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별이 빛나는 밤
오랜만에 실컷 몸을 단련하고 땀범벅에 흙투성이가 된 남자들은 모두 계곡으로 씻으러 달려가고 노미와 미순이는 늦은 아침을 준비하러 집으로 향했다.
“세상에, 우리 도련님들 어찌 저리 멋지십니꺼?”
하며 노미는 좀처럼 감동이 가라앉지 않아 혀를 내둘렀다. 미순이도 오랜만에 보는 오라버니들 택견하는 모습에 사뭇 감회가 새로웠다.
“이참에 언니도 배우시어라.”
하며 미순은 노미에게 ‘이크, 에크’ 하며 발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노미는 부끄러우면서도 미순이 발동작을 제법 비슷하게 따라 했다. 두 소녀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까르르 웃었다.
세상은 이미 일곱 소년들과 두 소녀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아무리 환하게 빛나도 그 어둠을 다 이길 수 없었다. 몰려들기 시작하는 어두움을 밝히기엔 소년들은, 소녀들은 아직 너무 어리고 약했다. 하지만 저 아래 세상과 달리 이곳에서는, 이 숨겨진 곳에서는 그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웃을 수 있었고, 빛날 수 있었고, 세상 그 어떤 이들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렇게 하루를 더 지내고 이제 산에서 내려갈 채비들을 했다. 이곳으로 올 때 해도 뜨기 전에 출발했던 것처럼 돌아갈 때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을 때 출발해야 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밤중에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다들 짐을 꾸리느라 바쁜데 진화가 노미를 가만히 잡아끌었다.
“우리는 며칠 더 있을 거요.”
하고 진화가 노미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와예?”
하고 노미가 영문을 몰라 물으니, 진화는 답답하다는 듯 노미를 째려보았다. 그때까지도 노미는 왜 진화가 며칠 더 있어야 한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려갈 채비를 마친 동생들이 다들 등에, 손에 짐들을 지고 들고 섰는데 진화는 그런 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래, 욕봐라. 조심해서 내리가고.”
한다. 깜짝 놀란 정화가
“큰형은? 큰형은 안가나?”
한다. 하지만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윤화는 피식 웃으며 서 있고, 남화는 진화와 노미에게 넙죽 고개를 숙이며,
“그럼, 형님, 형수님 조심히 있다 오시소.”
한다. 영문을 모르기는 태화와 민화도 마찬가지다.
“형은 형수랑 더 있다 오나?”
하고 태화도 정화만큼이나 어리둥절해서 묻는다. 그런데 민화는 뭔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그래, 형은 형수랑 쪼매 더 있다 오시라 해라.”
한다. 그러자 정화가
“그럼, 나도 형이랑 더 있을란다.”
한다. 아! 우리 막내를 어쩌면 좋을까.
“정화야? 우리는 내리가자.”
하며 한 살 밖에 안 많은 형인 민화가 다정하게 정화를 달랬다.
“내도 있으믄 안돼나?”
하고 정화는 볼이 부어서 한 번 더 졸라본다.
“안된다. 안 되는 거 알제?”
하며 태화가 목소리는 다정하게 눈은 안 다정하게 뜨고서 정화를 잡아끌었다. 정화도 이제는 대충 왜 안 되는지 알 것 같다.
“알았다! 큰형이 형수랑 둘만 있고 싶어가 그라는 거 아이가! 이젠 나도 안다!”
다들 영영 못 볼 사람들처럼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고 아쉬워서 떠나는 동생들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보내는 노미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모두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며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래, 인사들 좀 작작하고 그만들 쫌 가라!”
하며 진화가 동생들을 서둘러 보냈다. 동생들이 멀리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배웅하며 서 있던 진화는 동생들이 완전히 안 보이게 되자 노미의 손을 당겨 잡으며 지그시 자기 아내를 바라보았다. 노미는 서방님 눈도 맞추지 못한 채 얼굴이 빨개졌다.
북적거리던 집에 단둘만 남으니 노미는 왠지 쓸쓸하고 횅한 기분이 드는데 진화는 뭐가 신이 나는지 발걸음도 가볍게 아궁이에 나무를 더 넣으며 물 끓일 준비를 한다. 저녁을 막 먹은 후라 노미는 진화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은 와 끓입니꺼?”
하고 노미가 묻자 진화는
“색시 더운물에 목간시켜 줄라고.”
한다. 노미는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목간은... 무슨!”
하는데,
“기다려 보소. 내 온천에는 몬 데리고 가도 더운물에 꼭 담가주고 싶었으니.”
하며 진화도 자기 하는 짓이 쑥스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진화는 산밭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렇게 노미와 단둘이 지낼 계획이었다. 노미가 워낙에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하는 사람이라 시집살이가 낯설고 고되었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는 걸 보면서 진화는 마음 한구석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다행히 동생들이 형수를 많이 좋아해서 아내가 외롭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친정에서는 형제라고는 남동생과 단둘인 단출한 식구 사이에 살다가 갑자기 말 만한 장정들 사이에서 지내려니 실은 노미가 남모르게 불편하고 애먹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생들 눈치, 부모님 눈치 보느라 진화는 자기 색시 손도 잘 잡아줄 수가 없었고, 눈 맞추고 얘기할 시간조차 없었다.
