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공청석유(空靑石乳)를 찾아서
한참동안 난리법석을 떨다가 몽과 보옥은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몽은 걸어가는 동안 잠시 고민을 하다가 보옥에게 말했다.
“저한테 업혀요.”
“뭐?”
몽의 말에 보옥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나를 업고 뛰어간다고? 그렇게 얼마나 뛰어갈 수 있겠어? 엄청 힘들 텐데...”
“이렇게 세월아 내월아 가다간 또 녹림의 무리들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이번처럼 운 좋게 넘어갈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보옥은 몽이 자신을 업고 산길을 달린다면 금방 지쳐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몽이 장난을 치며 말했다.
“뭐, 무겁긴 엄청 무거웠지만, 소단주를 안고 뛰어봐서 괜찮을 것 같아요.”
몽의 말에 보옥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덜 맞았구나?”
“헤헤...아,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자 어서 업혀요.”
몽이 돌아앉으며 자신의 등을 보옥을 향해 들이밀면서 말했다. 보옥은 잠시 망설였지만, 몽의 말처럼 지금 약해진 자신의 몸으로 산길을 걸어서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고, 또 녹림의 무리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몽의 등에 업히며 말했다.
“힘들면 말해. 알았지?”
“걱정 마세요. 힘들면 떨어뜨려버릴 테니까요. 그러니까 떨어지기 싫으면 꽉 붙잡기나 해요.”
“이게...”
보옥은 몽의 머리를 한 대 콩하고 쥐어박고는 몽의 옷깃을 꽉 잡았다.
“그렇게 잡아서 되겠어요? 떨어져도 난 몰라요.”
“어서 달리기나 해. 바보야.”
몽이 일어서면서 외쳤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몽이 보옥을 업고 달리기시작하자 보옥은 출렁이는 몽의 등에서 떨어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꺅!”
보옥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에 잡았던 몽의 옷깃을 놓고 얼른 몽의 목에 자신의 팔을 둘러 꽉 매달렸다. 몽은 보옥의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고운 향기에 미소를 지으며 힘든 산길을 즐겁게 달렸다. 몽의 등에 업혀 따뜻한 몽의 체온을 느끼는 보옥도 포근함을 느끼며 상쾌한 숲 향기에 흠뻑 젖었다.
보옥이 정신을 잃어 온전히 자신의 팔 힘으로만 지탱하고 뛰어야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보옥이 목을 꼭 끌어안고 있어서 훨씬 더 달리기가 수월했다.
몽이 과연 자신을 안고 산길을 이렇게 달려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던 보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놀라워했다.
‘아니 지금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달려온 거야?’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몽은 해가 저물었는데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오히려 업혀있는 보옥이 지칠 지경이었다.
“잠깐, 잠깐만 쉬었다 가.”
몽은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헉헉 거렸지만, 그렇게 많이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힘을 쓸수록 처음엔 힘들었지만 오히려 점점 더 몸이 적응을 하며 그만큼 더 힘이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찮아요. 더 뛸 수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힘들어서 그래.”
보옥의 말에 몽은 천천히 멈춰 섰다. 몽이 보옥을 내려놓자, 보옥은 풀밭에 풀썩 주저앉았다. 떨어지지 않으려 몽의 목을 꼭 안고 있었던 팔이 저리고 아팠다.
그렇게 잠시 쉬고, 쪽잠을 자고 가면서 불과 삼일 만에 흑영단의 총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는 동안에는 다행히도 맹수나 녹림의 무리를 만나지는 않았다.
“휴우. 이제 다 왔네요.”
몽은 보옥을 공가(空家)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네? 그런데 정말 힘들지 않아?”
어두운 밤을 달려와 이제는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보옥을 내려놓은 몽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보옥을 향해 말했다.
“사실 조금 힘은 들었어요. 하지만......”
“응? 하지만?”
몽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단주를 업고 더 멀리, 더 오랫동안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몽의 말에 보옥의 얼굴이 빨개지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몽 역시 말을 해놓곤 부끄러운지 얼른 돌아서며 말했다.
“빨리 다녀올게요.”
보옥이 놀라며 말했다.
“아니, 좀 쉬어도 되잖아? 지금까지 힘들게 달려왔는데 벌써 떠나려구?”
“조금이라도 빨리 원래 힘을 되찾아야죠. 얼른 찾아서 올 테니 걱정 마세요.”
몽이 뛰어가려는데 갑자기 보옥이 몽의 손을 잡았다. 몽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 보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옥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보옥은 몽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앵두 같은 붉은 입술로 속삭이듯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당부하는 보옥의 목소리가 몽에겐 세상의 그 어느 소리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산길을 달려갔다. 보옥은 몽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몽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보옥이 흑영단의 총단으로 돌아가자 아버지 황욱이 뛰쳐나왔다.
“보옥아!”
황욱은 보옥의 너저분한 옷을 보고선 한동안 멍하니 지켜보고 서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거냐? 녹림과의 일은 또 어떻게 된 것이고?”
보옥은 녹림과의 일을 흑영단의 단주인 아버지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했었다.
“우선 좀 씻고 나서 이야기해요 아버지.”
