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독일?”
서균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생각 중이야.”
“회복하면 나 도와줘야지. 난 너 없으면 안 된다.”
“옆에 유능한 사람들 많으면서.”
“유능한 사람들이 내 사람이냐? 날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어?”
늦은 시간 불쑥 찾아온 그가 때 아닌 핏대를 올리며 반문했다.
“근데 청와대 비서실장이 왜 이리 한가해? 너무 자주 오지 마. 병원 사람들 불편해.”
“내가 언제 남들 신경 쓰는 거 봤냐? 내가 신경 쓰는 건 너밖에 없어.”
“누가 들으면 애인인 줄 알겠네.”
그제야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나도 나지만 여경 씨는 어쩌려고?”
“모르겠어. 어떤 게 옳은 건지.”
“에구, 두 사람 인연도 참 징글징글하다.”
피곤한지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침대에 이마를 비벼댔다.
“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 있지? 너 회복되면 다들 모여서 창당하자고 난리야. 나도 나중에 합류할 생각이고. 너 독일 가는 건 말도 안 돼.”
“재활 끝나도 다시 그쪽 일 할 생각 없어. 변호사 일도 그렇고.”
“그게 무슨 소리야?”
건강을 잃고 나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에 대해 재차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를 위한, 혹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의 허망함 말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는 삶을 이끈 그들. 그들의 삶이 옳았던 것일까.
“형을 못 도와줄 수도 있어.”
“임마, 나 돕는 게 문제가 아니지. 너도 소신을 갖고 해온 일들이었잖아.”
“글쎄, 그것도 잘 모르겠어.”
“음.”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창밖 먼 곳을 응시했다. 불야성 같은 서울의 밤이 병실로 쏟아져 내렸다. 인공의 불빛이 없는 칠흑 같은 밤이 문득 보고팠다.
“차차 생각해 보자. 그것만 기억해. 너 없으면 난 속 빈 강정이란 거.”
“엄살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에게 그가 없다면 그야말로 텅 빈 존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 여경을 떠나보낸 뒤 오랜 시간 홀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
“오늘은 구 단위로 발화 연습을 할게요. 문장 수준에선 명료도도 높고 많이 유창해졌어요.”
“응.”
“그래도 아직 호흡이 부족하니까 적절한 곳에서 끊어 말할 필요가 있어요. /ㅅ/나 /ㅆ/가 들어간 단어에서 아직 명료도가 떨어지기도 하구요.”
“응, 주의할게.”
여경이 제시한 단어 카드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이걸 주제로 서너 문장 정도 연달아 얘기해 볼래요?”
“행복하려면 마음이 부자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필요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경의 지시와 달리 단숨에 여러 문장을 말해버렸기 때문이다.
“호흡에 신경 쓰지 않으니까 부자연스러운 곳에서 발화의 흐름이 끊기게 되죠.”
“응, 미안.”
여경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어? 피곤해 보여.”
“아니에요.”
“넌 밥 좀 많이 먹어야 해. 전부터 그랬잖아. 너무 조금 먹어.”
“그걸 기억해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같이 밥 먹은 지도 참 오래 됐네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밥을 먹던 그때. 수배령이 내려지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이게 뭐예요?”
“오다보니 길에서 팔길래 하나 샀어.”
사실이었다. 그녀를 만나러 오던 길, 작은 노점에 무심한 듯 놓여있는 가느다란 은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지나쳐왔겠지만 그날은 어쩐지 반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헤어짐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걸까.
“어머, 너무 예쁘다.”
어림짐작으로 손가락 크기를 가늠했으나 다행히 반지는 그녀에게 딱 들어맞았다.
“근데 왜 내 것만 있어요? 커플링이면 형도 끼고 있어야지.”
“낯간지럽게 커플링은 무슨. 그냥 네 선물이야.”
반지를 낀 그녀는 한껏 발랄해진 얼굴로 밥을 먹었다.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가락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던 반지와 그녀의 미소만이 생생히 기억날 뿐이었다.
“그 반지 생각나?”
“네? 아, 은반지?”
“응.”
“그걸 어떻게 잊어요? 형이 나한테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말이 내 귓전을 울렸다. 가슴 한편도 덩달아 웅웅거렸다.
“병실에서 뭐 연습하면 돼?”
더 이상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읽기 연습할 자료 줄게요. 끊어 읽을 부분도 모두 표시해 뒀으니까 열심히 연습해 와야 돼요.”
“그래, 알았어.”
