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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천사는 울지 않는다
작가 : 소설부부
작품등록일 : 2017.7.15

영겁의 세월동안 고독과 마음의 평온만을 추구하던 천사 프라.
그가 복잡한 관계로 뒤얽힌 지구의 삶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

...팽팽한 긴장의 줄을 싹둑 잘라 먹었다.

모두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라는 잔뜩 힘주어 숨을 참고 있던 참이었었다.

에이씨. 지지려면 빨리 지질 것이지. 할랑 말랑 하는 게 더 고문인 거 모르나.

키가 보통 명마보다 큰 흑마는 구경꾼들을 당당하게 가르고 장교 앞에까지 왔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검은 후드망토를 길게 늘어트린 존재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카라스의 검은 기사
작성일 : 17-07-15 14:19     조회 : 26     추천 : 0     분량 : 9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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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한참을 달린 검은 기사가 강가에 말을 세웠다. 세라를 풀 위에 누인 후, 긴 후드 망토를 벗었다.

 

 흔들림 때문에 정신이 든 것은 한 참 전이었으나 세라는 기절한 척하고 있었다.

 

 미풍에 쓰디쓴 독초향이 코를 찌르고 지나갔다.

 

 쇠약한 상태에서 살이 타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었나 봐.

 

 적당한 때를 잡아 도망쳐야겠어. 이대로 미치광이 영주의 밥이 되느니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을 해 봐야지.

 

 실눈을 뜨고 주변을 관찰했다.

 

 하늘 위로는 파갈성에서 봤던 비슷한 매가 여전히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옆으로는 낮은 관목들이 많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숲이 있었다. 물살이 제법 빠른 것을 보니 중. 상류쯤 되어 보였다.

 

 분명 근처에 계곡이 많을 거야. 숨어들 곳도 많을 테고.

 

 물론 저 기사가 보기보단 빈틈이 많다면 성공확률도 있겠지만. 세라는 거의 탈의를 마친 기사를 보았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가 목 어림에서 거칠게 잘라져 있었다. 대충 혼자서 잘라낸 듯 보였다.

 

 단단한 근육들이 조각 같은 나신을 이루고 있었다. 왼쪽 바깥 허벅지부터 시작해 날씬한 허리까지 이어지는 긴 화상자국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오래 되어 하얗게 변한 흉터들부터 최근 생긴 붉은 것들까지 온몸이 상처 투성 이었다.

 

 뒤태만 보아도 젊은 기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벌써 저런 상흔들이 뒤덮여 있다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는 뜻이었다. 분명 어린 나이 때부터 거친 생활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투레질 하는 말이 세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얼른 눈을 감았다.

 

 그가 강물 속으로 들어가 수영하니 말도 물을 먹기 시작했다.

 

 말과 저 기사 사이에는 단단한 교감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것이 분명했다.

 

 강가 저편까지 헤엄쳐 간 기사는 뭔가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풀 한줌을 뜯어 다시 돌아왔다.

 

 물 밖으로 나온 그는 풀을 입에 넣고 씹어 즙을 낸 후, 세라를 모로 돌려 어깨에 붙여 두었다.

 

 하마터면 쓰라릴 고통에 세라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미간만 찌푸리는 것으로 참아낸 건 순전히 허기진 배 덕분이었다.

 

 상처에 덧나 황제의 특별 하사품으로써 가치라도 떨어지면 호된 문책을 받나보네. 그렇지 않고서야 노예에게 이런 처치를 해 줄 사람들은 없으니까.

 

 다시 강물로 들어간 기사는 먼지와 땀을 닦아냈다.

 

 지금뿐이야! 도망칠 기회는.

 

 몸을 일으키려하니, 또 다시 몰려오는 쓰라림에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천천히 몸을 굴려 엎드렸다. 그리고 뒤쪽으로 기며 기사의 동태를 살폈다.

 

 기사가 이쪽을 볼 것 같으면 멈춰 정신을 잃은 척 했다.

 

 슬금슬금. 뒤로뒤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몸을 일으키고.

