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아침을 맞이한 그는, 핸드폰을 쥐고 무기력하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의지할 것이 이 손바닥만 한 물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혜정이 학교를 갔는지, 무사히 자료를 찾았는지, 그런 자료는 없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먼저 연락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분 1초를 직접 몸으로 느끼듯 시간이 더디게 갔다.
그렇게 정오가 되기 조금 전, 살짝 선 잠이 든 선우의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우야. 이사장님 실을 찾아봤는데, 특별하게 보이는 건 없는데? 컴퓨터도 켜서 찾아봤어. 예전에 우연히 비번 입력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거든. 비번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어.”
혜정에게서 온 톡이었다. 선우는 ‘이럴 때 통화를 하면 참 편할 텐데,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참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답장을 보냈다.
“그래? 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그냥 아무거나 사람들 적힌 리스트 같은 거라도 없어?”
“음… 혹시 이런 것도 도움이 될까?”
혜정이 선우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그것은 사람들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는 리스트였다.
“응? 그건 무슨 리스트야?”
“기부 리스트라고 쓰여 있어.”
“기부 리스트…?”
선우는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누나, 그 리스트 혹시 가져올 수 있어?”
“응, 프린트해서 가져갈게.”
“응, 알겠 어. 조심 히 와.”
“응, 걱정 마. 이사장님은 안 계시고, 김선생님한테 이사장님이 뭐 좀 찾아봐 달라고 했다고 문 좀 열어 달라고 했어. 전혀 의심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알겠 어. 조심하구, 이따 봐. 근처로 데리러 갈게.”
선우는 외출 준비를 하고, 학교 근처로 차를 몰고 혜정을 마중 나갔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본 익숙한 차가 학교로 들어가는 것이 선우의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그 차를 유심히 봤다. ‘이럴 수가’ 선우의 기억이 맞았다. 그건 바로 이사장의 차였다. 선우는 놀라서 혜정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르
신호가 계속 갔지만 혜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우는 초조 해졌다. 혹시나 혜정이 이사장과 마주치고, 거짓말한 것이 들켜서 위험에라도 처하면 어떡하나 걱정됐다. ‘차를 몰고 들어가볼까? 무슨 일인지 물어볼 텐데? 뭐라고 말하지?’
똑똑!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그 순간에 선우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선 혜정이 미소를 지으며 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누나! 별 일 없었어?”
“응, 무슨 일이야? 나한 테 전화는 왜 했어? 설마 내가 통화 못하는 거 잊어 먹은 건 아니지?”
“아니야.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이사장이 지금 올라갔었거든.”
“어머, 그랬어? 그래도 뭐 그렇게까지 놀라니? 그냥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데.”
“혹시 모르니까…”
“나 걱정해 준거야? 그러면 고맙고.”
“응, 걱정했어.”
“너도 은근 걱정 대마왕이구나.”
혜정은 선우가 자신을 걱정한 것이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자, 여기!”
그리곤 자신이 복사해온 서류를 선우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냥 평범한 기부자 리스트 같았다. 선우는 그 리스트를 천천히 살펴봤다.
‘응? 이 사람 이름이 익숙한데?’
거기서 익숙한 이름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선우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려 얼굴을 찡그렸다.
‘맞다! 이 사람!’
선우는 급히 차를 몰았다.
“누나, 나 지금 어디 갈 곳이 있는데. 누나 집에 데려다 줄까? 아니면 같이 갈래?”
“나도 같이 갈래.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래, 알겠 어. 안전벨트 매.”
차를 타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조형사의 집 앞이었다. 오는 동안 전화로 조형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덕분에 차가 도착하자 마자 조형사는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선우야, 정말이야? 어디 그 리스트 좀 봐 봐.”
조수석에 앉은 혜정이 A4용지 몇 장으로 이루어진 묶음을 뒷자리에 있는 조형사에게 전달했다.
“응, 고마워요. 혜정양. 오랜만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혜정은 어색한 듯 선우에게 와는 다른 평소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셨어요? 그 사람 이름 맞죠?”
“응, 맞아. 근데 동명이인일수도 있잖아. 이것만 가지고 뭐가 될까?”
“거기 핸드폰 번호도 있잖아요. 경찰서가서 신원조회 해보면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지금 휴가 중이라 좀 조심스럽긴 한데… 가서 해볼까?”
“예, 지금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요.”
“이 사람이야?”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보던) 혜정은 선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 곳엔 누군가의 사진이 있었다.
“응? 이 사람 맞아! 형사님, 이 사람 맞죠? 누나 어떻게 알았어? 이 사진은 뭐야? 아는 사람이야?”
“뭐야, 정말. 형사 님이야 그렇다 치고 선우 넌 실망인데?”
“응? 무슨 소리야?”
“무슨 둘 다 조선시대에서 올라왔나.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핸드폰 번호 등록하면 톡으로 프로필사진 볼 수 있잖아! 물론 그 사람이 프로필 사진을 안 올려 놨으면 어쩔 수 없지만.”
두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고 황당한 듯 웃었다.
“이런 건 생각도 못했네. 이 사람이 누나가 등록한 걸 알면 어떻게 해?”
“누가 그런 거까지 하나하나 확인하니? 혹시 그렇다 해도 나야 거기서 일하니까 관리하려고 등록했다고 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어.”
선우는 혜정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본인은 모든 걸 머리로 계산하고,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행동하는 데 반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듯했다.
“응, 누나 고마워. 누나가 최고야!”
“하하, 것 봐.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했지?”
“응, 맞아. 형사님! 그럼 이제 최검사님한테 갈까요?”
“응, 우리가 믿어도 되겠지? 네가 저번에 한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리네.”
“예, 어차피 지금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그 분 밖에 없어요. 우리가 가진 패가 그리 많지가 않아요.”
“그래, 모든 패를 다 써버리고 빈 손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
“알겠습니다!”
간 만에 두 남자가 의욕에 찬 모습을 보였다. 선우는 단숨에 차를 몰아, 최검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역시나 미리 전화를 받은 최검사는 전투준비태세를 마친 군인처럼 그 들이 오자 마자 사무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 리스트 줘 봐.”
“예, 검사님. 물어본 건 좀 확인해 보셨어요?”
“지금 확인 중이야.”
잠시 뒤, 사무실 팀원 중 한 명이 최검사에게 프린트 된 자료를 가져다주었다. 선우는 그 것을 눈으로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최검사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자, 선우야. 조형사님. 이 것 좀 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