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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6화 새끼손톱
작성일 : 20-09-24 06:05     조회 : 37     추천 : 0     분량 : 8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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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화 새끼손톱

 

 그렇게 시간은 하루 이틀 흘러갔다. 쏟아지던 앵두꽃도 어느새 다 떨어지고 앵두나무에는 새초롬하게 앵두 열매가 달릴락 말락 하는 중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진화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말끔하게 쓸어놓았다. 그동안은 내내 어머니가 물을 길어오셨는데 오늘은 노미가 한사코 자기가 다녀오겠다고 해서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노미에게 물동이를 이어주셨다. 동구 밖에 있는 샘까지 얼른 다녀올 마음에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몇 발짝 뒤에 진화가 뒷짐을 진 채 따라오고 있었다. 노미는 속으로

 

 ‘저 양반이 도대체 뭐 할라고 여자들 물 길으러 오는 데를 따라나섰노.’

 

 싶었지만 뭐라 말도 못 하고 쌩하니 먼저 샘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러자 어느 틈에 진화도 잰걸음으로 달려와 옆에 와 같이 걸었다.

 

 “뭐 할라꼬 따라오능교?”

 

 노미는 옆 눈으로 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진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뭐합니꺼. 답답한데 휘휘 걸으면 좋지.”

 

 하며 노미 옆에 찰싹 붙어 서서 걸었다.

 

 “동네 사람들 흉봅니더. 들어 가시소, 마!”

 

 “흉은 누가 무슨 흉을 본다고 그라능교? 신랑이 색시 물동이도 들어주고 하믄 다 좋다하지....”

 

 하더니 노미 머리 위에 이고 있던 물동이를 휙 뺏어서는 양팔로 들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노미는 뭐라 말리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진화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샘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동네 여인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노미는 아뿔싸 싶었지만, 진화는 그중 안면이 있는 여인들에게 먼저 다가가 넙죽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능교? 식사는 아직 안 하셨지예?”

 

 살갑게 인사하는 진화의 등장에 여인네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이미 뒤따라오는 노미는 보이지도 않았다. ‘신랑이 물동이도 들어주고 좋겠다.’ 하면서 여인네들이 왁자지껄하는데 노미가 샐쭉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눈치 보여가 안 되겠다, 신랑이랑 같이 있게 자리 비켜주자.’ 하며 모두 우르르 각자 집으로 떠났다.

 

 그렇게 노미는 진화와 샘터에 덜렁 남겨졌다. 노미는 정신이 다 멍했지만, 물동이에 물을 서둘러 퍼 담았다. 그사이 진화는 근처 돌무더기 위에 앉았다. 그때 앉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 양반이 그때 일을 기억하는가?’

 

 노미는 진화가 두 해 전에 여기서 자기를 본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알면 안다고 할만도 한데 진화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노미는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때 그렇게 잠시 스쳐 지나간 그 남자가 지금은 신랑이 되어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싶어 노미는 가슴이 괜스레 두근거렸다. 물을 다 채운 후 노미는 물동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진화가 얼른 달려와 물동이를 머리 위로 올리는 것을 거들었다. 또 그때처럼 얼굴이 딱 마주쳤다.

 

 노미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은 진화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주이소. 내가 이게.”

 

 진화가 물동이를 뺏어 자기 머리 위로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노미는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됐어예. 진짜 남들이 흉봅니더. 남정네가 물동이 이는 거 아입니더.”

 

 노미가 하도 단호하게 말하자 진화도 이번에는 져주기로 했다.

 

 “내 참, 알겠습니더.”

 

 진화가 물동이에서 손을 떼자 노미는 익숙하게 물동이를 머리 위에 야물게 이고는 먼저 앞서 걸었다. 엉덩이를 실룩샐룩하며 걷는 모습이 왠지 우스워서 진화는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랬다. 두 해 전 노미를 처음 봤을 때, 진화는 그 고운 소녀가 자기 색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때도 그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동이를 이고 지금처럼 실룩샐룩하며 빠르게 가버렸었다. 다시는 못 볼 그 소녀를 진화는 한동안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여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기가 막혀 진화는 자꾸 웃음이 났다. 하지만 진화는 아주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준이는 이제 누나랑 매형 사이에서 자겠다고 보채지 않았다. 진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장인 장모님과도 가까워져서 오히려 자기 집보다 더 편했다. 장모님은 사위가 너무 예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고, 장인도 사위가 양반이라고 위세 떨거나 하는 놈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서글서글하니 농담도 잘하고 집안일도 제법 잘하는 진화의 모습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노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 같아 장인은 사위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림일세, 그림이야. 아무리 내 딸이랑 내 사위라지만 세상천지에 젤로 보기 좋은 그림이네, 그려.”