 

 일단 뛰고 보는 거야.

 

 치맛자락을 움켜지고 어딘지도 모를 방향으로 무조건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기사도 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뒤쫓아 올 생각이 없는지 그저 하던 일을 마저 하는 눈치였다.

 

 상황이 희한하게 돌아간다 해서 물어볼 순 없잖아? 일단 뛰고 보는 거지.

 

 그 후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했다. 평지를 뛰다가 바위를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한참을 움직였다.

 

 정말 열심히 달렸지만 그가 말을 타고 뒤쫓으면 금방 잡힐 것 같아 은신 할 곳을 찾아 헤맸다.

 

 한쪽은 절벽이고 반대쪽은 노란 바위들이 즐비했다. 말 발굽소리가 생각보다 늦게 서야 들리기 시작했다.

 

 바위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한 마리의 검은 말을 예상했는데 편자소리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세 마리의 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발자국이 나 있는데.”

 

 “여자 발자국만 있군. 도망친 모양이야.”

 

 “잘 된 거지. 아까 보니 검은 기사 쫌 그럴싸하게 보이더만 여자도 놓칠 정도면 실력이 뻔 한 거지.”

 

 “그렇군. 히히히. 그나저나 어디로 숨으셨나? 세라 아가씨.”

 

 

 남자들이 말에서 내려 발자국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젖은 흙 위에 찍힌 세라의 발자국들을 따라 다가 오고 있었다.

 

 이를 어째! 노예상인이 분명했다.

 

 세라는 부들부들 떨려오는 턱을 자신의 손으로 붙잡았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질 때 마다 심장이 터질 듯 조여오고 피가 마르는 듯했다.

 

 남자 하나가 근처까지 오자,

 

 두려움으로 인해 본능이 이성을 점령해 버리고,

 

 세라는 일어나 미친 듯이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머리채를 잡힌 세라는 고통에 물 밖을 나온 연어처럼 몸을 바둥거리고 있었다.

 

 

 “어딜 가시려고. 그 기사한테서는 용케 도망쳤나 본데 우리한테는 안 돼지.”

 

 

 비웃음을 띈 남자는 세라의 목을 뒤로 억세게 제쳤다.

 

 

 “어디 나도 귀족여자랑 입 좀 맞춰 볼까?”

 

 

 남자의 질척한 입술이 세라의 입술을 덮치려 할 때,

 

 퍽!

 

 단도가 섬광같이 날아와 남자의 이마에 꽂혔다.

 

 얼어붙은 남자의 몸은 그대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뭐야?”

 

 

 저만치서 두 남자는 단도가 날아 든 방향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멀리서 던진 것이 이리도 정확히 꽂혔다니.

 

 흑마를 타고 오는 기사는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젖은 검은 머리에선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상의는 팔만 끼어 넣고 앞섶은 여미지 않은 채 벌어져 있었다.

 

 세라는 남자가 땅에 쓰러지자마자 정신없이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기사한테도, 노예상인들한테도 잡히고 싶지 않아.

 

 몸이 왜 이리 무거운지. 굶주리고 지친 몸은 마음처럼 빠르지 못했다.

 

 기사는 세라를 응시한 뒤, 두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파갈성 부근에서 숨어 있다 쫓아온 노예상인들은 망토를 벗은 기사의 외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산하고 어두웠으나 분명 보기 드문 기막힌 용모였다.

 

 비록 눈은 세상 풍파 다 겪은 듯 깊고 공허했으나 탄력이 넘치는 근육과 날렵해 보이는 늘씬한 몸매가 아직 젊고 파릇파릇한 것이 이제 막 제 코를 닦기 시작한 젊은 기사였다.

 

 이리저리 굴려지며 세상 온갖 더러운 짓을 다 배운 이 장사치들을 상대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하지.

 

 암……부족하고말고.

 

 

 “이봐, 기사양반. 저 여자……버린 거 아녔어?”

 

 “기사는 무슨……계집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는데.”

