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16화 산밭 아리랑
작성일 : 20-09-29 06:04     조회 : 37     추천 : 0     분량 : 828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제16화 산밭 아리랑

 

 달콤한 낮잠에서 제일 먼저 깬 이는 미순이었다. 미순이는 노미가 깨기 전에 저녁밥을 지어놓을 생각이었다. 여름이라 방에 붙은 아궁이 대신 마당에 만들어 놓은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미리 씻어둔 보리와 쌀을 섞어 가마솥에 안쳤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미순이 불붙은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앉는다. 석이다.

 

 “다 잤냐?”

 

 “야.”

 

 “좋으냐?”

 

 “뭐시?”

 

 “여 같이 옹께.”

 

 “응.”

 

 그리고 두 오누이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한동안 불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니는 윤화 형님이 왜 좋으냐?”

 

 하고 석이가 묻자 미순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그냥 좋은 게 워딨냐? 좋은디가 있응께 좋아하는 거제.”

 

 “그냥 다 좋아라.”

 

 “허참, 맴이라는 게 이러다 저러다 하느거인디, 니맘을 니가 우찌 아냐?”

 

 “나는 안 변해라. 안 변할 거 같어라.”

 

 미순이의 당찬 선언에 석이는 잠시 당황했다.

 

 “음..., 윤화 오라버니는 맘이 바른 사람이여라. 오라버니들이 다 마음이 바르지만 윤화 오라버니는 특히 더 바른 사람이여라.”

 

 석이는 괜스레 나오는 콧물을 훌쩍였다.

 

 “오라버니는 나가 시집가는 것이 많이 섭섭하당가?”

 

 “섭섭허기는.... 바로 옆집으로 가는디. 세상이 어수선허니 빨리 시집가는 것이 맞는 거 같기도 허고, 아직은 영 언네(아기) 같아서 거시기하기도 허고....”

 

 “치~!”

 

 하며 미순이는 석이를 어깨로 툭 친다. 멋쩍게 웃는 석이다. 미순이 오빠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린 나이에 집안 가장이 되어버린 석이에게 미순은 귀하고 귀한 하나뿐인 동생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시집보내는 오빠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괜스레 섭섭하고 아깝고 그런 것이다. 미순은 그런 오빠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둘의 이런 대화를 윤화는 방 안쪽에 기대어 앉아 멀찍이서 들었다.

 

 잠시 후, 노미가 부스스 일어나고 진화도 눈을 떴다. 노미는 혼자 밥을 하고 있는 미순이에게 달려갔고, 다들 주춤주춤 일어났다. 진화는 동생들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했다. 아까 물에 넣어둔 통발도 보러 가야 했다. 해가 곧 떨어질 시간이라 서둘러야 했다. 밥을 대충 다 지은 여자들도 남자들 물고기 잡는 데 따라나섰다.

 

 

 진화와 윤화는 낚시대를 드리우고 물가에 앉았고, 다른 동생들은 어망을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태화랑 민화랑 정화가 물고기를 몰아오고 남화와 석이가 어망을 들었다. 손발 척척 맞는 도련님들은 잠깐 사이에 제법 작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았다. 하지만 낚시대 팀은 영 소식이 없다. 진화는 큰놈을 잡아 구워 먹자 하고 있는데 영 입질이 없어 답답했다. 윤화는 원래 답답한 게 없는 사람이라 낚시대는 그냥 시늉으로만 걸어놓고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태화가

 

 “와! 와! 물고기! 물고기! 붕어다! 붕어!”

 

 하며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쫓았다. 손으로 잡을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헛손질하며 태화는 홀딱 젖었다. 민화는 손으로 못 잡는다며 말렸지만, 태화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러다 정화가 ‘어디? 어디?’ 하며 쫓는다. 그리고는 그냥 덥석 손을 넣었다 들어 올렸는데 정화 손에 그 붕어가 쥐어져 있다. 엉겁결에 손으로 붕어를 잡고는 정화는 좋아라 소리치고 아쉽게 놓치기는 했지만 노리던 놈을 잡아 태화도 신이 났다.