 

 하며 둘이 앉아 있는 것만 봐도 혀를 차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장인은 진화의 새끼손가락 손톱이 유난히 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 새끼손톱이 유난히 기네. 이유가 있는가?”

 

 “아, 예, 이것은... 지가 글쓰는 사람이라 그렇습니더.”

 

 진화는 쑥스러워하며 이야기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오른손 새끼손톱을 길렀다. 왜냐하면, 붓글씨를 쓸 때 먹을 갈려면 벼루에 물을 담아야 하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된다. 그 때문에 새끼손톱을 길러 손톱으로 물을 찍듯이 담아 벼루에 물을 채우면 그 양이 딱 적당해지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장인은 새삼스레 우리 사위가 글을 읽고 쓰는 선비로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아, 그럼 이참에 글을 한 장 써 주겠는가? 뭐든 좋은 글로다 써주면 내가 족자를 만들어 걸 테니.”

 

 진화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하며 글 쓸 준비를 했다.

 

 노미가 종이와 붓 벼루를 찾아와 진화 앞에 놓아주자 진화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마음을 정했는지 종지에 담긴 물을 새끼손톱으로 떠 벼루에 담아 먹을 정성스레 갈기 시작했다. 온 방 안에 은은한 먹향이 퍼졌다. 장인도, 장모도, 노미도, 준이도 모두 숨을 죽이고 진화가 먹을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먹을 갈고 난 후 진화는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꼭 자기처럼 힘차면서도 아름답고 부드러운 필체였다.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일백번경사료)

 

 白骨爲塵土(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也歟(녕유개리야여).

 

 글을 써 내려가는 진화를 바라보며 장인은 사뭇 감동에 젖었다. 마지막 글자를 마치자,

 

 “음, 명필이로세! '단심가(丹心歌)'로구만.”

 

 하고 그 글귀를 알아보셨다. 그제야 노미도 그 글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되어 넋이 있고 없더라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노미의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던 글귀였던지라 그 뜻을 이렇게 풀어 읽어주었다.

 

 “장인어른께서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더.”

 

 “자네가 영일 정가 포은공파 30대손이라 했으니, 조상님 글월이군. 정씨 집안사람들이 예로부터 마음에 무엇을 하나 품으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정서방의 조상님 되시는 포은 정몽주님은 고려 말의 대학자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일으키려는 이성계의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으셨네. 비록 그 기운이 다한 나라였으나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에 대한 충심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셨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네. 맞는가?”

 

 진화는 장인어른의 깊은 이해에 사뭇 감동하였다.

 

 “예, 맞습니다. 감히 알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위의 칭찬을 들으니 노미 아버지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포은 정몽주 공께서는 워낙에 명망이 있는 어른이셨던 지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자기편으로 회유하려고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대해 이와 같은 답시를 보내셨지. 이 얼마나 단호하고 기개 있는 글인가! 하! 그 일로 비록 이방원이 보낸 자들의 칼에 목숨을 잃으셨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셨기에 선죽교에서... 하! 의로운 죽음을 맞으셨던 것이었네.”

 

 무릎까지 치며 말하는 노미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비장함이 흘러넘쳤다.

 

 “노미야, 알겠느냐. 네가 시집가는 집안이 이래 유명하고 고귀한 곳이니라. 시집에 가서도 가문에 누가 되지 아니하게 항상 행동에 조심하고, 시어른과 서방님 모시기를 하늘같이 여겨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평소와 다르게 ‘느냐’체로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노미는 낯설고 좀 우습기도 했지만 웃지 않고 진심을 다해 ‘예.’라고 대답했다. 진화는 장인어른이 자기 집안과 조상님에 대해 예를 다해 말씀해 주시는 것에 깊이 감동했다.