 

 

 동료 하나가 칼에 맞에 쓰러진 상황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기사에게 모욕을 주는 게 더 재미있어진다.

 

 

 “네 녀석 얼굴도 귀족마님들한테 제대로 먹히겠는데. 이그그그그.

 

 

 키 큰 흑마가 갑작스레 앞 다리를 올려 허공에 발길질을 쳐대자,

 

 얼마간 떨어져 있는 대도 불구하고 그들은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기사의 눈엔 세라가 절벽 쪽으로 조금씩 뒤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예상인들도 그 시선을 따라 갔다가 그제야 그녀가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 기겁을 했다.

 

 

 “이봐 이봐 이봐, 아가씨 그건 아니지.”

 

 “누굴 물 먹이려고!”

 

 

 절벽에서 멀어지라는 손짓을 하는 노예상인들을 무시하고 세라는 발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아가씨, 우리한테 와. 그리 죽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래, 그래 우리가 돌봐 줄 테니. 미치광이 영주한테 가서 뼈도 못 추리고 개죽음 당하느니 우리한테 오면 그 보단 훨씬 낫지. 어서.”

 

 

 세라의 한 쪽 발뒤꿈치가 허공을 밟았다. 균형을 조금만 잃거나, 한발자국만 뒤로 물러나도 끝나는 것이다.

 

 세라는 고개를 돌려 아찔하게 깎아지른 절벽아래를 힐끗 봤다. 아래에서 자꾸만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 중심을 잡으려 노력했다.

 

 하필이면, 절벽 쪽으로 도망을 쳤으니.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휘청휘청 몸이 저절로 벼랑 끝으로 휘었다.

 

 무서운 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서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세라 파갈, 너 이제 어떻게 할래?

 

 세라는 자신에게 물었다.

 

 뒤로는 낭떠러지, 앞으로는 음탕한 노예상인들.

 

 그리고 그들 뒤에 지옥의 사자처럼 버티고 있는, 미치광이 영주가 보낸 기사.

 

 기사는 방관자처럼 세라든 노예상인이든 아무라도 죽기를 기다리는 그런 무료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낯이 익은 저 표정. ‘죽고 싶어? 그럼 어디 죽어봐.’하는 저 잊을 수 없는 표정.

 

 양쪽 모두 처참한 현실이었다. 어느 쪽도 죽음을 의미했다.

 

 뒤로는 육신의 죽음, 앞쪽으로는 영혼의 죽음.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전쟁으로 부모와 오빠들, 친척들을 모두 잃은 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로 끔찍한 어둠의 시대를 견뎌내었다.

 

 견뎌야 한다고 해서 치욕적인 삶까지 계산에 넣어둔 것은 아니었다.

 

 이만큼 했으면 최선을 다했잖아. 하늘도 이해해주겠지.

 

 사람이라는 존재가 고고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쓰레기 취급을 오랫동안 받다보면 영혼도 그렇게 변해가기 마련이다.

 

 몸과 정신은 언제나 실과 바늘이니까.

 

 영혼이 더렵혀지는 것보단 육신의 죽음을 향해 뒤로 한 발 다가섰다.

 

 

 “너의 자존심을 지켜 주지.”

 

 

 그때,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기사가 말했다.

 

 낮게 눌린 목소리가 세라의 심장 중심까지 파고들어왔다. 소름끼치도록 어둡고 깊은 여운에 기사를 바라봤다. 마구 떨리는 손에 주먹을 꾹 쥐면서.

 

 

 “푸하하하. 무슨 헛소리래.”

 

 “미치광이 영주의 먹이가 되는 마당에 자존심은 무슨.”

 

 

 노예상인들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연신 세라를 구슬려 앞쪽으로 올 것만 재촉했다.

 

 기사는 노예상인들의 말을 무시하고 세라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듯 똑바로 응시했다.

 

 세라는 그제야 기사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젖은 검은 머리는 그 무엇보다 황량하고 어두웠다.

 

 검푸른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했다.

