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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19화 단심가
작성일 : 20-09-29 06:08     조회 : 32     추천 : 0     분량 : 7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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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화 단심가

 

 

 진화와 노미는 산밭 초가집에서 며칠을 더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산밭에 다녀온 후 노미는 도련님들과 더 친해진 것 같았다. 도련님들은 스스럼없이 노미에게 매달리고, 노미도 도련님들 얼굴을 자주 어루만져 주었다.

 

 

 노미가 시집 와 처음으로 진화와 친정 나들이를 가는 날이 되었다. 이것을 신행이라 하는데 이번 신행길에 도련님들도 다 따라나섰다. 원래는 신랑 신부만 가는 신행길이지만 노미는 친정에 있는 가족들에게 도련님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석이랑 미순이까지 데리고 가기로 했다. 다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떡이랑 과일이랑 선물할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서 다 같이 노미네 집으로 향했다.

 

  우르르 몰려들어 온 대 부대의 방문에 노미 아버지, 어머니, 준이 모두 놀랐지만, 누이를 알아보고 뛰어가는 준이와 노미의 재회는 사뭇 감동적이었다. 준이가 진화를 반기며 매달리자 진화는 준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도련님들은 귀여운 막내 동생의 등장에 모두 서로 안아보겠다고 난리들이었다. 특히 정화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내와 막내의 만남이었다.

 

 안방으로 가 아버지 어머니께 큰절을 올려 인사를 한 진화와 노미는 동생들을 어른들께 소개했다.

 

 “제 동생들입니다. 자, 다 인사드리거라.”

 

 하자 여섯 명의 도련님과 미순이 어른들께 큰절을 올렸다. 일일이 통성명을 마친 후 눈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도련님들을 보며 노미 어머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 저번에도 집에 가가 한 번 도련님들을 뵙기는 했지만, 세상에! 이래 인물들이 다 훤하시고, 참말로 어무이께서 복이 많으십니더.”

 

 했다. 이제 양쪽 동생들이 서로 인사 할 차례였다. 아홉 살 준이와 여섯 도련님들이 서로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준이는 제법 의젓하게 도련님들과 맞절을 했다. 맞절이 끝나자 도련님들은 준이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와!’하고 환호를 질렀다. 생각지 못한 환호에 준이가 순간 기가 질리긴 했지만 갑자기 우르르 생긴 잘난 형들이 싫지 않았다.

 

 가져온 음식들과 노미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들로 점심 잔치를 하고 막내들과 준이는 마당에서 자치기를 하며 놀고 형들은 노미 아버지와 둘러앉아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었다. 노미 어머니와 노미, 미순이는 여자들끼리 모여앉아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남화의 눈에 마루 중앙에 걸려 있는 ‘단심가’를 쓴 족자가 보였다. 눈에 익은 큰형의 글씨체라 남화는 단번에 진화가 쓴 글씨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것은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심가> 지라? 진화형 글씨체인디?”

 

 하고 석이가 알아보았다.

 

 곁에 앉아 있던 진화가 쑥스러워했다. 그러자 장인어른이 자랑스럽게

 

 “하하! 알아보겠는가. 내 이렇게 마루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늘 마음에 새기고 있네. 어디 동생들이 한번 읊어주고 뜻도 풀이해 주겠는가?”

 

 하고 노미 아버지가 권하셨다.

 

 “丹心歌 단심가.”

 

 윤화가 입을 떼었다.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

 

 하고 윤화가 한자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남화가 뜻을 풀어 말했다. 마루를 울리는 두 도련님의 목소리에 안방에서 어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던 노미도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우면서도 맑은 음색의 윤화의 목소리와 낮으면서도 진중한 남화의 목소리는 어떤 노랫소리보다도 마음을 울렸다.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경사료”

 

  윤화가 그 다음 줄을 이어 읊었다.

