하도 말리셔서 밭일은 안 했지만, 며칠 있다 어른들 보시기 전에 밭일도 같이하기로 했다. 노미가 쌀을 씻어 저녁밥을 짓고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진화는 갑자기 누나를 빼앗겨서 심통이 난 처남 준이를 달래며 놀아주었다.

 

 노미는 봄나물을 담뿍 넣고 된장을 풀어 된장찌개를 자글자글 끓였다. 커다란 생선도 세 마리나 구웠고, 찐 달걀도 밤참용으로 옆에 두었다. 참기름 넣어 무친 나물도 빠지지 않았다. 진화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장인 장모는 절로 흐뭇했다.

 

 이런 날 술이 빠질 수 없다며 아버지는 술을 내오라 하셨다. 진화는 못 마시는 술이지만 장인이 주시니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장인은 다 좋은데 술을 잘 못 한다고 하니 아쉽다고 하셨다. 장모는 내가 딱 그 점이 젤로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둘러앉은 다섯 식구는 그렇게 하하 호호하며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노미는 진화가 달라고 하기도 전에 소금과 양칫물을 가져다주었다. 진화는 빙그레 웃으며 소금과 양칫물을 받아 양치를 했다. 노미는 가마솥에서 더운물을 떠다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왔다. 남편이 세수를 할 수 있도록 물과 수건을 챙겨주는 것은 바로 아내가 하는 일이었다. 노미 아버지의 세숫물은 어머니가 늘 준비하셨다. 그래서 언제나 동생의 세숫물을 챙겨 동생을 씻기고 재우는 것이 노미의 저녁 마지막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 노미는 동생이 아니라 남편의 세숫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미는 진화가 세수를 마칠 때까지 잠자코 옆에서 지켜 서 있었다. 세수를 끝낸 물에 이제 발을 씻을 차례였다. 발을 담그기 좋게 진화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진화가 막 물에 발을 담그고 씻으려는데 노미가

 

 “잠시만예.”

 

 하더니 가마솥에서 더운물을 한 바가지 더 떠왔다. 노미는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하고는 발을 담그고 있는 진화의 대야에 더운물을 부어주었다. 기분 좋은 따듯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진화는 이런 대접을 처음 받아보는 터라 낯설고 쑥스러웠다. 그리고 노미는 진화가 말릴 틈도 없이 대야에 손을 담그더니 진화의 발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진화는 깜짝 놀랐다. 노미의 보드랍고 작은 손이 진화의 발을 조물조물 만져주었다. 노미는 그저 어머니가 아버지께 늘 하던 대로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당연히 남편에게 이렇게 해주는 거구나 하고 보고 자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화는 깜짝 놀랐다. 진화네 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식구 많은 집이라 진화네 저녁은 누가 먼저 세수하는지가 늘 전쟁이었다. 아버지 세숫물은 보통 아들들이 돌아가며 챙겨드렸고, 어머니는 혼자 알아서 세수하고 발을 씻으셨다. 세숫대야가 몇 개 안 되는 바람에 서로 먼저 씻겠다고 난리를 치고 나서야 잘 준비들이 끝났다. 발 안 닦고 자는 날도 많았고 양치는 당연히 잊어버리고 자는 날이 허다했지만 신부집에 오면서 어머니께서 당부하신 것이 입에서 냄새가 나면 신부한테 흉잡힐 테니 반드시 소금으로 양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저 본대로 배운 대로 신랑 발을 닦아주고 있었지만, 노미는 지금 정신이 다 아득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신랑의 발을 닦아주었다. 아버지 발을 자주 닦아드렸기 때문에 남자 발을 닦아주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화는 노미에게는 아직 낯선 사람이었다. 아버지보다 발이 두 배는 큰 것 같았다. 아버지 발은 작고 오동통한 편인데 진화의 발은 선이 굵고 발목이 얇고 석고로 빚은 듯 희고 날렵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꼼꼼히 말려주고 난 후에야 노미는 ‘후~!’ 하고 무슨 큰 행사라도 치른 듯 뿌듯한 표정으로 진화를 바라보았다. 그런 노미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진화는

 

 “수고하셨습니더.”

 

 하며 웃었다.

 

 

 도대체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가 싶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어른들께 저녁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신혼부부 방으로 건너와 자리에 누웠는데 노미는 어제보다 더 떨리고 쑥스러웠다. 그것은 진화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서로 몸이 닿을까 싶어 둘은 어제보다 더 멀찍이 누워있었다.

 

 잠이 들락 말락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진화는

 

 “뭔 소리 안 들립니꺼?”

 

 하며 노미를 불렀다. 노미도 아직 잠이 안 들었기 때문에 몸을 반쯤 일으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문밖에서 분명 누군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문을 열고 보니 준이가 앉아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니, 여기서 모하노?”

 

 하고 노미가 물었다.

 

 “어무이가... 이제 누나랑 자믄 안된다하셔가.... 이제는 누나는 매형이랑 자야 된다 하셔가.... 어흐흑... 어헝....”

