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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7화 마늘밭
작성일 : 20-09-24 07:47     조회 : 34     추천 : 0     분량 : 7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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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화 마늘밭

 

 다음 날 아침, 노미와 진화는 아버지가 마당을 쓰시는 소리에 잠을 깼다. 진화도 노미도 깜짝 놀라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기...기침 하셨습니꺼...”

 

 허둥대며 마당으로 나선 진화는 장인에게서 빗자루를 받아들려 했다.

 

 “아닐세, 오늘은 내가 했네. 자네는 세수하고 아침 먹을 준비나 하시게. 허허!”

 

 장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벙긋 웃으며 진화의 등을 떠밀었다. 진화는 ‘아입니더..’ 하면서 빗자루를 뺏어 들려 하고 장인은 한사코 진화의 등을 밀어냈다.

 

 “어허, 덩치도 커가 밀리지도 않는구먼. 아이구, 우리 정서방은 눈곱만 떼도 잘났구먼. 허허허.”

 

 장인과 사위가 빗자루를 가지고 잠시 옥신각신하는 사이 얼굴이 빨개진 노미는 얼른 어머니가 계신 부엌으로 갔다.

 

 “일어났나?”

 

 “예..., 예.”

 

 노미는 어머니와 눈도 맞추지 못한 채 얼른 어머니가 막 무쳐놓은 나물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어머니는 그런 노미의 등을 두드리며,

 

 “됐다. 고마, 너도 씻고 아침 먹을 준비하거라.”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어머니는 노미 등을 떠밀어 부엌에서 나가게 했다. 어머니의 성화에 노미는 하는 수 없이 부엌을 나와야 했다.

 

 아침상이 차려지고 다섯 식구는 아침상 앞에 둘러앉았다. 노미도 진화도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밥그릇에 코를 처박고 밥을 먹었다. 그런 두 아이가 우스워서 아버지 어머니는 소리 안 나게 웃었다. 준이는 오늘 아침 분위기가 왜 이런가 하며 어른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닭을 잡아 삼을 넣고 삼계탕을 끓이셨다. 커다란 닭 한 마리가 사위 앞에 놓였다. 장모가 어여쁜 사위에게 해주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진화의 처가살이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진화는 아침이면 말끔하게 마당을 쓸고 틈나는 대로 나무도 해오고, 소풀도 베어왔다. 오전에는 훈장님 하던 버릇이 있어 준이를 앉혀놓고 한문을 가르쳤다. 가끔 노미도 수업을 들었다. 어찌 소문이 났는지 동네 꼬마들이 모였다. 동네 꼬마들 핑계 대고 그 어머니들도 거의 매일 진화를 보러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진화는

 

 “내 실은 언문을 읽기는 하는데 쓰는 걸 잘 못합니더. 좀 봐줄랍니꺼?”

 

 했다. 그래서 밤이면 노미와 진화는 호롱불을 켜놓고 한글쓰기 공부를 했다. 책을 베껴쓰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한글로 쓰기도 했다. 익숙해진 다음에는 일기 같은 짧은 글도 썼다.

 

 ‘오늘은 색시가 나물을 뜯으러 가는데 따라가고 싶었다. 오지 말라고 해서 섭섭했다.’

 

 ‘오늘은 색시가 밥을 비벼주었는데 참 맛있었다.’

 

 ‘오늘은 색시가 꽃이 이쁘다고 해서 따주었는데 좋아했다. 나도 참 좋았다.’

 

 같은 글이었다.

 

 

 꿈같은 시간이 더 흐르고, 드디어 진화가 집으로 돌아갈 날이 되었다. 노미와 진화는 평소보다 더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고 아버지 어머니께 아침 문안 인사를 드렸다.

 

 “이제 구길에 돌아가나?”

 

 구길은 진화가 사는 동네였다. 장인은 그윽한 눈빛으로 진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낯설고 불편했을 텐데, 잘 지내주어 고맙네.”

 

 “아입니더. 장인 장모님이 워낙 편하게 해주셔가 저희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좋았습니더.”

 

 “먹는 거는 입에 맞았는가 모르겠네. 내가 솜씨가 그저 그래가...”

