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보옥의 장난
몽은 천서를 살펴보다가 아무것도 글자가 올라오지 않는 장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장에는 단지 인간세계의 모든 것이라는 말만 쓰여 있을 뿐 다른 장들처럼 글자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피어오르지 않았다.
‘인간세계의 모든 것? 근데 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지?’
몽은 궁금했지만 언젠가 알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장들만으로도 익히기에 벅찼다.
잠시 후 몽은 황욱이 하인들을 시켜 보낸 음식과 물통을 받았다. 몽은 천민인 자신에게 하인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낯설었다.
‘잠깐. 여기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니잖아? 그럼 내가 천민이라는 것도 어떤 신분이라는 것도 누구도 알 수가 없는 거잖아?’
몽은 자신이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남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몽은 누구보다 천민의 설움을 잘 알았기 때문에 황욱의 하인들에게 얼른 말했다.
“저기, 앞으론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이렇게 안 들고 오셔도 됩니다.”
하인들은 몽이 앞으로 어떻게 먹는 것들을 해결할 것인지 몰랐지만, 매일 음식과 무거운 물통을 나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뻤다.
사실 몽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천년 된 이무기의 여의주를 삼켰고, 선계의 복숭아 반도(蟠桃)를 먹었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아도, 물을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 사실을 몽은 아직 몰랐다.
몽은 따끈한 쌀밥에 고기반찬을 보자 군침이 흘렀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천민이었던 자신에게는 그토록 귀한 음식들이 이렇게 눈앞에 떡하니 차려져있으니 먹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몽은 쩝쩝거리며 허겁지겁 음식들을 먹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몽은 정신없이 음식을 먹으며 맛에 감탄했다. 가지고 온 음식들이 상당한 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몽은 음식들을 깨끗이 다 먹어치웠다.
“꺼윽. 잘 먹었다.”
몽은 밥을 다 먹고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물을 떠 마시기 위해 물통을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깜짝이야! 뭐야? 누구지?’
물통의 물에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몽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다시 물통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어 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아주 곱게 생긴 소년 하나가 물에 비치고 있었다. 몽이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의 얼굴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은 천천히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다. 물에 비친 고운 얼굴의 소년도 자신과 똑같이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헉! 이럴 수가! 나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몽은 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듯 칙칙했던 자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맑은 빛이 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얼굴인지 못 알아 봤던 것이다. 이무기의 여의주와 선계의 반도(蟠桃) 덕분에 몽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있었지만 정작 몽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일이 나한테 벌어지고 있는 거야?’
몽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물을 한바가지 퍼마셨다. 그리고는 천서를 더 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몽은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아직 그것을 몰랐고, 당연히 밤에는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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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쏴아아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안개가 자욱한 산속의 집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보옥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 황욱은 상단의 일을 보기 위해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 사람들을 이끌고 비를 맞으며 길을 나섰다.
보옥이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객잔에서 소란을 부린 이후로 황욱은 결혼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한창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꽃처럼 고운 나이에, 숲속의 저택에서 홀로 있다는 것은 보옥에게도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보옥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가 모아둔 술들 중에서 솔잎주를 꺼내어 마셨다.
보옥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내공을 이용해 술의 기운을 밖으로 몰아내면 술이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취기가 오르기 위해 마시는 술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냥 술기운이 오르도록 취기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비를 감상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내가 왜 공가(空家)를 미친놈한테 양보해야 하는 거지? 거긴 원래 내가 쓰던 곳이잖아?’
갑자기 보옥은 몽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공가에서 쫓아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옥은 몽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확 쫓아내버려?’
보옥은 몽을 흠씬 두들겨 패서 쫓아내버릴까 생각을 하다가, 그랬다간 아버지에게 혼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다.... 확실히 미친놈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몽을 쫓아낼 방법을 생각하던 보옥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렇게 하면 알아서 공가에서 떠날 거야. 그리고 아버지도 그 녀석이 미친놈이라고 확실히 믿게 되겠지. 어차피 아버지는 오늘 여불위(呂不韋)아저씨를 만나 밤새도록 거하게 마실 테니까. 며칠이 지나야 돌아오시겠지?’