 

 “일백 번을 고쳐 죽더라도”

 

 뜻을 풀어 읽는 남화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백골이 진흙이 되어...”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넋이 있고 없더라도...”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여기서 주를 님이라 풀었습니다. 사모하는 여인이나 님을 말하고 있는 듯하나, 실은 마음에 품으신 뜻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고 남화가 부연설명을 했다.

 

 “허허, 야가 서당 아이들 훈장이라 이래 좀 말이 많습니더. 이해하이소.”

 

 하고 진화가 부끄러운지 말을 보탰다.

 

 “아닐세, 듣기 좋네. 어여 계속 하시게.”

 

 하며 장인어른은 사뭇 진지하시다.

 

 “寧有改理也歟 녕유개리야여”

 

 윤화의 담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히 바뀔 수가 있겠는가.”

 

 남화의 목소리가 마루에 조용히 여운을 남겼다. 감동한 장인어른은 진화와 동생들을 둘러보셨다.

 

 “내 항상 그 높으신 뜻을 사모하기는 하나 깊은 의미를 다 알 수가 없었네. 어디, 그 뜻을 좀 더 들려주겠는가.”

 

 진화는 남화를 바라보았다. 네가 계속 말을 하라는 의미였다.

 

 “이 시는....”

 

 남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하여가’를 보낸 것에 대해 포은 정몽주 공께서 보내신 답시이옵니다. 이방원의 ‘하여가’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시입니다. 당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 조선을 일으키려 했던 이성계와 그 사람들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학자이고 조정 대신이었던 포은 공을 자기 사람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포은 공께서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남화는 잠시 숨을 고르며 듣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대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진화와 윤화 형님, ‘멋지네.’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석이, 언제 왔는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는 동생들이 보였다. 빙그레 웃으며 건너다보고 있는 노미와 눈이 마주치자 남화는 좀 쑥스러웠다.

 

 “왜 뜻을 같이하지 않으셨는가? 이미 그 운을 다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우면 새 나라에서 그 좋으신 뜻을 펼치기가 훨씬 좋으셨을 텐데 말일세.”

 

 장인어른은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다. 남화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반듯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폭력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두 ‘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려의 운이 다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칼로 무엇을 얻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포은 정몽주님은 칼이 아니라 뜻으로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싶으셨습니다. 어려워도 그것이 옳은 길이라 믿으셨습니다.”

 

 잠시 좌중은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동생들도 말로만 듣던 조상님의 뜻을 이렇게 밝게 듣는 것은 처음인 듯했다.

 

 “허허, 그 귀한 뜻을 지금 내가 그 후손님들께 직접 들으니 감격스럽기 그지 없네. 우리 사위만 인물이 빼어난 줄 알았더니, 동생들 모두 참으로 인물들이로세.”

 

 하며 장인어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화는 눈으로 남화에게 ‘잘했다.’ 하는 뜻을 전했다. 빙긋 웃는 윤화도 그런 남화가 자랑스럽다. 남화는 오랜만에 조상님의 뜻이 어떠하셨을지 마음에 새겨보았다.

 

 

 오백 년 전 그에게,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몽주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세워진 나라 조선은 아름답고 강했다. 그런데 지금 그 나라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는 말 그대로 미처 경계하지 못했던 일본의 칼 앞에, 총 앞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리고 나라를 잃은 백성의 처참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과연 빛이 오려는가, 이 땅에 다시 제대로 된 나라가 설 수 있을지 없을지 앞은 캄캄하기만 했다. 장인어른과 진화 윤화 남화, 그리고 석이는 이런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나누었다.