 

 보는 자들도 그의 까만 심연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핏기 없는 입술, 먹구름 같은 옅은 회색이 붉은 색을 잠식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힘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힘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눈매와 반듯한 콧날 그리고 그의 턱선은 그 안에 깃든 영혼의 고집스러운, 결코 바뀌지 않는 무언가가 박혀 들어가 있었다.

 

 

 “카라스 영주는……네가 원하지 않으면, 너의 털끝하나, 피 한 방울, 건들리지 않는다.”

 

 “흥!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누가 믿어. 실컷 가지고 놀다 잡아먹겠지.”

 

 “이봐, 니가 카라스 영주라도 되냐?”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연약한 세라의 시선이 기사를 살피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절대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선들을 기사의 얼굴이 담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몸의 선들이 낯익다 못해 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기사에게서 냉소적인 웃음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녀가 지금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가 세라를 향해 유혹하듯 손을 내밀었다. 마치 바로 앞에서 내미는 것처럼.

 

 

 ‘그래, 나는 바보인가 봐. 저렇게 지옥에서 올라 온 것 같은 자의 말을…… 단지 그를 닮았다고 해서, 그를 느끼게 한다고 해서,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하잖아.’

 

 

 세라는 그의 약속이 어둠 속에 드리워진 한줄기 빛처럼 여겨졌다.

 

 여인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녀를 짐승처럼 대하지 않을 것이며 생명을 빼앗지 않겠다는 것.

 

 그만하면 적어도 스스로 목숨을 포기 하지 않아도 될 조건이었다.

 

 약속을 받았으니 일단 믿어보는 것이 수순이었다. 세라가 기사를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

 

 그 순간, 쉬시 쉭.

 

 빠른 동작으로 말에서 내린 기사는 노예상인들을 향해 걸어왔다.

 

 뚜벅 뚜벅. 순식간에 무서운 살기가 그의 몸 위로 검은 연기처럼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노예상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겁 없이 맨 손으로 다가오는 기사의 살기쯤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고도 남는 실력이니까.

 

 한눈 팔다 이마에 단도를 박고 죽은 재수 나쁜 놈과는 다르지.

 

 그들은 고삐를 놓고 검을 꺼내 들었다. 고삐 풀린 말들은 거친 숨을 내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망설임 없이 기사의 걸음은 계속 되었고 노예상인들이 조금씩 물러서다 자기들끼리 눈짓을 하더니 동시에 달려 들었다.

 

 기사는 거칠지만 정확하고 빠른 그들의 검을 적은 움직임으로 다 피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노예상인들은 그제야 후회를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라는 것 또한 예감하기에 사지가 떨리기 시작했다.

 

 

 “기, 기사양반, 저 여자 몸값이 얼마진 알아? 셋이 나눠도 큰돈이야.”

 

 “그, 그래, 괜스레 서로 피 볼일 뭐 있소. 기사만 눈감아 주면,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하고 몸값을 나눕시다. 응?”

 

 

 말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기사의 눈에선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위험을 느낀 노예상인은 온힘을 다해 몸을 숙여 검을 휘둘렸다.

 

 기사는 양측에서 다가오는 검들을 느끼며 공중으로 회오리처럼 몸을 띄워 틀었다.

 

 살기를 머금은 검이 기사의 아래와 위의 공기를 베며 지나갔다.

 

 기사는 떨어지는 몸으로 땅을 박차곤 양손으로 각각 노예상인들의 검을 쥔 손목을 움켜잡았다.

 

 재빨리 자신의 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자

 

 푸욱. 잡힌 손에 들린 검이 곧바로 동료의 목을 향해 빨려들듯 그대로 뻗어 들어갔다

 

 제길, 드럽게 빠르군

 

 살기를 느꼈을 때 도망쳤어야 했어.

 

 노예상인들은 충격과 허탈함으로 서로의 눈을 보며, 좌우로 통나무처럼 넘어갔다.

 

 기사는 세라를 돌아보았다. 곧바로 절벽 쪽으로 걸어와 세라 앞에 섰다.

 

 놀란 세라는,

 

 

 “……아론.”