 

 그렇게 도련님들은 어망은 집어 던진 채 손으로 물고기를 잡겠다고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차례 물놀이들을 실컷 하고는 손으로 잡은 붕어 세 마리랑 어망이랑 통발로 잡은 제법 많은 물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 붕어 세 마리는 기름에 굽고 작은 물고기들은 몽땅 매운탕거리가 되었다. 오늘의 매운탕 요리사는 진화다. 다들 진화가 끓이는 매운탕을 목이 빠져라 기대하고 있었다. 노미도 워낙 칭찬이 자자한 진화의 매운탕이 매우 궁금했다. 팔을 걷어붙이고 매운탕을 끓이는 서방님을 보며 노미는 이 사람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요리하는 남자가 멋있다는 걸 노미는 그 시절에 벌써 알았던 모양이다.

 

 진화의 매운탕은 정말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노미도 지금까지 이렇게 맛있는 매운탕은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서방님이 끓여주신 것이니 더 맛있었나 보다. 다들 맛있게 먹으니 진화도 흐뭇했다.

 

 산밭 초가집 마당에는 넓은 평상이 있어서 다 들 거기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여기저기 모깃불을 피워놓아 주변은 환했다. 후식으로 참외를 깎아놓고 먹고 있는데

 

 “근데, 아까 내보고 자꾸 니는 모른다는 게 뭔데? 형수는 아는데 내는 뭘 모르는데?”

 

 하고 궁금한 게 생기면 결단코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정화가 말문을 열었다. 다들 말문이 막혀 ‘뜨악’하고 있는데 노미가

 

 “뭐가 궁금한데예?”

 

 한다. 누군가 궁금해하면 결단코 가르쳐 줘야 직성이 풀리는 노미가 나선 것이다. 다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노미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들이 아까부터 형수는 아는데 니는 모른다 하면서 자꾸 무시하고, 안 갈쳐 줍니더.”

 

 정화는 단단히 뿔이 나서 노미에게 일렀다. 노미도 과연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싶었다. 하지만 호기롭게 일어났다.

 

 “도련님, 도련님들, 잘 들으시소. 여자랑 남자는 생긴 것도 다르지만 속마음도 많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다릅니더. 왜냐하면 아무래도 상황이 다르다 보이 남자들이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여자들한테는 크게 힘든 거이 될 수도 있고, 많이 섭섭한 게 될 수도 있고, 그랍니더.”

 

 남자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미의 말에 집중했다.

 

 “남자도 사람이지만 여자도 사람입니더. 맞지예?”

 

 “맞습니더!”

 

 모두 합창을 했다.

 

 “하지만 쪼매 다릅니더. 여자는 아무래도 남자보다 더 여리고 약하고 섬세합니더. 그래서 여자들은 막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고 하면 남자들보다 마음이 더 다칩니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미순이 매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막 놀래키고 놀리고 그라믄 됩니꺼 안됩니꺼?”

 

 “안 됩니더!”

 

 하고 또 합창을 한다. 손까지 들며 소리를 지르는 민화와 달리 태화랑 정화는 ‘왜 안 되는 데?’ 하는 눈치다.

 

 “여자를 막 이불에다 싸고 말고 그라믄 됩니꺼 안 됩니꺼?”

 

 하자 그제야 도련님들 얼굴이 푹 수그러들며

 

 “안 됩니더!”

 

 하고 소리친다.

 

 “싫다는데 막 손을 잡아 비틀고 꼬집고 손톱으로 찌르고 그라믄 됩니꺼 안 됩니꺼?”

 

 하자 다 같이 진화를 바라본다. 깜짝 놀란 진화가 제일 크게

 

 “안 됩니더! 그런데 가끔은 그래도 되지 않겠습니꺼? 색신데요.”

 

 한다. 도련님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뒤로 넘어간다. 노미는 진화를 밉게 한번 보고는

 

 “도련님들도 모두 장가 가가 여인들을 맞으실 텐데요.”