 

 

 그렇게 정겨운 시간을 보낸 후, 두 가족은 서로 자주 왕래하자 약속하며 좋은 일, 궂은일 모두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해 떨어지기 전 집으로 돌아가고 노미와 진화는 풍습대로 또 한 사나흘을 더 친정에서 머물기로 했다. 준이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는 누나인 노미보다 매형인 진화를 더 따라다녔다. 이렇게 전혀 남남이었던 두 집이 가족이 되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아니라 늦은 오후의 산길은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산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제법 걷기 좋았다. 일전에 노미와 진화가 가마와 말을 먼저 보내놓고 걷던 길이기도 했다. 다들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온 터라 우리 꽃도련님들은 덩실덩실 신이 났다.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고, 고운 옷을 입고 좋은 길을 걷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미순이도 오랜만에 고운 빛깔의 한복을 입고 외출을 해서 기분이 한껏 날아올랐다. 미순이 좋아하는 나비들이 산길에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워매, 노랑나비네~!”

 

 하며 미순이 예쁜 노랑나비를 발견하고는 뛰어갔다. 꽃잎 위에 앉아 있는 나비가 너무 이뻐서 미순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쁘나? 잡아줄까?”

 

 하고 윤화가 물었다.

 

 “뭣할라고라. 이 고분 것을 잡어다 어디 쓴다고, 이것도 살아있는 생명인디, 이쁘다고 막 잡아불믄 안돼지라.”

 

 하며 짐짓 엄하게 야단을 친다. 윤화는 그런 미순이 귀엽다.

 

 “니는 몬생겨가 아무도 안 잡아간다. 걱정마라.”

 

 하고 윤화는 미순이를 괜히 놀린다. 하여튼, 남자들은 왜 이 모양들일까. 이쁘면 이쁘다고 하면 되지 꼭 반대로 말을 해서 여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지도 몬생긴거 알어라. 긍께 너무 그라지 마쑈잉~!”

 

 하며 미순이 진심 토라져서 앞으로 휙휙 걸어가 버렸다. 윤화는 아차 싶었지만, 이번에는 미순이 진짜 단단히 골이 났다. 잔뜩 부어있는 미순이 얼굴을 보고 앞서가던 석이가

 

 “왜? 왜! 니는 또 왜 그라냐?”

 

 하며 짐짓 쫓아가는데도 미순이는 오라버니 팔을 획 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앞서간다. 석이가 윤화를 돌아보니 윤화 표정이 미안 난감 민망하다.

 

 “왜? 또 사랑싸움 했냐?”

 

 하고 석이가 말하자, 태화가 손뼉을 치며

 

 “와! 싸랑싸움!”

 

 하며 놀린다. 실은 놀린 게 아니라 그냥 한 말이다. 민화가 태화 옆구리를 퍽 친다.

 

 “아야!”

 

 하며 앞서 걷던 미순이 갑자기 발을 잡고 주저앉았다. 조심하지 않고 걷다가 돌부리에 발을 찍은 것이다. 석이가 놀라 달려갔다.

 

 “발을 지쪘냐?”

 

 미순은 어느새 눈물이 대롱 맺혀 고개만 끄덕였다.

 

 “그라게, 조심허지!”

 

 하며 석이가 미순이 발을 살폈다. 미순이는 아픈지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다들 다가와 어떤가 둘러보고 섰다. 미순이는 영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걷겄냐? 업어줄까잉?”

 

 하는데 미순이는 단호하게

 

 “됐어라!”

 

 한다. 그리고는 조금 멀찍이 서 있는 윤화를 한 번 더 째려보고는 씩씩거리며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발이 불편한지 절뚝거렸다. 석이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미순이 앞에 가서 등을 대었다.

 

 “업혀라!”

 

 미순이 머뭇거리자,

 

 “아, 업히랑께!”

 

 한다. 오빠는 오빠다. 그랬다. 오빠란 이런 것인 모양이다. 이래저래 구박하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고, 온갖 심부름을 시키며 부려먹기도 하지만 동생이 다리가 아파 걷기 힘들 때 달려와 업어주는 사람. 우리 오라버니들. 그것이 우리 오빠들이다.

 

 미순이는 못 이기는체하고 석이 등에 업혔다. 석이는

 

 “워매, 뭐가 이래 무겁냐잉!”