나는 휠체어 바퀴를 돌렸다.
“난 괜찮아요.”
그녀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가?”
“형이 어떤 선택을 하든 괜찮다구요. 독일이든 여기든.”
***
“이제 안 와도 돼.”
오전 회진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로 들어서는 민영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결정했다는 뜻이야?”
“응.”
무언가를 예감한 듯 그녀의 표정에 불안이 스쳤다.
“독일로 갈 수 없어.”
“왜요? 여경 씨 때문에요?”
“응.”
그녀의 미간이 심하게 찡그려졌다.
“나한테 이렇게밖에 못 해?”
“미안해.”
“나란 사람은 너한테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말이야.”
“…….”
괴로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훗날의 괴로움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여경 씨랑 결혼이라도 할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여경이가 어떻게 생각할진 나도 확신이 없어.”
“여경 씨랑 상관없이 적어도 난 아니란 거구나.”
민영의 두 볼을 타고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마지막이란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때처럼 이번에도 네 결정 존중해줘야겠지? 존중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인생에서 똑같은 비극이 두 번 반복된다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상처를 주는 이? 상처를 받는 이?
“미안하단 말로도 부족하단 거 알아.”
“아니, 넌 몰라. 네가 걱정하는 사람은 항상 여경 씨뿐이잖아!”
그녀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추스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한테 한 번 상처 받은 걸로는 부족했나 봐. 내가 잠깐 잊고 있었어. 이제부턴 진짜 널 맘껏 미워하며 살 거야.”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멀어져갔다. 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당겨 올렸다. 그녀에게도 내게도, 이 괴로운 순간이 오래 기억되지 않기를…….
***
대학 후배 민정과 병국이 병실에 들렀다. 총학생회와 시민단체에서 함께 일하던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공유하며 동지애에서 우정으로, 그것이 다시 사랑으로 승화된 커플이었다.
“선배, 정말 많이 회복됐어요. 지난번 왔을 때랑은 비교가 안 되네요.”
“고마워.”
“선배다워요. 역시 의지의 신태영!”
옆에서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보다는 동료에 가까웠다. 덤덤한 듯하지만 진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든든한 동료.
“근데 정말이에요? 병원에서 여경 씨 만났다는 거요.”
“응.”
“두 사람 정말 대단한 인연이다.”
민정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아직도 생각나요. 그때 그 우편함.”
수배 중인 나의 유일한 연락책이던 민정은 어느 날 불쑥 은반지를 건넸다.
“이게 우편함 속에 있더라구요. 선배 거 맞죠?”
눈치 빠른 그녀가 챙겨온 반지를 보고 어찌나 먹먹했던지. 그런 나를 말없이 위로하던 민정의 모습도 눈에 선했다.
“여경 씨랑 헤어진 거예요? 하긴 당연한 일이겠지만. 선배, 힘내요.”
민정은 내가 숨어 지내는 연습실을 휘이 둘러보고는 읊조리듯 말했었다.
“남의 일 같지 않더라구요. 그때 병국이도 수배 받을까 봐 아슬아슬했거든요.”
“그랬어? 그땐 우리 아무 사이 아녔잖아.”
그녀가 병국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그래, 알았어. 내가 먼저 좋아한 거 인정하면 되니?”
“진작 그럴 것이지.”
“선배, 병국인 맨날 나 놀리는 재미로 사나 봐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경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반지 전했을 때의 선배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요. 반지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황망해하던 모습 말이에요. 어찌나 슬프던지.”
“그랬어?”
“여경 씨 아직 결혼 안 했다면서요? 그럼 두 분 다시 시작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글쎄.”
병국이 그녀의 팔을 쿡쿡 찔러댔다.
“지금 와서 그게 쉽냐? 자고로 한 번 깨진 유리는 다시 이어붙이기 어려운 법이야.”
“그럼 우린? 우린 열댓 번도 넘게 이어붙인 거 같은데?”
“그, 그랬나?”
민정의 타박에 그가 잠잠해졌다.
“선배, 인연이란 게 깨진다고 깨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특히 두 분은 더욱 그렇구요.”
“나도 잘 모르겠어.”
“이번엔 놓치지 마세요.”
민정이 결연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응원해주는 사람 있어서 힘이 나네.”
“형, 나도 그 중 하나에요. 이어붙이기 어렵단 말은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단 뜻이었죠.”
“알아, 임마.”
두 사람이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민정이 문득 던진 한마디.
“선배, 그 반지 아직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