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의 팔목을 잡은 채로 운은 무작정 달렸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운이 달렸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제 뒤에서 나래가 버거워하며 겨우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운은 그를 배려할 수 없었다.
도망가야 했다. 최대한 멀리, 저 자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했다.
피슉- 퍽!
운은 지금 그네들이 있는 곳이 나무가 많은 숲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뒤에서 날아 온 화살이 나무에 박혔다.
허나 나무 파편이 운의 뺨을 스쳤다. 달리는 것에 정신이 팔린 그가 나무 파편에 뺨이 베인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뺨에서 붉은 피가 흐르건만 운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슉- 퍽!
다시 한 번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 화살은 정확히 운의 목덜미 지점 언저리에 있던 나무에 박혔다.
검은 안대를 낀 검은 사내가 쏘는 화살의 정확도는 점차 높아져 갔다.
그 때 나래가 운의 뺨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했다. 나래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운을 잡아 당겼다.
“왜 이리도 겁을 먹은 것이냐? 이래서는.......”
“잘 들어, 아가씨. 저 자는 풍천대의 대장이야!”
그런 사실 쯤 나래도 알고 있었다. 한요궁에서 지낸 세월이 세 해였다. 아무리 만월전 지하 감옥에 감금 되다시피 지냈다지만, 다한 황과 깊이 관련된 인물의 얼굴조차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세 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허나 운의 얼굴은 상당히 심각했다. 조금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커다란 마물 앞에서도 여유가 넘치던 그였다. 허공을 빽빽이 채운 화살비 앞에서도 태연하던 그였다.
“활만큼은 류국에서 적수가 없어. 꽉 잡아, 아가씨!”
안 되겠다 생각이 들었는지 운이 나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래가 운의 너른 품에 폭 안겼다.
제 품에 폭 안긴 나래가 의외로 얌전했다. 따라서 오히려 아까보다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운이 조금 전보다 더 재빠른 움직임으로 내달렸다.
피슉-
또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으로도 베일 듯 매우 날카로웠다.
퍽!
화살은 이번엔 포물선을 그리더니 운의 오른 허벅다리를 스치고 땅에 박혔다. 옷이 찢기고 한일자로 베인 곳에서 피가 쓰며 나왔다.
상처가 쓰라릴 텐데 운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일부러 점차 정확도를 높이며 활을 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그저 봐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 한 시라도 바삐 그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운의 발이 더 재빨라졌다. 오른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그 힘에 상처에서 피가 계속 쓰며 나왔다.
비록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힘을 받다보니 상처가 조금씩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배자가 되면서 도망치는 것만 늘었나 보지, 운?”
뒤에서 검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창한 숲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멀리 퍼졌다. 그 때문에 괜히 울림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니면 네가 나라의 국본을 죽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건가?”
나라의 국본.......
운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은 어떤 도발에도 넘어가서는 아니 되었다.
귀를 막았다. 두 손은 사용할 수 없었으나 의지로 두 귀를 막았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또 한 번 그런 소리를 들으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 품에서 작게 퍼지는 나래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대로, 제 손으로 제 주인을 터뜨려버릴 뻔 하였다.
“미안, 아가씨.”
“상관 말거라. 아무렇지 않으니.”
운이 최대한 발을 빨리 놀렸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슨 수를 사용하더라도 제 품에 있는 제 주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자그마한 주인이 꼼지락 거리더니 운의 품에서 제 얼굴을 쏙 빼내었다.
“운, 저 자와 잘 아는 사이인 것이냐?”
“.......”
“뭔가 오해가 있다, 그리 설득할 수는 없는 것이냐?”
“......응.”
운은 성희를 설득할 수 없었다. 제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린 공주의 죽음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도저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저 자는, 성희는, 나린 공주에게 저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자였다.
성희와 처음 만난 것은 나린 공주의 배려로 한요궁에 들어가고 열흘 쯤 뒤였다. 무관복을 입고 있는 성희가 나린 공주의 뒤에 있는 운에게 다가왔다.
풍화대원들이 그를 막자 나린 공주가 풀어 주었다. 운에게 다가온 성희가 물었다.
-어이, 나도 모르겠냐?
운은 그 때 성희가 자신에게 지어 보였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서글서글하면서도 그 안에 슬픔과 분노와 비웃음이 잔뜩 뒤섞여 있던 검은 두 눈동자.
