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앱 (20회)
정후는 잠시 황당하기도 했던
헬조선 검법이란 말이 나오자
마음이 다시 갈팡질팡 했다.
(난 아영이랑 진지한 대화를
하러 온 건데 내가 바로 한다고
한 것처럼 나가는 이 분위기는 뭐지..)
물론 무공을 계속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온 건 맞긴 하다.
아이의 목숨을 살리고 나서
정후에게 무공은 더 간절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술 강사
비스무리한 사람이
갑자기 등장 할 줄은 몰랐다..
정후는 일단 내 입으로 하겠다고
확정을 지은 게 아닌데
그냥 가스 라이팅 당하기는
좀 그렇다고 생각했다.
너무 없어 보이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말이야.
아직 마음을 확실히 정한 게 아니라서..“
아영의 다정했던 목소리가 확 변했다.
“뭐라고?
그럼 무공앱은 왜 다시 썼어?“
“그건 너무 급한 상황이 생겨서..”
“그래 아이가 죽게 생겼으니 다급하게 썼겠지..”
아니 그걸 어떻게..
“내가 말했지.
무공앱을 쓸 땐 수퍼 컴퓨터가 다 알고 있다고..
여기선 화면으로 생중계 돼.
난 아이를 구하고 나서 희열에 찬
얼굴을 보고는 확신을 가졌는데..“
전에 아영이 무공앱으로 돈을 벌면 안 된다고
슈퍼컴퓨터가 다 감시하고 있다고는 말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후가 뭐라고 말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하나 생각 할 때
아영이 정후를 몰아 부쳤다.
“나 그래서 바로 칼 선생님한테 연락 한 거고
방금 고용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어.
여기서 안 한다고 하면 위약금 물어야 된단 말이야.
어떡해..“
아니 시간이 얼마 됐다고 그렇게까지 진행을..
정후가 저도 모르게 칼을 쳐다보자
칼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런 걸 두고 빼도 박도 못 한다고 하는 거구나..
정후가 기막힌 마음을 추스릴 틈도 없이
아영의 재촉검이 들어왔다.
“선생님 보내?
위약금 물어?“
정후의 판단 자체를 막아 버리는
아영의 가스라이팅 신공.
정후는 결국 내상을 입은 채 패배를 인정했다.
“할게.. 하면 되지 뭐..
해.. 그까이꺼 뭐.. 대충 그냥..“
정후가 자포한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뱉어 내자
아영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휴~ 큰 돈 날릴 뻔 했네..
아무튼 다행이고..
나는 경공까지는 가르쳐 줄 수 있는데
공격과 수비를 가르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공격은 칼 선생님이
수비는 또 다른 한 분이 오실거야.
일단 그렇게 알고..
칼 선생님 제자 인수해 가세요.
아주 기초가 튼튼한 제가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제가 아주 제대로 가르쳤거든요..“
칼은 아영의 말에 정후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내가 스승이네요.
그렇다구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당신과 나는 파트너.
무공 파트너일 뿐이니까..
난 가르쳐 주는 사람 미스터 한은 배우는 사람.
코치라고 생각해요.
자 그럼 요긴 비좁으니까 옥상으로 올라가요.
따라오세요..“
정후는 칼의 말을 듣고 꼰대 짓은
안 할 거 같아 보여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끌려가는 느낌은
지울 수 없어 아영을 미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아영은 정후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더 이상 저항 해 볼 방법이 없는
정후는 마지못한 얼굴로
옥상으로 올라가는 칼을 따라갔다.
아영은 웃는 얼굴로
정후가 안 보일 때 까지 배웅하다가
정후가 사라지자
이내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영은 정후가 휴가를 내고
방황하는 사이 칼과 만나고 있었다.
칼은 아버지의 오랜 지인으로 무림계의 고수였다.
검의 달인으로 프랑스 펜싱 국가대표까지
지낸 뛰어난 선수였다.
뒤에 무림과 인연을 맺으며 자신의 주 종목인
펜싱을 검법으로 승화시켜 검으로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영의 아버지는 무공앱을 완성하기 위해
전 세계의 무림 고수들을 만나고 다니 던 중
칼과 인연을 맺었고 칼도 아버지의 뜻을
높이 사 둘은 지기가 되었다.
후에 아버지의 죽음에 힘든 삶을 살아가던
아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아예 아영을 돕기 위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아영은 그런 칼을 삼촌처럼 생각했고
정후 때문에 마음속의 고민이 깊어지자
칼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칼이 보기에도 이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전문 살수집단인 부영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칼은 어쩌면 헛된 희생이 될 수도 있는 일에
정후를 끌어 들인다는 게 옳은 것인지 고민이 됐다.