 

 

 이라는 이름을 또 뱉고 말았다.

 

 너무 사무치게 그리워서 함부로 불러보지 못하는 그 이름을.

 

 

 

  * * * *

 

 

 

 8년 전.

 

 

 파갈 가문을 상징하는 백마 문장의 4륜 마차가 밤을 가르며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안에는 아스란제국 제일의 실세인 파갈 공작과 그의 손녀딸이 타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아버지도 손녀도 턱을 다물고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차 안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과 침통한 기운이 금방이라도 강철로 만든 마차를 폭발시키기 직전이었다.

 

 중간에 말을 교체하기 위해 두 번 세웠고 그들은 사흘을 계속 달렸다.

 

 드디어 마차가 섰다. 한 밤 중이라 광산 책임자는 피곤한 기색을 하고 달려나왔다.

 

 그들은 광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노예 숙소에 안내 되었다.

 

 문이 열리고 안이 보였다. 휑한 공간에 임시로 가져다 놓은, 일인용 침상이 구석에 덩그러니 하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다리가 꺾여 주저앉을 뻔 한 것을 책임자가 부축했다.

 

 파갈 공작은 곧게 서 있었지만, 충격은 세라와 같은 무게로 느끼고 있었다.

 

 

 “초저녁까지는 숨이 남아 있었는데.”

 

 

 책임자가 말했다.

 

 침상으로 다가 가는 그 짧은 거리,

 

 격렬히 떨려오는 손이 느껴져서 주먹을 쥐어야 했다.

 

 얼룩덜룩 더러운 누더기를 머리끝까지 덮고 있는 자가, 그녀가 그토록 오래 살기 바랬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공작이 누더기를 휙, 제쳤다.

 

 세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탄내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비명도 울음도 바로 나오지 못한 채 턱이 열려 버렸다.

 

 멍하니…… 상황이 바로 인지 되지 않아,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잘 못 안 거야. 다른 사람일지도 몰라. 이건……아론이 아니야. 아론일 리가 없잖아.

 

 다시 누운 자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눈을 들었다. 몸을 침상 가까이 가져가 그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참혹한 장면을 참았다.

 

 공작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살짝 고개를 숙여 여기저기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웅크린 채 옆으로 누운, 검고 붉은 핏덩이 같은 형상은 어디 한구석 온전하게 그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았다.

 

 광산 책임자가 눈치를 알고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가서,

 

 

 “어깨에 파갈인장 일부가 확인됐고, 뒷 목덜미에서 은모가 확인됐습니다.”

 

 

 공작을 따라 세라도 자리를 옮겨 책임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분명 그가 말한 대로 파갈인장과 뒷덜미의 은모뭉치가 보였다.

 

 노예인장과 은모.

 

 

 “아니에요!”

 

 

 세라는 부인했지만,

 

 이 두 가지면 충분했다. 파갈가문에 그 충족조건을 가진 자는 유일무이 했기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가 맞았다.

 

 

 “아니라고요! 이 사람은……아니에요.”

 

 

 더 확실한 증거는 그에게 찍은 인장이 특별했다는 점이었다.

 

 파갈공작이 그 만을 위해 다시 제작한 유일한 인장이었다.

 

 

 “아론이……아니에요.”

 

 

 세라가 비탄에 휩싸이는 동안, 파갈공작은 분노를 내뿜으며 바로 나가버렸다. 책임자는 망설이다가 공작을 따라 나갔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봐야 했다. 아직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인장도 은모도 모두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론, 아니지? 너 아니지?”

 

 

 살피고 또 살피려 여기저기 눈을 움직이지만,

 

 투명했던 그의 하얀 피부는 온데간데 없고, 검게 그을리거나 벗겨지고 녹아내려 엉겨 붙은 채, 흉측하게 변한 모습에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꼭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틈 사이로 보일락 말락 조금 삐져나온 붉은 실.