 

 남자들은 드디어 본론에 들어가는구나 싶어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몸으로 만나는 것보다 중한 것이 마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더. 남자들 중에 못된 사람들은 여자를 그저 몸으로만 취하려 하는데 우리 도련님들은 안 그러셨으믄 좋겠습니더. 여자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먼저입니더. 마음을 얻지 않고 몸을 취하는 것은 짐승이나 하는 짓입니더. 실은 짐승도 그렇게 안 합니더. 정화 도련님이 아직 모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더. 덥석 손부터 잡고 몸이나 탐하고 하는 것은 진짜 질 나쁜 인간들이나 하는 짓입니더. 귀한 여인을 만나거든 그 여인 마음을 얻으려고 하셔야 됩니더. 귀한 마음을 얻으려면 도련님들도 귀한 마음을 가지고 계셔야 합니더. 내 보이 우리 도련님들은 다 귀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더. 인물도 환하게 잘나셨지만, 마음이 더 환하게 잘 나셨으니 그 마음 변치 말고 가지고 계셨다가 소중한 여인을 만나거든 마음을 보여주시소. 그라믄 그다음은 알아서 다 됩니더. 정화 도련님 걱정할 필요 없습니더.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믄 진심을 얻습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다음은 알아서 되게 되어 있습니더.”

 

 생각도 못한 노미의 일장 연설에 도련님들은 모두 사뭇 감동한 눈치였다. 진화 또한 그런 노미를 다시 보았다.

 

 “미순이도 할 말 있나? 동상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믄 이참에 해봐라.”

 

 하고 노미가 자리를 미순에게 넘겼다. 쑥스러워할 줄 알았던 미순이 생각지 않게 냉큼 일어났다.

 

 “흠! 지도 할 말 많어라!”

 

 미순이 도련님들 앞에 섰다.

 

 “어릴 때부터 일곱이나 되는 오라버니들헌티 귀염도 받았지만 징허게 놀림도 받고 그랬지라이.”

 

 “저런!”

 

 하고 노미가 격하게 추임새를 넣었다.

 

 “정화!”

 

 미순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정화가 깜짝 놀랐다.

 

 “뒤에 숨어 있다 벼락이 떨어지게 놀래키고 와락 달려들고, 발 걸어 넘어뜨리고 그라믄 안되지라이!”

 

 정화는 얼굴이 벌게져서 형들 뒤로 숨고 형들은 ‘니 그랬나?’ 하며 두들겨 댔다.

 

 “태화 오라버니!”

 

 하고 미순이 태화를 호명하자, 정화를 두드리고 있던 태화가 깜짝 놀란다.

 

 “나?”

 

 “야! 오라버니! 내 곶감 뺏어 묵고, 전도 뺏어 묵고, 내 손에 쥐고만 있으믄 다 뺐어 묵고... 그라믄 되여라 안되여라?”

 

 “안 됩니더!”

 

 다 같이 합창을 하는데 정작 본인은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뒤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다들 태화를 두들겨 주었다.

 

 “민화 오라버니!”

 

 자기는 절대 걸릴 일 없을 줄 알고 실컷 태화를 두들겨 주던 민화가 멈칫한다.

 

 “나? 나도?”

 

 한다.

 

 “내만 보믄, 머리를 쥐고 흔들면서 니는 와 이리 몬생겼노, 눈도 쪼매나고 볼은 통통하고 와 이리 몬생겼노 했어라 안 했어라?”

 

 생각지 못한 폭로에 모두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대는데 민화만 얼굴이 하얗다.

 

 “내는 니 귀여버가 그랬지.”

 

 “니가 왜 형수님을 귀여버 하는데?”

 

 하고 남화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때는 형수 될 줄 몰랐다 아이가.”

 

 “워째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화 오라버니가, 특히 더! 민화 오라버니가 내한테 그라믄 안돼지라잉.”

 

 다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빵 터졌다.

 

 “남화 오라버니!”

 

 절대 자기 얘기는 안 나올 줄 알았던 남화가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는 나만 보믄 니 넓을 홍자 아나? 사람 인자 아나? 하믄서 갈켜줄라하고 그라는거...”

 

 남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라는거.... 고마워라.”

 

 다들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남화도 깜짝 놀라 미순을 본다.

 

 “뭐든 갈쳐줄라 하시는 거 고마분데.... 쪼매 과하여라.”

 

 그제야 모두 또 배를 잡고 웃는다. 노미도 눈물이 나게 웃고 있었다.

 

 “그라고, 오라버니!”