 

 결국 준이는 울음이 터져버렸다. 노미는 얼른 준이 입을 가리고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늘 이 방에서 누나랑 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내가 누나를 온종일 차지하고 있으니 준이는 부아가 날 대로 나 있었다. 노미는 준이를 달래도 보고 얼러도 봤지만 준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이었다.

 

 “처남, 그라믄 오늘은 우리랑 같이 여기서 잘까?”

 

 진화의 말에 준이는 갑자기 눈물을 뚝 그치더니 진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됩니더!”

 

 하고 노미가 말리자 그쳤던 울음이 다시 터지려는 듯 준이 얼굴이 다시 실룩거렸다.

 

 “아, 처남 맴도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이고, 오늘만 같이 자도 괘안은데, 그치예?”

 

 하며 진화는 노미 눈치를 살폈다. 노미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 마음을 헤아려주는 진화의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라믄. 니 딱 오늘만 우리랑 여서 자고 내일부터는 어무이랑 자야 된데이. 알겠나?”

 

 준이는 환하게 웃으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의 동침이 이루어졌다.

 

 신혼 둘째 날 밤 진화와 노미는 그렇게 어린 동생을 사이에 두고 자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로 쏙 파고 든 준이는 신기하게도 누나가 아니라 매형의 손을 잡고는 잠이 들었다. 노미와 진화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 막내도 내내 이래 내 손을 잡아야 잠이 드는데 집에 가믄 클났습니더.”

 

 하고 진화가 자기 막내 동생 이야기를 했다.

 

 “막내가 많이 어려예?”

 

 하고 노미가 물었다.

 

 “어리긴예. 지금 벌써.... 열 다섯입니더.”

 

 “열 다섯이요?”

 

 노미는 막내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놀랐다.

 

 “아가 덩치만 컸지 아직 얼라라 아직도 이렇게 내내 지 옆에 붙어 잡니더.”

 

 하며 진화는 막내 생각이 났는지 잠이 든 준이 이마를 쓸어 주었다. 노미는 그런 진화의 모습을 보며 진화가 동생을 많이 아끼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정화만 그런 게 아이고, 민화랑 태화도 내랑만 잘라 해서 올 때도 그눔아들 떨쳐내느라 욕봤습니데이.”

 

 “민화랑 태화요?”

 

 노미는 그제야 진화가 남동생만 다섯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막내가 열다섯이면 그 위로는 나이가 더 많다는 뜻이었다.

 

 “쌍둥이들입니더. 맨날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둘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래 의좋게 지냅니더. 우리 태화가 좀 아파가.....”

 

 하며 진화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디가예?”

 

 하고 노미가 물었다.

 

 “날이 추버지거나, 디게 놀라거나 하면 발작이 옵니더. 간질이 있습니더. 심하진 않은데 그래도 한 번씩 식구들 놀래키고 그랍니더.”

 

 진화는 준이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기 동생들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생각만 해도 좋을까 싶었다.

 

 “윤화랑 남화는... 둘째 셋째입니더. 내보다 어른스러운 아 들이라 오히려 내가 더 의지하고 그랍니더.”

 

 하며 진화는 노미에게 동생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미는 진화의 동생들이 궁금했다. 이제 노미가 만나게 될 새로운 가족이었다.

 

 “아, 참, 동생이 하나, 아니 둘이 더 있습니더. 옆집 사는 석이랑 미순인데, 아부지들끼리 형제 같은 친구셔가 내내 같이 자랐습니더.”

 

 하며 진화는 사람 좋게 웃었다. 동생들 이야기를 하며 흐뭇하게 웃는 진화를 보며 노미는 진화가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미는 속으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노미도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진화도 노미 못지않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같았다. 생각할수록 고마웠다. 노미는 준이를 잡고 있는 진화의 손 위로 자기 손을 포개며 말했다.

 

 “고맙습니더....”

 

 진화는 깜짝 놀랐다.

 

 “뭐가예?”

 

 “야까지 이뻐해 주셔서예.”

 

 하며 노미는 그윽하게 웃었다. 그것은 ‘고맙다. 당신은 참 훌륭하다. 대견하다.’ 이런 마음들이 다 들어간 웃음이었다. 노미는 그렇게 진화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갠 채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진화는 자기 손 위에 포개어진 노미의 손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따듯했다. 노미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꿈속에 나타나 웃던 소녀가, 달 속에 나타나 웃던 소녀가 지금 자기 손을 잡고 잠이 들어 있었다. 진화는 용기를 내어 자기 손 위에 포개진 노미의 손을 꼭 잡아보았다. 작았다. 참 작았다. 그리고 잠든 노미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져 보았다. 보드라웠다. 참 보드라웠다.

 

 “하느님, 지가 보물을 얻은 거 같습니더.”

 

 진화는 그렇게 속삭였다.

 

 

 
작가의 말
 

 ‘보물’ 할아버지가 참 잘 쓰시던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항상 ‘보물’이라고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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