 

 장모의 목소리는 어느새 담뿍 든 정 때문에 떨렸다. 진화는 손사래를 치며

 

 “아입니더. 맛나고 귀한 거 해주시느라 장모님이 고생이 많으셨지예.”

 

 하고 말했다.

 

 “우예, 말도 저리 이쁘게 하노...”

 

 하며 장모는 찔끔하고 쏟아지는 눈물을 옷소매로 꾹꾹 눌렀다.

 

 “그래, 오늘 나서면 한 보름 있다 오나?”

 

 “예... 근데....”

 

 하면서 진화는 곁눈으로 노미의 옆얼굴을 살폈다.

 

 “보름 있다 왔는데, 이 사람이 쫓아온다 할지 잘 모르겠습니더....”

 

 웃으라고 한 얘긴데 노미는 표정이 샐쭉해졌다.

 

 “와, 그 사이 맴이 바뀌면 안 데꼬 갈라하나?”

 

 하고 장인도 웃으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는데 노미 표정이 더 샐쭉해졌다.

 

 “와, 혹시라도 정서방이 안 데리러 올까봐 그라나?”

 

 하고 아버지가 짐짓 노미를 놀리며 말하자 노미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고마하이소. 잠깐이지만 신랑이랑 떨어져 있을라니 새색시 마음이 좋을 리가 있습니꺼.”

 

 하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말렸다.

 

 “와, 임자도 그랬나? 낼로 보고 싶어가 잠도 못 자고 그랬나?”

 

 하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곁눈으로 보며 웃자 어머니는

 

 “무슨! 가서 안 오면 딴 데 시집가야제 했지예.”

 

 아버지 어머니는 섭섭해하는 두 아이 마음을 풀어주자고 농담을 하는 것인데 노미는 자꾸 마음이 어지러웠다. 자기도 자기 맘이 왜 이런지 알 수가 없었다.

 

 

 노미는 진화의 양칫물을 챙겨주고 먼 길 갈 차비를 도와주었다. 진화는 짚신을 단단히 신고 노미가 건네는 봇짐을 매었다. 봇짐을 맨 채 우뚝 서 있는 진화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내 준비되는 대로 올 테니, 잘 챙기 묵고, 잘 자고.....”

 

 노미는 대답도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진화는 그런 노미의 이마를 한 번 더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싸리문을 지나 집을 나섰다.

 

 노미는 그대로 서서 진화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 샘터에서처럼 진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훠이 훠이 걸어갔다. 손도 한 번 잡아주고 가지 않은 것이 노미는 못내 섭섭해서 자기 손만 만지작거렸다. 돌아볼 만도 한데, 지금쯤이면 돌아볼 만도 한데, 진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느새 저만치 멀리 가고 있었다.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그렇게 눈물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데 진화가 우뚝 멈춰 선 것이 보였다. 노미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눈을 크게 떴다. 진화는 고개를 돌려 노미를 보았다. 노미는 또 심장이 툭 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진화는 노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진화는 노미를 바라보았다. 노미는 수줍게 가슴 근처까지만 손을 소심하게 올리고 겨우 보일락 말락 하게 손을 흔들었다. 새하얀 진화의 얼굴은 얼핏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노미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진화의 얼굴을 보았다. 웃어줄 만도 한데, 한 번 환하게 웃어줄 만도 한데, 진화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획 돌아서더니 달리듯이 앞으로 가버렸다.

 

 큰 나무가 서 있는 모퉁이를 돌아서 진화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왜 자꾸 못나게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는 모습을 어머니께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노미의 곁에 준이가 와서 서더니 노미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누님아, 우나?”

 

 “아이다. 울기는...”

 

 “매형, 올끼다. 울지마라. 내한테 온다했다.”

 

 “그래, 안다.”

 

 노미는 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어리지만 준이는 누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누가 누구를 많이 예뻐하게 되면 눈물이 난다는 것을 말이다.

 

 

 

 진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그 날 밤, 언제부터 둘이었다고 혼자 잠을 자려니 노미는 여간 쓸쓸하지가 않았다. 준이가 이제 매형이 없으니 누나랑 자겠다고 할만도 한데 ‘누님, 안녕히 주무십시오.’하고 제법 의젓하게 저녁 인사까지 하고는 어머니 아버지 방으로 갔다.