조나라에 살고 있는 여불위는 황욱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처음에는 서로 물건을 사고팔며 거래를 하다가 만났는데, 여불위는 손해를 보더라도 결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황욱의 사람 됨됨이에 반해서 형제의 정을 나누기를 청했고, 황욱은 여불위 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여불위의 호방한 성격에 호감을 가져 그것을 수락했다. 여불위는 조나라에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는데, 장사라는 것도 정보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에 최고의 정보 집단 흑영단의 단주인 황욱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이번에 진나라에 거래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욱은 상단의 일을 핑계 삼아 동생을 만나기 위해 새벽같이 나선 것이었다.
보옥은 몽을 쫓아낼 자신의 계획에 흡족해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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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공가에서 온종일 천서만 읽었다. 책을 보다가 지겨워지면 잠시 누웠다가 다시 책을 보다가 지겨워 지면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다가를 반복했다 밤이 이슥해지자 몽은 책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자리에 누운 몽은 문득 자신이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고 해놓고선 아무것도 안 먹었네? 그런데 왜 배가 안 고프지? 목도 안 마르잖아?’
몽은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몽이 잠든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후드득 거리며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몽은 잠에서 깼다. 몽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우우우우우
- 끼이이이이히
몽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어두운 밤 산속에서 들려오는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그 소리를 듣고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귀신인가?’
귀신이 몽을 향해 말을 했다.
- 몽....몽....... 너를..... 잡으러.......왔다.......
‘뭐? 나를 잡으러 왔다고?’
몽은 귀신의 말에 머리가 쭈뼛 섰다. 몽은 너무나 무서웠지만 천서에 귀신을 잡는 법이 나와 있었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귀신을 향해 크게 외치며 천서를 꺼내어 귀신 잡는 법을 찾기 시작했다.
“왜....왜 나를 잡으러 왔다는 거요!”
- 너는.... 이미..... 죽을 때가.....다......되었다.....
몽은 천서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귀신을 잡는 부적을 쓰는 방법을 보면서 물을 찍어 헝겊위에 부적을 따라 그리며 목소리를 떨면서 외쳤다.
“내....내가 왜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거요!”
- 염마장(閻魔帳)에 적힌...... 너의..... 수명이 다 되어...... 너를.... 데리러.....왔다......
몽은 부적을 다 쓰고서는 헝겊을 들고서 자신을 잡으러 온 귀신을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젠장! 물로 써서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그냥 손가락을 깨물어 내 피를 가지고 부적을 쓸걸 그랬나?’
피로 쓰면 효과가 좋지만, 피가 없으면 먹물, 먹물도 없으면 그냥 물을 사용해도 된다고 천서에는 나와 있었다.
갑자기 공가(空家)의 입구 문이 덜커덕 거렸다. 몽이 잠들기 전 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가놓아서 문은 열리지 않았다.
- 문....을..... 열어....라.....
몽은 덜커덕 거리는 문과 귀신의 목소리에 혼이 나갈 정도로 무서웠지만 이를 앙다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 문....을.... 열어라.....
몇 번 더 문을 열라는 말과 함께 심하게 덜커덕 거리던 문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뭐지? 왜 갑자기 조용해졌지?’
몽이 이렇게 궁금해 하고 있는 데 갑자기 굉음이 들리며 문이 우지끈 부서져나갔다.
- 콰콰쾅!
몽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으아악!”
부서진 문 너머 저기 멀리 숲에서 누군가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비바람에 흩날리며 서있는 귀신이 있었다.
- 우우우우우
귀신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다가오다가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몽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서서 헝겊부적을 들고는 벌벌 떨면서 귀신을 살폈다. 제법 먼 거리에 비바람이 부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이무기의 여의주를 삼켜서 귀신의 얼굴이 훤히 다 보였다.
몽은 벌벌 떨면서 귀신을 살펴보다가 귀신이 누군가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얼마 전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던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