그 복잡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운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너와 함께 입관한 동기, 성희다. 네가 수석이고 내가 차석이었어. 완전히 잊은 모양이지만. 어쨌든 또 잘 부탁한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운이 잡았다. 그 손에도 역시 슬픔과 분노와 비웃음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운은 그와 악수를 나누었던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그 손바닥에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무언가가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무인이셨군요!
그 때 운의 시야로 나린 공주의 얼굴이 크게 걸렸다. 그의 권유로 군사학당에 들어간 지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그가 운 앞에서 밝게 웃었다. 어느새 운도 나린 공주의 미소를 따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희도 나린 공주께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중랑장 성희, 나린 공주님을 뵙습니다.
기억을 잃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운과 달리, 차석으로 군사학당을 졸업했다는 그는 엄청난 속도로 진급했다.
-교위 운, 중랑장 성희님을 뵙습니다.
-아냐, 됐어. 한 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야. 더구나 네가 나보다 무술 솜씨는 더 뛰어나잖아.
-과찬이십니다.
-절대 과찬 아냐.
나린 공주와 함께 있을 때면 어떻게 알고 성희가 나타나곤 했다. 대화는 거의 운과 나누었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나린 공주께로 향해 있었다.
나린 공주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기쁨도 환희도 그렇다고 쑥스러움도 아니었다.
처음 보았던 그의 눈동자처럼, 그의 검은 두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뭐야, 또 두사람 함께 있습니까? 저도 좀 껴 주십시오?
-랑장 운, 장군 성희님을 뵙습니다.
-이 자식은 고쳐지지가 않네. 그만 두라니까. 이제 곧 네가 나를 뛰어 넘을 거야.
-아닙니다, 장군.
-그만 해. 너랑 입씨름하는 것도 이제 지쳐.
그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매번 옆에 있던 나린 공주가 활짝 웃곤 했다.
-또 싸우시네요. 싸우지 마세요.
그러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둘은 그를 바라 보았다. 제 얼굴에 지어 져 있는, 소중한 무언가를 바라볼 때에 저절로 지어지는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의식하지 못한 채로.
다만, 성희의 미소는 언제나 씁쓸하게 퍼지며 끝나버리곤 했다. 마치 끝이 씁쓸한 유자라도 입에 머금은 듯.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미소였다.
-운, 오늘 진급시험이 있지요? 성희 장군께서도 운에게 기운을 나눠주세요. 꼭 합격할 수 있게요.
운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나린 공주의 말에 성희가 좀 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의 등을 가볍게 쳤다.
-자, 장군님의 기다! 넌 반드시 합격할거야.
저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 속은 점차 검게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은 검게, 검게 타오르다 이내 찰나의 붉은 빛을 내버리며 재가 되어 버릴 터였다.
이후 그와 운은 같은 장군의 계급으로 담야국과의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활을 주 무기로 하는 성희는 지원부대로 최전방에서 싸우는 자들을 뒤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반면 검을 주 무기로 하는 운은 나린 공주와 함께 최전방에서 싸우게 되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기였다. 더구나 이제 같은 계급이 되었다. 허나 나린 공주와 함께 있는 시간은 운이 일방적으로 더 길었다.
-운, 여기서 바람을 맞아요. 피비릿내가 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 거예요.
생사를 오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나린 공주는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서 있곤 했다. 그와 함께 나란히 바람을 느끼다보면 어느새 성희가 다가왔다.
-공주님! 오늘도 무탈하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나라의 국본인 나린 공주님의 안위를 두 눈으로 확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를 바라보는 성희의 눈빛은 ‘국본’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검게, 그리고 다정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연모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허나 나린 공주의 시선은 운에게서 성희에게로, 옮겨 간 적이 없었다.
-운이 저를 지켜줬어요. 운이 있으니까 저는 안전해요, 성희 장군.
그와 대화를 나눌 때마저도 나린 공주는 시선을 운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 때마다 성희의 표정은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에겐 분명 그 시절이 몸에도 마음에도 상처만 생기던 시절이었음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운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그 시절은, 나린 공주와 성희 그리고 운 이 셋이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많은 시절이었다. 언제나 함께였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서로란 존재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운은 뒤에 성희가,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고 마음이 든든했다. 마음껏 검을 놀리며 적들의 피를 온 몸으로 적셔가며 싸울 수 있었다.