 

 ‘잘 도착했으려나, 식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났으니 무슨 얘기를 하려나, 내 얘기는 뭐라고 하려나, 내는 이렇게 잠이 안 오는데 자기는 잠이 잘도 오려나....’

 

 노미는 비어있는 진화의 베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심스레 손으로 한 번 쓸어보기도 했다. 얼마나 깔끔한 양반인지 머리카락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자고 일어난 자리는 언제나 말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잘 잤느냐며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곤 했다. 사람이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참 못나지는 법인데 진화는 더 뽀얗고 예뻤다. 노미는 감히 쑥스럽고 어려워서 서방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겠는데 진화는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노미의 눈꼽을 떼어 주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코도 파주겠다는 걸 화들짝 놀라서 노미는 얼굴을 가리고 방을 뛰쳐나와야 했다. 그러던 사람이 지금은 없었다.

 

 ‘언제부터 둘이었다고....’

 

 노미는 진화의 베개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러다 이러고 있는 자기 자신이 우습고 기가 막혔다. 눈을 감아도 그 사람 얼굴이 보이고, 눈을 떠도 그 사람 얼굴이 보였다.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노미는 자기 마음인데도 지금 자기가 왜 이러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언제 봤다고, 얼마나 오래 봤다고, 내가 정한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 정해 준 사람을 딱 하루 못 보고 있는 것인데, 아직 하루도 채 안 지났는데, 노미는 자꾸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자기는 식구들 만나가 좋을 텐데, 내 생각 같은 건 안 날 텐데, 맨날 우리 둘째는 어쩌고 저쩌고, 우리 셋째는 어쩌고 어쩌고, 우리 쌍둥이들은 어쩌고 저쩌고, 우리 막내이는 어쩌고 저쩌고, 거기다 옆집 동생들까지...., 자기 동생들이 세상에서 젤로 귀한 사람 아이가. 지금 얼마나 좋을까. 하이구, 참 식구가 많기도 하다. 평생 외로운 거 모르고 산 사람인데, 지금쯤 고단해가 자겠지....’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그 사람이 또 속없이 벙긋 웃는다.

 

 ‘어찌 저리 밉게 웃을까.’

 

 하며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울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이

 

 ‘울다가 웃으면 큰일 난데이...’

 

 하며 놀린다. 그 얼굴이 우스워 노미는 혼자 키득 키득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쳤는갑다.’

 

 하며 노미는 애써 잠을 청했다. 또 눈물이 솟아올랐다.

 

 ​

 혼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물을 길어오고, 하늘을 향해 ‘감사합니다.’ 세 번 기도를 하고, 닭 모이를 주고, 달걀을 걷어오고,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누렁이 밥을 챙겨주고, 소여물을 주고, 장독대를 닦고, 어느새 마당을 뛰어다니며 야옹야옹 우는 새끼 고양이들을 주어다 지 어미 품에 넣어주었다.

 

 곧 걷을 때가 된 마늘밭도 들여다봐야 하고, 볕이 좋으니 빨래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어디 나가고 싶지 않으니 그건 내일 하기로 하고, 방을 쓸고 닦고, 마루도 쓸고 닦고, 점심 준비를 하고, 점심을 먹고, 어머니랑 미뤄두었던 다듬이질도 하고, 그렇게 하루가 훌쩍 지나가고 밤이 오고 또 아침이 밝았다. 노미가 내내 넋이 나간 애 마냥 멍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여보, 자가 참말로 혼인을 했는 모양입니더.”

 