그러다 정후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무공앱을 켰고
칼과 아영은 슈퍼컴퓨터로 정후가 아이를 구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칼은 정후를 보고 탄성을 질렀는데
그건 수면위를 비상했다고 나온 탄성이 아닌
정후가 아이의 등을 발판 삼아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상승시켜 난간을 넘는 걸 보고 나온 탄성이었다.
보통 무공은 재질이 9할 노력을 1할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무공에 적합한 신체와 머리를 가진
기재를 찾는데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칼은 정후가 난간을 넘는 장면을 보고는
무공의 기재 중에 기재임을 알았다.
일반적인 경공은 반복적인 수련에 의해
내공의 증진이 수반됨에 따라 일정한 수준에
오르는 게 가능 하지만 순간적인 대처 능력,
흔히 임기응변이라고 불리는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이다.
임기응변이라고 하면 그 상황을 수습하기에 급급한 걸로
생각하기 쉬우나 무공에서의 임기응변은 그 차원이 다르다.
검법을 예로 들면 정해진 초식에 따라 검을 시전하는 것은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상황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변초를 구사하면서
연속으로 시전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의 입장에선 정해진 초식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건
예측해 막아 낼 수 있으나 순간적인 변초는
아차! 하는 사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임기응변은 무공의 수위를
순식간에 두 배 세 배로 끌어 올 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법을 배 울 때 변초가 아닌
초식을 반복해 배우는 것은 변초를 구사해 상대를
제압하려다 되려 내 허점이 더 크게 들어나
한 방에 역습으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복싱에서 상대를 현혹하는 잽을 날린 뒤
스트레이트로 결정타를 먹이려다가
어설픈 타이밍 탓에 도리어
카운터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때문에 초식이란 안정적인 확률로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게
반복적인 동작을 구사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문파에 따라 안정성보다는 공격의 치명률을,
공격보다는 방어를 주목적으로 하는 등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초식들이 개발 되어 왔으나
최종 목적은 한 가지였다.
변초로 인한 위험성을 줄이는 것..
자주 얘기하는 기본기란 말도
여기서 통용되는 것이다.
특히 무공에 입문하는 초보일수록
이 기본기가 중시 되었다.
그래야 실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윗 단계로 올라갈수록
특급고수의 반열에선 이 초식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무공이 가진 요체를 파악해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뻔 한 틀을 가진
공격과 수비가 특급의 반열에 오른
이들에게 먹 힐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급의 반열은
무공의 기재만이 오를 수 있었다.
농구 선수들이 전부 노력한다고 해서
마이클 조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거기에 앞에 초가 하나 더 붙어 초특급이 되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전설되는 것이다.
칼은 정후의 모습에서
특급이 아닌 초특급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영과 같이 품었던 고민도 사라졌다.
초특급이 될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
그건 거부 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오로지 본인의 몫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끝까지
가 봐야 한다는 게 칼의 생각이었다.
아영도 정후를 가르치는 내내
무공의 자질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등을 이용해 반탄력을 이용하는
정후를 보고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영과 칼의 대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끝까지 가보자..
운명의 결정은 하늘에 맡기자..
어쩌면 정후는 무공앱으로 무공을 익혀
세계 최고의 고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결론이 나자 아영은 망설임없이 밀어부쳤다.
평생 없던 웃음까지 지어가며
정후를 옥상으로 올려 보낸 것이다.
그녀는 천운처럼 찾아온
숙명을 거부 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지금의 순간들이
산고의 고통일 거라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옥상에 올라 온 정후는
한 쪽에 놓여진 검집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검이라는 걸 쓰게 되는구나..
정후는 몸에 한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건 군대에서 처음으로 총을
지급 받을 때의 느낌과는 틀린 것이었다.
그 때 다 같이 동시에
총을 지급 받았고 다 같이 쐈다.
일종의 집단의식이
두려움을 없애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전쟁에서 장수들이 병졸들에게
대열을 강조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이다.
수세에 몰리더라도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고
모여 있으면 끝까지 싸울 의지를 잃지 않게 된다.
하지만 대열이 흩어지는 순간 설사 수적인
우세이더라도 그대로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다들 흩어져 도망가고 있는데 나 혼자 죽겠다고
덤빌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지..
사실 도망가는 게 현실적으로는 더 불리한 게 맞다.
대량 살육도 치열한 접전보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도망가는 적을 추격해 사살 할 때 일어나게 된다.
즉 죽을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럼에도 도망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나 혼자라는 두려움..
정후도 혼자서 검을 잡는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줄행랑을 칠 배짱도 동시에 없었다.
그건 아영 때문이었다.
그녀가 실망 할 까 봐..
정후는 몸을 한 번 흔들고는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래 이제 어차피 엄마의 복수도
같이 걸려 있는 문제 아닌가..
자식의 도리는 다 해야지..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유까지 붙여가며
정후는 검집에 다가가 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