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꿈을 꿨다.
바로 내가 사고가 나던 그 날 밤이었다. 혜정이를 바래다주고 행복한 표정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나를 향해 큰 트럭이 달려들었다. 나의 몸은 헝겊인형처럼 힘없이 구겨졌다. 잠시 후 사고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심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저히 참기 힘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변 사람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외면했다.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눈과 마주치는 것을 다 피하는 눈치였다. 냉정한 표정과 눈빛들… 나는 저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 사고를 목격하고 귀찮음에 외면했던 바로 내 표정이었다. 난 그때 내가 한 행동이 생각이 났다. ‘그 사람도 그 때 이런 감정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는 내가 염치가 없게 느껴졌다. 나는 모든 걸 포기했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로 그 순간, 저 뒤에서 어느 한 남자가 목발을 짚고 발을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119에 신고를 했다. 이상하게 그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난 다행히 구급차의 응급처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외면했던 그 사람이었다.
나는 그 날의 기억을 잃었었다. 지금 이 장면은 잊혀진 나의 기억의 일부인가 보다. 왜 이제 와서 이런 꿈을 꾼 걸까? 그 분이 내가 자신을 외면했던 사람인지 알았어도 과연 그렇게 행동했을까? 어떻든지 간에 난 한동안은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갈 것 같다. 이 것을 극복하는 길은 나도 받은 만큼 베풀며 사는 것뿐일 것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 난 좀 전의 꿈에서 깨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의 장면은 바뀌었다.
이번엔 임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깔끔히 빗어 넘긴 머리, 검정 정장, 반짝일 정도로 잘 닦인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고 그 옆을 내가 걷고 있었다.
190㎝ 가까이 되는 임실장, 나도 180㎝ 중반은 되는 키라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러나 나는 걸을 수록 다리가 점점 짧아지더니 결국엔 휠체어에 올라타 두 손으로 바퀴를 굴리며 힘겹게 그를 따라갔다. 앉아서 본 임실장은 더욱 거대해보여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따돌리려는 듯 힘찬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뒤쳐지지 않으려 빠르게 바퀴를 굴렸다.
나의 시선은 3인칭 시점으로 바뀌어 우리 둘을 위에서 바라봤다. 그러자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그가 걷는 길이 붉게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임실장이 땅에 발을 딛을 때마다 땅이 검붉은색으로 변하여 그가 걸어온 길이 온통 피비린내 나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시선은 내게로 옮겨졌다. 나의 휠체어 바퀴는 땅에서 계속 굴려져 더러워졌고, 그 것을 굴리는 나의 손도 새까매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길은 맑은 물에 푸른 하늘이 비쳐 보였다.
임실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된 것은 바로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이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임실장은 다시 말했다.
“나 같은 놈이 세상에 태어난 게 죄다.”
나는 이번에도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맑고 투명한 물과 검붉은 물이 맞닿자, 서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듯 이리 섞이고 저리 섞였다. 과연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선우는 아쉽게도 그 끝을 보기전에 잠에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