 

 하면서도 미순이를 업고 걸었다. 민화는 달려가 미순이 꽃신을 들어주었다. 윤화는 내내 미안해서 주춤주춤 뒤를 따라갔다. 태화랑 정화는 그냥 신이 나서 덩실덩실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잡기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남화는 그저 그 모든 광경이 아름다워 따라 걸었다.

 

 석이가 슬슬 기운이 달리기 시작했다. 업혀있던 미순이는 고단했는지 얼핏 잠까지 들었다.

 

 “이제 내 업을께.”

 

 하며 윤화가 다가왔다. 석이가 윤화를 한번 쓱 보더니,

 

 “솔찬이 무겁소잉.”

 

 한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산밭에 다녀온 후 석이는 이제 미순이를 윤화에게 보낼 때가 되었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잠결에 업은 사람이 바뀌었는데 미순이는 누군지도 모르고 업혔다. 동생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을 보았다. 미순이라서가 아니라 윤화가 누구를 업고 가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놀리고 싶은 표정의 태화와 정화를 민화가 눈으로 말렸다. 하지만 자꾸 실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남화가 지나가면서 뒤통수들을 한 대씩 쳤다.

 

 잠결에 미순이는 자기가 윤화 등에 업힌 걸 알았다. 속으로는 너무 놀랐지만, 갑자기 내려달라고 하기도 그랬다. 그저 짐짓 자는 척하고 윤화 등에 업혀있었다. 미순이는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어디까지 업고 갔을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다. 아까 안 잡고 놓아준 노랑나비가 두 사람 곁을 날아다녔다.

 

 

 

 세상이 너무 변해서 너무 바쁘게 변해서 우리는 뭔가를 잃었다. 잊었다. 하루종일 영어단어 외우고, 수학 문제 풀고, 시험공부 하느라, 그리고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사느라, 교육비 양육비가 너무 비싸서 형제자매는 엄두도 못 내고 하나 겨우 낳고 산다. 그나마도 안돼서 아예 아이 없이 살거나, 아예 결혼을 안 하거나 한다. 양육비 교육비 생활비가 너무 비싸서....

 

 그래서 우리는 아플 때 업어주던 오라버니 등을 잃었고, 같이 공기놀이, 숨바꼭질, 자치기, 사방치기, 고무줄놀이, 말타기하던 동무들을 잃었고, 나비를 잡아주겠다던 짝사랑 오빠를 잃었고, 자장가를 불러 재우던 어린 동생을 잃었다. 양육비 교육비 생활비가 너무 비싸서, 그 많은 돈을 벌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영어단어, 수학문제, 시험공부를 하루 종일 해야 해서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 바쁜 틈틈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서 해보면 어떨까. 오빠들은 가끔 동생 업어주고, 동생들은 가끔 오빠 라면 끓여주고, 친구들은 가끔 핸드폰 게임 대신 공기놀이, 사방치기, 숨바꼭질 같은 거 해보고, 숙제해야 하니까 귀찮게 하지 말라고 동생 쫓아내는 대신 한 번쯤 자장가 불러주며 재워주기도 해보고, 우리 좀 바빠도 그런 거 해보고 살면 좋지 않을까.

 

 

 그해 여름은 참 더웠다. 여름이면 바닷가 동네 아이들은 밤에 해변에 나가 모래 짐찔을 했다. 별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해변, 밤바다는 참 아름다웠다. 별처럼 빛나던 아이들은, 별보다 더 빛나던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로 모래를 덮어주며 가을, 겨울을 건강하게 지내기를 빌어주었다.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옥수수, 감자를 구워 먹었다. 얼굴에 검댕이 묻어도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리랑을 이어 불렀다. 밤바다에 뛰어들어 얼굴을 씻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아이들이 별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별들이 별 같은 아이들을, 별보다 빛나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이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고, 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결국 우리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그저 그 바닷가 마을에 태어난 이유로 겪게 될 일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로 겪는 일들, 우리는 그 일들을 얼마나 감사할 수 있을까.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그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당신께 얘기해 주고 싶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 절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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