 

 장인은 그 길로 비단 족자를 가져와 진화의 글을 붙이고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시니 노미도 뿌듯했다.

 

 족자를 바라보며 서 있는 진화의 모습이 평소와 사뭇 달라 보여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 같았다. 진화는 그런 노미의 마음을 알았는지 빙그레 웃으며 열심히 호박잎을 다듬고 있는 노미 곁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새끼손톱으로 노미의 허벅지를 꼬옥 하고 찔렀다. 노미는 깜짝 놀라 ‘아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아버지 어머니가 들으셨나 싶어 얼른 입을 가렸다. 진화는 예의 그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키득 키득 웃었다.

 

 “와예, 아픕니꺼?”

 

 노미는 진화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살짝 흘겨보았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진화는 더 짓궂은 표정으로 키득 키득 웃더니 이제는 아까보다 더 세게 노미의 허벅지를 새끼손톱으로 꾹 눌렀다.

 

 “아야! 와 이랍니꺼?”

 

 노미는 진심 놀라고 아파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손톱이 붓글씨 쓰는데 만 쓰는 게 아닙니더. 이래 안 이쁜 사람이 있으면 요래 꼬옥 찌를 때도 씁니더.”

 

 하며 또 키득 키득 혼자 좋아 웃었다. 노미는 좀 전까지만 해도 선비다운 광채를 뿜는 진화의 모습에 넋을 잃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놀리는 진화의 모습에 영 난감했다.

 

 노미는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싶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진화를 뾰로통하게 바라보아 주었다. 그런 노미의 표정이 더 좋았는지 진화는 자꾸 킥킥 웃으며 다른 곳은 또 찌를 데 없나 하며 살폈다. 노미는 ‘이제 고마 하이소.’하는 표정으로 손을 밀쳐내고 진화는 더 재밌어하며 자꾸 노미를 놀렸다.

 

 뒤에서 그런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는 장인 장모 시선을 눈치채고 나서야 진화는 장난을 그만두었다. 그 모습이 참말로 보기 좋아서 노미 어머니는 웃으면서도 자꾸 찔끔찔끔 눈물이 났다. 좋아서, 참 보기 좋아서 두 아이를 그렇게 눈에 담고 또 담았다.

 

 

  할아버지는 이 새끼손톱을 꽤 소중하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논일 밭일 하려면 거추장스러울 만도 한데 진화는 우리 할아버지는 새끼손톱은 항상 정갈하게 정해진 길이를 유지하셨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고, 글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셨다. 물론, 안 이쁜 사람 허벅지를 가만히 찌르는데 더 자주 사용하시긴 했지만 말이다.

 

 

 그날 밤, 낮의 일이 생각났는지 자리에 누운 진화는 자꾸 혼자 키득 키득 웃었다. 노미는

 

 “뭐가 그래 우습습니꺼?”

 

 하고 여전히 화가 덜 풀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진화는

 

 “진짜 내한테 화났다 아입니꺼. 맞지예?”

 

 하며 여전히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입니더. 아파가 그랬지예. 내 놀라가...”

 

 노미는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서둘러 변명을 했다.

 

 “아이기는.... 화가 나가 얼굴이 빨개졌는데....”

 

 진화는 여전히 그런 노미가 귀엽고 재미있었다.

 

 “아이라예, 지가 우예 서방님한테 화를 냅니꺼.”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화난 사람처럼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천정을 향해 누워 있던 진화가 갑자기 노미 쪽으로 획 돌아누웠다.

 

 “방금 뭐라 했습니꺼...?”

 

 방금 전까지 장난기 가득하던 진화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지가 우예 화를 내느냐꼬...”

 

 “아니, 방금 내한테, 나를 뭐라 불렀냐고예.”

 

 “지가예? 지가.... 그러니까....”

 

 “방금 서방님이라고 한 거 같은데....”

 

 “아..., 지가예? 그야 서방님이시니까... 서방님이라고....”

 

 그제야 노미는 자기가 처음으로 진화를 서방님이라고 부른 걸 깨달았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라 노미는 또 이불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진화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화났습니꺼?”

 

 진화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니까...요...”

 

 “아, 장모님이 안 보고 계셨음, 한 대 칠 뻔 했는데예.”