 

 이번에 가리킨 사람은 석이다.

 

 “뭐? 뭐?”

 

 하는데 미순이 눈을 지긋이 뜨며

 

 “오라버니는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다 몬 말하겄는 디, 딱 몇 가지만 말 할랑께 잘 들으시오잉.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발로 주 차믄서 계란 쪄와라, 옥수수 쪄와라, 세숫물 갖고 와라, 그라믄 되여라 안되여라? 지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맨날 나만 부려먹고 꼼짝을 안 하는디, 그거이 오라버니가 되서 할 일이 맞소이?”

 

 석이가 얼굴이 벌게졌다. 석이가 변명할 틈도 없이 여기저기서 주먹이 날아든다.

 

 “니 그래가, 미순이 시집 안 보낼라 했구나?”

 

 하고 진화가 놀리듯 말하자 윤화는 자기 속 얘기 해 준 형이 고맙다. 석이는 비실비실 웃으며

 

 “나가 잘못했당께. 미순아! 오빠가 잘못했다! 용서를 빈다!”

 

 하며 손을 싹싹 비빈다. 그다지 진심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순은 그래도 그런 오빠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그래도 우리 오라버니 장점이 저렇게 바로바로 잘못한 걸 아는 거지라이.”

 

 하며 한번 봐준다는 표정으로 혀를 날름하고 웃는다.

 

 “윤화 형이랑 진화 형은 안 하나?”

 

 하고 억울한 태화가 말했다.

 

 “윤화 오라버니는...”

 

 하며 미순은 잠시 윤화를 바라본다. 윤화는 이참에 할 말 있으면 해라 하는 표정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안 할라요.”

 

 모두 ‘에이’ 하며 실망한다.

 

 “그라고, 진화 오라버니는....”

 

 모두 침까지 삼키며 미순의 말을 기다렸다.

 

 “진화 오라버니는.... 고마버라.....”

 

 “항상 애껴주시고, 곱다고 해주시고, 다정하게 대해 주시고, 진짜 고마버라.”

 

 미순은 눈물까지 글썽한다. 진화는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있다가 그만 머쓱해져 버렸다.

 

 “자, 다 됐나? 그럼 다 같이 박수!”

 

 모두들 박수를 친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미순이 노래 한 자락 해라!”

 

 하고 진화가 거든다.

 

 “내 말고 우리 언니 노래하시오!”

 

 하며 미순은 자기 자리로 노미를 끌고 온다. 모두 ‘와!’하고 함성을 지르는 통에 노미는 거절할 틈도 없이 도련님들 앞에 다시 섰다.

 

 “노래... 못합니더...”

 

 하고 노미가 몸을 비틀고 있는데

 

 “아따, 형수님 목소리가 겁나 고와가 노래도 엄청 잘 하시겄는디라.”

 

 하며 미순이와 석이가 세차게 박수를 친다. 노미가 진화를 안타깝게 바라보자 진화는 짐짓 모른 체하며

 

 “불러보소. 내도 첨 듣는데.”

 

 하며 더 기대에 차 노미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다. 더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안 노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노래를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 그 고개 다 넘기 전에 오실라나.”

 

 밤하늘에 퍼지는 노미의 고운 목소리에 모두 순간 넋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우뢰와 같은 박수에 함성과 탄성이 터졌다.

 

 “아! 내가 가수 색시를 얻었구나! 가수 색시를 얻었어!”

 

 하며 진화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신 박수를 치며 자랑스러워 했다.

 

 

 우리 할머니 오노미님 노래 잘하시는 것은 나름 꽤 유명해서 할머니는 요즘 태어났으면 꼭 가수가 한 번 되어봤음 싶다고 하시곤 했다. 무슨 노래든 한 번 들으시면 잊지를 않으셔서 찬송가도 참 잘 부르시고, 가요들도 모르시는 노래가 없었다. 처녀 때는 동네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상도 타고 하셨단다.