실은 다 핑계고, 노미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진화는 자기 색시를 맘껏 안아줄 수 없어서 애가 탔다. 그런 서방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는 노미는 그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멀찍이 서서 다가오지를 않았다. 마루에 걸터앉은 진화가 노미를 불렀다.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에 걸려 산이 온통 불붙은 듯 노을에 휩싸여 있었다.
“이리 좀 오라니까요.”
하고 진화가 재차 부르자 노미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옆에 앉았다. 노미는 진화와 단둘이 있게 된 것이 좋으면서도 부끄럽고 어색했다.
“이리 앉으시오.”
하고 진화가 자기 무릎을 툭툭 쳤다.
“아이고 마, 됐심더.”
하며 노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양했다.
“어허! 이리 앉으라니까.”
하며 진화는 노미를 결국 자기 무릎 위에다 앉혔다. 노미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팔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엉덩이만 서방님 무릎 위에 겨우 걸치고 앉아있는데,
“나를 좀 안으시오.”
하고 진화가 제법 명령조로 말했다.
“예?”
“어허! 서방님이 안으시오 하면 색시는 안는 거요.”
한다. 어쩔 수 없이 노미가 어색하게 대충 진화의 목 뒤로 팔을 걸고 안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진화는 노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가만히 노미의 가슴에 얼굴을 대었다. 눈까지 지그시 감고 노미의 가슴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미는 순간
‘서방님이 나를 이래 안고 싶어 했구나. 이렇게 서로 살을 대고 있는 것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는 조금 반성이 되었다. 자기도 시집살이 하는데 적응하느라 집안일 한다고 정신없었고, 시부모님 챙겨드리고, 도련님들 챙겨드리고 하느라 바빠서 사실 자기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인 진화를 미처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스레 노미는 진화에게 미안해졌다. 이제야 섭섭했을 서방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그것이 또 미안해서 노미는 가만히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에 안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젊은 부부는 이 순간 서로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운우의 정을 나눈 후에, 진화는 마당 한쪽에 두었던 나무욕조를 끌어다 더운물을 담았다. 찬물과 섞어 온도를 맞추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 나오시오.”
하고 진화가 노미를 불렀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미는 얇은 속치마 하나만을 걸치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새색시 실눈 같은 초승달만 고고히 떠 있는 한 밤, 천지사방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작은 초가에 이렇게 두 사람만 있었다. 일렁이는 아궁이 불에 비친 진화는 벗은 몸으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서방님 벗은 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노미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얇은 속치마 하나만을 걸친 채 달빛 아래 서 있는 노미의 모습에 진화는 숨이 멎는 듯 했다. 노미는 천천히 다가와 물속으로 발을 담갔다. 그 모든 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가 자기 품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노미는 가만히 진화의 품속으로 등을 대고 기대어 앉았다. 따듯한 물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좋나?”
하고 진화가 물었다.
“야.”
하고 노미가 부끄러움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서방님이 최고재?”
하며 진화는 물을 손으로 떠서 노미의 어깨에 뿌려주었다.
“야. 최곱니더.”
하고 노미가 대답했다.
“세상에 색시 목간시켜주는 서방님 얘기는 몬 들어봤재?”
한다. 노미는
“야, 몬 들어봤습니더.”
한다. 그렇게 둘은 쿡쿡 웃으며 따듯한 물속에서 가만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노미는 어느새 부끄러움도 잊고 따듯한 물속이, 따듯한 서방님 품속이 참말로 좋았다. 하늘에는 손으로 그린 듯한 초승달이 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이 밤하늘 가득 떠 있었다. 노미는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것은 평생 처음이지 싶었다.
“세상에! 별이 참말로 많네예.”
진화도 노미를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고, 예뻐라! 이래 많은 별은 생전 처음 보는 것 같네예. 별이 저래 많은데, 저래 높은데, 내는 이래 작고, 또 작아가 별은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까예?”
하며 노미는 괜스레 빛나는 별 앞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진화가 가만히 노미 귀에 속삭였다.
“와, 니만 별을 본다고 생각하노? 별이 니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별 입장에서는 니가 별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하며 노미를 가만히 꼭 끌어안았다. 노미는 진화의 말에 사뭇 감동했다. 진화는 언제나 새삼스럽게 감동하게 하고 또 감동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불편한 건 없나?”
하고 진화가 다정하게 물었다.
“너~무 좋습니더.”
“집에서 말이다. 집에서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없나?”
“불편하기는요. 지가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는지 도련님들도 다 이쁘시고, 미순이도 이쁘고, 아버지 어머니도 참말로 귀하게 대해 주시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고양이, 황소까지 참말로 다 이쁩니더.”
하며 노미가 웃었다. 그러자 진화는 짐짓 삐진 목소리로
“내는, 내는 안 이쁘나?”
한다. 노미는 속으로 좀 곯려줄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노미는 고개를 돌려 진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노미가 그렇게 진화의 눈을 똑바로 강렬하게 깊이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지는 서방님이 젤로 이쁩니더.”
하며 노미는 진화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가만히 훔쳤다. 처음이었다. 노미가 먼저 진화의 입술을 훔친 것은, 노미가 먼저 자기 마음을 그렇게 말갛게 보여준 것은, 그 순간이 처음이었다. 진화는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이제 노미는 부끄러움도 잊고, 민망함도 잊고, 진화의 입술을 훔치고 또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