보옥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아버지와 마주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부녀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옥은 녹림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했으며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황욱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지금 막 몽이 자신을 치유할 영약(靈藥)을 찾아 떠난 사실까지도.
“뭐....뭐라고? 이 죽일 놈들이...... 그 녀석들이 말하던 위사가 몽이였구나!”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어요. 구현웅 장로님도 없던 일로 하자고 했고요. 하지만 감응천 그 녀석이 문제였어요. 지금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네....”
“내상을 심하게 입은 모양이던데, 죽지는 않았던 모양이더구나.”
“우와! 그것까지 벌써 다 조사를 하셨어요?”
“그게 아니고, 감항이 우리가 운영하는 객주를 통해 서신을 보내왔어. 감항의 서신을 읽어보니 감항 자신도 자기 아들이 어떤 녀석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그런데 감항이 나와 너, 그리고 몽이 녀석을 함께 만나자고 하더구나.”
“패력대제(覇力大帝) 감항이 다함께 만나자고 했다구요? 몽도 같이?”
“그래. 나도 왜 그러는지 몰라 너에게 물어보려던 참이다. 흑영단에서 대충 내용을 조사해서 나에게 보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너나 몽이 밖에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글쎄요..... 저라면 모르겠지만, 몽을 왜 보자고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북부 녹림의 무리들이 신경 쓰여 네가 돌아오는 대로 한(韓)나라에서 만나자고 했다.”
한나라는 북부녹림과 남부녹림 어느 누구의 세력도 강하지 않아서 녹림세력의 중간지대였기에 황욱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괜찮겠느냐?”
황욱은 보옥이 지금 무공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어 물었다.
“괜찮아요. 그냥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아버지만 알고 계세요.”
‘연나라로 간다고 했나?’
보옥은 아버지 황욱과 이야기를 끝내고는 흑영단의 사람을 시켜, 연나라의 흑영단원들에게 공청석유를 가지러 떠난 몽을 찾아서 이리로 돌아오지 말고 한나라로 오게 하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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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옥을 데려다 놓고, 몽은 쉬지 않고 신물지도를 보며 달렸다. 몽은 목이 마르지도, 배가 고프지도 그리고 몸이 지치지도 않는 것을 깨닫고는 무척 신기해했다.
‘이렇게 지치지 않는다면 몇날며칠이라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금방 공청석유를 가지고 돌아올 수가 있겠는 걸? 그럼 소단주도 얼른 회복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자 몽의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그렇게 뛰어간지 이틀째 되는 날 오후, 몽은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몽이 뒤를 돌아보니, 허리에 칼을 찬 이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일 앞에 있는 자는 무공을 꽤 익혔는지 경공술에 능해서 달려가는 몽을 금세 따라잡았다.
- 터억!
건장한 사내가 몽의 앞을 가로막았다. 몽은 급하게 멈춰 섰다.
“뭐야? 짐도 하나 없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누....누구세요?”
몽이 놀란 마음에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그건 알거 없고. 너 고개를 이리 돌려봐”
그들은 몽을 빙 둘러서서는 몽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들은 품속에 있는 그림들을 꺼내서 살펴보며 다시 집어넣기도 했다.
“엥? 이 녀석은 아무도 아니잖아? 야! 너 어딜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는 거야? 엉?”
“네?....아.... 그냥...”
몽은 공청석유를 가져간다고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뭐?”
“아.. 그냥.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감이 없어서요. 그냥 이쪽 길로 쭉 달려가면 혹시 연나라가 나오나요?”
“나오긴 나오는데, 이 녀석 뭔가 수상한데? 야, 이 녀석 품속을 한번 뒤져봐.”
몽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들이 자신의 품속을 뒤지는 것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올 것도 없었고, 천서는 그들이 읽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 이게 뭐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책을 도대체 왜 들고 다니는 거지?”
“그건 어디서 주운 건데, 아마 누군가 글을 쓰기도 전에 잃어버렸나 봅니다.”
그들은 천서를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는 바닥에 툭 던졌다.
‘휴우...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몽의 배에 갑자기 뭔가 쑥 박혀 들어왔다.
“커허억!”
몽은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며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칼 한 자루가 자신의 배를 파고들어가 있었다.
몽이 만난 자들은 서로 마음이 잘 맞는 현상범 사냥꾼들이었는데, 가끔 벌이가 시원찮을 때에는 산에서 산적질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사람을 죽일 때 뭔가를 얻기 위해서 죽이기도 했지만, 지금 몽에게 하는 것처럼 단지,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고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사내가 몽의 배에 꽂힌 칼을 쑥 뽑았다.
- 털썩.
몽이 바닥에 쓰러졌다. 몽의 배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흙을 적셨다.
“에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그들은 죽어가는 몽을 그렇게 놔두고 뒤돌아섰다. 그들은 몽으로부터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을 푸념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뭔가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은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 방금 쓰러진 몽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있는 것이 보였다.
“뭐....뭐야! 저 녀석!”
몽의 눈은 까뒤집어져서 흰자위만 보였고, 손과 발은 축 늘어져 있었는데, 강한 기(氣)의 회오리바람이 몽의 옷과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