 

 

 겨우 자기 순서를 끝낸 노미는 미순이를 잡아끌었다. 미순이도 빼지 않고 노미 섰던 자리에 새초롬하니 서더니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면서 ‘도라지’를 불렀다. 전라도 처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맑고 고왔다. 노래도 노래지만 춤 선이 어찌나 곱고 나풀나풀한지 한 마리 나비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에헤야, 데헤야.’ 하는 후렴구에서는 흥을 못 이긴 석이가 나와 같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춰주고 결국 정화랑 민화 태화까지 나와 미순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춰주었다. 미순이의 노래에도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련님들이 노래를 이어 불렀다. 시작은 정화가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정화가 아리랑을 신나는 박자로 바꾸어 부르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다리도 들썩들썩한다. 다들 입을 모아 정화가 노래를 제일 잘한다 하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이어서 태화가 부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노래할 줄 모르는 줄 알았던 태화 도련님 목소리가 어찌나 구성진지 노미는 듣고 깜짝 놀랐다. 신이 난 정화가 이번에는 다른 곡조의 아리랑을 이어 불렀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그러자 그 뒤를 민화가 이어 불렀다.

 

 “날 다려 가거라 날 다려 가거라 무정한 우리 님아 날 다려 가거라.”

 

 미순이 환호를 질렀다. 미순이 이야기로만 듣던 민화 도련님 목소리를 실제로 듣자 노미는 미순이 왜 민화 노랫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 같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남자가 어찌 저리 고운 소리로 노래하는가 싶었다. 도련님들이 모두 다 참말로 노래들을 잘해서 노미는 그만 나름 자신 있던 자기 노랫소리가 조금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하고 정화가 부르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하고 민화가 받았다. 그때 갑자기 진화가 불쑥 동생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노미는 깜짝 놀랐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보란 듯이 어깨춤을 추며 노래하는 진화 모습에 노미도 미순이도 눈물이 나게 까르르 웃었다. 노미는 속으로 ‘우리 서방님도 노래 참말 잘하시네.’ 하며 숨길 수 없는 마음이 담뿍 담긴 눈으로 진화를 바라보았다. 진화도 노미의 눈빛에 한껏 들떠서 부끄러운 것도 잊고 더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했다.

 

 어느새 일곱 도련님들이 다 나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하고, 앉아있던 노미와 미순이도 끌려 나와 함께 어깨춤을 추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흥겨운 노래패가 있을까,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있을까, 노미는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그날 들려준 도련님들의 노래를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그랬다. 우리는 그때 이렇게 살았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4 제23화 홍익인간 2020 / 9 / 29 37 0 8659   
23 제22화 쇠붙이 2020 / 9 / 29 37 0 7938   
22 제21화 복권이 2020 / 9 / 29 37 0 8229   
21 제20화 한글수업 2020 / 9 / 29 32 0 6928   
20 제19화 단심가 2020 / 9 / 29 34 0 7347   
19 제18화 별이 빛나는 밤 2020 / 9 / 29 32 0 5238   
18 제17화 매 호랑이 바람 늑대 2020 / 9 / 29 34 0 6593   
17 제16화 산밭 아리랑 2020 / 9 / 29 38 0 8289   
16 제15화 산밭 2020 / 9 / 29 33 0 6537   
15 제14화 윤화 2020 / 9 / 28 30 0 6567   
14 제13화 미순이 2020 / 9 / 25 32 0 6819   
13 제12화 달달한 시집살이 2020 / 9 / 25 32 0 7257   
12 제11화 시집 온 첫날 2020 / 9 / 25 42 0 7337   
11 제10화 새로운 가족 2020 / 9 / 24 39 0 5328   
10 제9화 여섯 명의 도련님 2020 / 9 / 24 39 0 6172   
9 제8화 시집가는 날 2020 / 9 / 24 37 0 5148   
8 제7화 마늘밭 2020 / 9 / 24 35 0 7482   
7 제6화 새끼손톱 2020 / 9 / 24 39 0 8351   
6 제5화 진화 2020 / 9 / 23 38 0 10001   
5 제4화 첫날 밤 2020 / 9 / 23 40 0 6129   
4 제3화 혼인 하는 날 2020 / 9 / 23 42 0 5538   
3 제2화 열아홉 노미 2020 / 9 / 23 46 0 6475   
2 제1화 열일곱 노미 2020 / 9 / 23 80 0 5689   
1 시작하기 전에 2020 / 9 / 23 347 0 1839   
 1  2  3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