“운! 너는 내게서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운의 얼굴에 기억 속 성희의 미소만큼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피슉-
퍽!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날아오는 간격이 짧아졌다. 이제 봐주기는 끝났다는 건가.
운은 적어도 성희에게만큼은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저 자에게만큼은 붙잡혀서는 아니 되었다.
운은 도저히 그에게 검을 들이댈 수 없었다. 아니 싸움은 고사하고, 오해라고, 자신이 아니라고, 그런 말조차도 꺼낼 수 없었다.
기억 속 슬프면서도 복잡한 그의 미소가, 눈동자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피슉- 퍽!
정확히 얼굴 옆 나무가 화살에 맞았다. 나무의 파편이 운의 눈동자로 날아들었다. 운이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 나무의 파편은 잘 피했으나, 그 때문에 잠시 주춤하고 말았다.
운이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성희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여야 할 대상이 보이지 않자 운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허나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운이 다시 북쪽을 향해 내달리려 했다.
퍽!
젠장.
또 눈으로 파편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내가 달리기로 너한테 완전히 진 적이 없는데 말이지. 운, 아무런 짐짝이 없는 내 쪽이 더 빠른 게 당연하지 않겠냐?”
그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젠장, 젠장, 젠장!
운이 나래를 세게 끌어안았다. 현재 운은 나래의 호위무사였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나래만큼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너, 그 자가 누군지는 알고 품에 품고 있는 거냐?”
“......나 지금 아가씨의 호위무사야. 꽤 비싸게 고용된 입장이라서 말이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낼 각오야.”
“......그럼 이번에도 실패하겠군. 그렇다고 네가 살 수 있다는 건 아니고.”
그늘 진 나무 뒤편에서 성희가 나타났다. 그가 화살 통에서 짧은 활을 꺼내 들었다. 그 활을 본 운의 눈동자가 잠시 커지더니 서둘러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서는 나래를 제 너른 품에 폭 숨겼다.
“아가씨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지킬 거니까. 걱정 마.”
“무, 무엇을......”
나래의 얼굴에 운의 그림자가 넓게 드리웠다. 그림자에 그녀의 천청색 눈동자마저 어두워졌다.
퓩! 푹-!
“으윽......”
“운, 운아......”
귀가 찢길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살이 찢기며 짓이겨 밀려들어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운이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다행인지 급소는 모두 피했다. 아니, 이건 일부러 그렇게 쏜 것이었다.
그럼에도 중상인 건 다름이 없었다. 운의 눈빛이 흐릿해지더니 휘청거렸다.
퓩! 푹-!
한 번 더 그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렸다. 운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운아……”
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래를 품에서 조금도 놓지 않았다. 아니, 정신이 멀어져 갈수록 나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래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나래가 운의 품에서 벗어나 성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안 돼, 아가씨! 가면 안 돼!”
제 품에서 벗어난 나래를 붙잡으려 했다. 허나 이미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운은 흐릿해지는 눈동자로 멀어지는 나래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안 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였다. 사실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있었다.
그럼에도 운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놓치면 아니 될 것 같았다. 운이 손을 뻗었다. 허나 운의 손에 그가 닿지 않았다. 운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나는 여기에 있다. 이 자는 가만히 내버려 두거라.”
제 보다 두 배는 될 것 같은 검은 사내 앞에서도 나래는 당당했다.
“하하하, 맹랑한 건 여전하군.”
아스라이 멀어지는 시야 사이로 마주 선 두 사람이 보였다. 하나는 이제 벗이라 칭하지 못할 동기였고, 하나는 새로운 저의 주인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살기를 내비쳤다. 운은 제 작고 여린 주인의 등 너머로 이제 벗이라 할 수 없는 친우의 얼굴을 보았다.
“!”
그가, 슬프고 복잡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던 검 은두 눈동자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수배자가 되어 류국 변방을 떠돌던 세 해란 세월 동안, 제 벗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알지 못할 일이 그에게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 부탁은 들어주지 못하겠는걸. 둘 다 잡아가야 하거든. 아니면 내 목이 날아갈 처지라서.”
제가 모르는 부분이 많아진, 벗이라 할 수 없는 친우가 제 주인에게 활시위를 겨누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걱정 말거라. 너를 결코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그 때 나래가 운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다정한 말투와 눈빛이었다.
‘난 끝까지 너를 방해만 하는구나.’
운이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날아오는 화살을 등지며 나래를 감싸 안았다.
“운아!”
>> 13장. 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