 

 세라는 조심히 그것을 손끝으로 잡아당겼다. 처음엔 뭔가에 걸린 듯 쉬이 빠져나오지 않았으나 좀 더 당기니 나머지 부분이 이내 딸려 나왔다.

 

 앞에 있는 말없는 자가 그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그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홍색 머리카락을 꼬아, 그의 은색 머리카락을 꼬아, 그리고 그 둘을 다시 합쳐 땋으면서 작은 수정 구슬을 엮어 만든 팔찌.

 

 그가 직접 만든……그의 팔찌였다.

 

 

 

 

 

 

  * * * *

 

 

 

 

 

 

 검은 기사는 노예상인들을 처리하고 그들의 말 중 하나에 세라를 태워 북쪽으로 계속 달렸다. 해가 떨어지니 그가 말을 멈추고 불을 피웠다.

 

 

 “내 얼굴만 보면 떠오르는 놈팡이라도 있나? 왜 고따위로 야리꾸리하게 눈깔을 뜨는데?”

 

 

 그가 세라의 턱을 움켜쥐어 바짝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라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턱이 아프기도 해서지만 그의 공허한 검은 눈동자를 보기만 해도 소름이 확 돋아 올랐다.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자, 그녀를 홱 밀쳐내었다.

 

 정말이지 어머니도 여동생도 없는 놈처럼 구네.

 

 아론과 전혀 달라. 달라도 너무 다른 놈이었다. 그저 밑그림만 비슷한 것이다.

 

 말이 없는 것은 비슷하나 일단 입을 열면 행동 못지않게 거칠고 쌍스러웠다.

 

 모닥불을 노려보며 거칠게 육포를 뜯어 질겅질겅 씹어대는 꼴은 어떻고. 야만인이 따로 없네. 입 좀 다물고 씹으세요.

 

 그녀의 표정이 말해줬는지, 입맛이 떨어졌는지 그가 갑자기 육포를 휙 그녀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벌러덩 누워버렸다.

 

 윽, 더럽다. 그녀의 치마위에 떨어진 육포를 내려보니 침에 닿은 부위가 흐물흐물 젖어 있었다. 그 부분을 포기하고 나면 남는 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한 정도.

 

 그녀가 어쩌나 하고 곁눈질로 보는 눈이, 세라의 입속으로 육포가 통째로 들어가니 놀란 눈치였다.

 

 

 “얘기나 해봐. 심심한데. 어떤 사이야?”

 

 

 댁 같은 무뢰한의 귀 호강시킬 일 없음.

 

 

 “너, 생각보다 골치덩이 같아. 카라스까지 달고 갈 수 있을지…….”

 

 

 달고가? 고이 모셔가야지 황제의 빌어먹을 하사품인데.

 

 

 “카라스영주 명이잖아요.”

 

 “영주는 하사품 같은 거 신경 안 써. 내 맘대로 하도 돼. 걸리적거리면……, 알지 무슨 뜻인지.”

 

 

 죽여? 그런 의미인거지?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녀는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시작해. 각색을 하든 뻥을 치든 마음대로 지껄여 봐.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세헤라자데네요.”

 

 “얘기 끝내는데 천일이나 걸리면 넌, 죽는다.”

 

 

 세라는 흠칫 놀랐다. 돈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용병출신 같은데 천일야화를 알다니. 오호, 책 좀 읽은 나쁜 쒜끼구나.

 

 하휴, 제일 가슴 아픈 얘기를 팔아 목숨을 부지해야하다니.

 

 세라는 절로 한 숨이 크게 나와 얼른 입을 막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팔베개를 하고 반드시 누워 있었다.

 

 좀 하다보면 잠들어서 금방 곯아떨어지겠지. 미동도 없는 것이 벌써 잠들었을지도.

 

 절대…… 그의 끝까지, 죽음까지 이야기로 담아 낼 자신이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보다 두 살이 어렸어요.”

 

 

 이미 결말을 알고 감정을 삼키기라도 하듯이 검은 기사의 목젖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직 안자네.

 

 

 “사람들이 그를 처음 발견한 곳이 이 숲이었데요. 열 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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