 

 “아니라니까예, 지가 서방님을 우예 칩니꺼. 진짜... 참말로....”

 

 하는데 갑자기 진화가 와락 노미 곁으로 다가왔다. 노미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하게 놀랐다. 진화는 눈만 내놓고 있는 노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노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안 이쁜 사람한테 그라는 거라 하셔가... 내는....”

 

 하며 진화를 올려다보았다. 어스름 달빛에 일렁거리는 커다랗고 맑은 눈이 노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화도 그 달빛 아래 자기를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는 노미와 눈이 마주쳤다. 진화는 조용히 속삭였다.

 

 “맞습니더. 안 이쁜 사람한테 그랍니더.”

 

 진화는 노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이불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진화는 한쪽 팔로 자기 얼굴을 괴고서 그런 노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노미는 그만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함께 지낸 지 어느새 보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진화는 잠자리에서 노미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댄 적이 없었다. 워낙에 예의 바른 사람이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노미를 존중해주고 있기 때문인 듯도 했지만 노미는 한편으로 이 사람이 혹시 사내구실을 못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괜한 의심도 잠깐 들었더랬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함께 자고 깨는 것이 익숙해져서 자신이 새색시고 진화가 새신랑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노미는 진화가 갑작스럽게 휙 다가오자 드디어 때가 되었는가 싶어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화는 웬일인지 더 다가오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노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미도 어찌할 바를 몰라 숨만 쌔근쌔근 쉬고 있어야 했다. 진화가 부드러운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지가.... 우야믄 좋습니꺼....?”

 

 노미는 진화의 말을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지가... 여자를 어찌 안는지 모릅니더. 삼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고 가르쳐 주시긴 했는데, 지 맘에 드는 얘기들이 아니라서.... 우야믄 됩니꺼?”

 

 진화의 목소리는 낮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미는 잠시 달달 떨고 있는 진화의 눈동자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이 아기 같은 남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싶었다. 말할 수 없이 고운 눈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어여쁠 수 있을까 싶게 어여쁜 눈이었다. 원래 노미가 누가 뭘 물어보면 알든 모르든 정성을 다해 대답해주고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 아니던가. 노미는 진화의 눈을 지그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자가 여자를 안을라믄은예.... 그니까... 여자는 남자가 갑자기 덥석 잡고 그라믄 소스라치게 싫거든예. 그라고 남자들은 안 그랄지 몰라도 여자들은 참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몸이 허락이 안 되는 거거든예.... 그니까.... 여자가 참말로 자기를 좋아하는지 반드시 마음부터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거든예.... ”

 

 진화는 노미의 말을 정말 열심히 새겨들으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노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니까... 먼저.... 남자는 여자 머리도 만져주고 볼도... 만져주고..... 천천히 그렇게.... 가만히 만져주다가.... 여자가 허락을 하면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를.... 천천히 머리도 만져주고 볼도... 만져주고....”

 

 노미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자기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나 싶었다. 진화는 어느새 노미의 머리를, 볼을 만져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노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노미가 자기 머리를, 볼을, 눈을, 코를 만지게 했다.

 

 “그니까... 그니까예....”

 

 노미는 점점 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진화는 노미의 손을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자기 가슴을 만지게 했다. 노미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리고 진화는 자기 허리를 만지도록 노미의 손을 더 끌어당겼다. 진화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우짭니꺼...”

 

 노미는 할 말을 잃었다. 노미도 이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진화는 이제 노미의 눈을 코를 입술을 만졌다. 처음으로 만져보는 노미의 입술은 촉촉하고 보드라웠다. 그리고 진화는 노미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입술을 만지게 했다. 늘 여자보다도 더 붉고 아름다운 입술이라고 생각했던 진화의 입술이 노미의 손끝에 다았다. 진화의 손에서 아까의 그 먹향이 풍겼다. 노미는 눈앞이 흐릿해져 버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손으로 서로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진화의 입술이 노미의 이마에, 볼에, 귀에 닿았다. 그리고 입술에 닿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그날 밤 하나가 되었다.

 

 

 
작가의 말
 

 남자가 여자를 안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아름다운 일을 아름답게 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으로, 남자로, 여자로 태어난 당신.

 이 아름다운 일을 아름답게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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