 어머니는 역시나 지그시 노미를 바라보고 있는 노미 아버지를 향해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사실은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더욱 없다. 하지만 생명도 주시고, 영혼도 주신 하늘은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곤 한다. 그런 걸 우리네 옛사람들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들과 매일 매 순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며칠이 흘렀을까. 어느새 진화가 돌아오겠다고 한 보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기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지금처럼 연락이 바로바로 되던 시절도 아니었기에 오늘내일 오겠지 하며 노미는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신랑이나 신부가 이 기간에 마음이 변해 파혼하는 경우도 없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새 초여름으로 들어선 계절은 낮이면 제법 볕이 따끈따끈했다. 노미는 수건을 뒤집어쓰고 마늘밭으로 갔다. 집 앞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바지에 있던 노미네 마늘밭은 한참 풀을 매주어야 할 때였다. 어느새 땅 속에서 알이 맺히기 시작한 마늘이 다치지 않도록 호미로 조심스럽게 잡초들을 뽑아주어야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결에 포마드 향기가 풍겨왔다. 노미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머리에 바르는 머릿기름에서는 특유의 강한 향기가 있어서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외출하실 때는 꼭 챙겨 바르시는 것이라 특이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향기는 달랐다. 아버지가 쓰는 머릿기름이랑 진화가 쓰는 머릿기름은 사실 거의 같은 제품일 텐데 진화의 머릿기름에서 나는 향기는 뭔가 달랐다. 그것은 어쩌면 노미 만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희미한 향기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노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이 벌벌 떨렸다. 눈앞이 노래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향기가 자기 등 뒤에 와서 선 것이 느껴졌다. 전에 그 샘터에서처럼, 그때는 낯설었던 포마드 향기가, 이제는 너무 잘 아는 그 향기가 노미의 뒤에서 풍겨왔다.

 

 “에헴!”

 

 하고 그때처럼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노미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늘은 와 다 조사(부셔)놓습니꺼?”

 

 깜짝 놀라 아래를 보니 노미가 호미로 잡초가 아니라 흙 속에 묻혀있던 어린 마늘을 다 부셔놓고 있었다. 이런 걸 경상도 말로 ‘조사뿌렸다. 조사놨다.’고 한다.

 

 “에그머니!”

 

 하면서 노미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화가 큭큭 웃으며 얼른 다가와 노미를 일으켜 세웠다. 노미는 부끄럽고 민망해서 도저히 고개를 들고 진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노미는 정말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런 노미의 얼굴을 진화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화는 이번에는 한복이 아니라 샘터에서 만났을 때 입었던 목을 여미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밭일을 하느라 노미의 볼에는 흙이 묻어있었지만, 진화는 그런 노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노미는 자기를 붙잡고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진화가 궁금해져서 간신히 실눈을 뜨고 진화의 얼굴을 보았다. 왠지 더 핼쑥해진 것 같은 진화가 그때의 그 양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서방님이 왔는데 얼굴에 흙은 묻히고, 마늘은 다 조사 놓고, 이런 색시를 우예 데꼬 가겠노?”

 

 하며 진화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노미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진화는 노미의 볼에 묻은 흙을, 막 쏟아지려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노미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노미는 밤이 아닌 대낮에 그렇게 진화의 품에 안기기는 처음이었다. 진화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화도 노미를 이렇게 와락 안게 될 줄 몰랐다.

 

 다시 얼굴을 보면 어쩌지, 어쩌나, 무슨 말을 하나, 나를 무슨 표정으로 볼까, 어디 있으려나, 나를 반기려나, 웃어주려나, 하며 진화는 그 먼 길을 한달음에 왔다. 그리고 집 근처까지 오자 심장은 방망이질을 쳤다. 신기하게도 멀리서 마늘밭이 눈에 들어왔고 쭈그리고 앉아 마늘을 캐고 있는 노미의 모습이 보였다.

 

 ‘잘 있으라 했더니 온종일 일거리 찾아다니느라 바빴겠구나.’

 

 하며 진화는 노미에게 다가갔다. 몰래 다가가 놀래줄 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노미는 자기가 온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발밑에 마늘을 호미로 다 조사놓고(부셔놓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눈치였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했다.

 

 진화는 그렇게 노미를 품에 안고 있었다. 향수를 뿌리지도 않았고, 머릿기름을 바르지도 않았지만 노미의 목덜미에서는 향긋한 풀냄새, 마늘 냄새, 흙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진화를 온통 정신없게 만들었던 달콤한 살 내음도 풍겼다. 마음 같아서는 목에 볼에 입술에 마구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온전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진화는 노미를, 자기 색시를 데리러 왔다.

 
작가의 말
 

 할머니에게 이 장면을 참 자주 들었는데요. 들을 때마다 부러웠습니다. 참.... 부럽네요. 여러분도 그렇게 누군가 품에 가득 안고 싶은 이가 있으시면 망설이지 말고 꼭 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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