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분은 어때?”
민영이었다. 귀국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실을 찾아오는 그녀.
“괜찮아.”
“다행이네. 날씨도 좋은데 우리 밖으로 산책 나갈까?”
“아니, 됐어.”
산책로에서 여경과 그녀의 약혼자를 만났던 게 불과 하루 전이었다. 막상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독일 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음절이 뒤바뀌거나 발음이 어눌한 증상은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3어절 이상으로 문장이 길어지면 느린 말 속도 때문에 대화의 흐름이 어색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뭐? 방금 뭐랬어?”
민영의 눈이 전에 없이 반짝거렸다.
“내가 할 일이, 있을까 싶어서. 독일에서 말이야.”
“일단 공부를 더 할 수도 있지. 국제변호사 쪽도 알아볼 수 있고.”
“응, 그렇겠네.”
눈앞에 있는 여경에게 자꾸만 달려가는 내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까. 민영과 함께 떠나버리면 이 부질없는 마음을 잠재울 수 있을까.
“내일 올 땐 관련 자료들도 가져올게. 특별히 공부하고 싶은 분야 있어?”
“글쎄. 앞으로, 생각해 볼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민영과 함께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었기에.
“그래. 천천히 생각해도 돼.”
“근데 너 이렇게, 오래, 나와 있어도 돼?”
“이번 학기엔 휴직계 냈으니까 다음 학기에 복직하면 돼. 그때까지 천천히 생각해 봐도 돼.”
절실함이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정릉동 연습실에서 함께 지내던 때의 눈망울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곁을 주지 않는 나를 한결같이 갈망하던 절실한 눈빛. 그 눈을 외면할 수 없어 나는 수배가 풀린 후에도 쉽게 그녀를 떠나지 못했다.
“그래, 생각해 볼게.”
그녀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크게 벌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흡족한 미소였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또 하나의 미소는, 내 언어의 한 음절 한 음절에 실리는 여경의 그것이었다.
***
“형이, 누굴 만나고 있다고?”
“진료부원장님이랑 미팅 중이라는데? 지찬호 선생님이랑 같이.”
진료부원장 지영식은 신경과 전문의이자 여경의 아버지였다. 연줄이나 편법 없이 모교 대학병원의 진료부원장 자리까지 오른 실력파 중의 실력파. 서균이 왜 그들을 만나는 걸까.
“오빠 때문 아닐까?”
“내가 무슨, VIP라도, 되나?”
“오빤 아니지만 서균 씨, 아니 그분은 이제 완전 VIP지.”
탄핵 정국을 마감하고 들어선 새 정부에서 청와대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그. 여당과 야당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소신 있는 젊은 정치가로 급부상 중이었다.
“참, 지찬호 선생님도 승진하셨던데. 부교수랑 재활센터장이라던가?”
“잘 됐네.”
“여경 언니 집안은 예나 지금이나 참 잘 나가. 첫째 오빠도 유명한 물리학 박사라던데. 얼마 전엔 ‘젊은 과학인상’까지 받았다나 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실력으로 똘똘 뭉친 숨 막히는 집안을 등지고 끝없이 방황하는 셋째 윤호가 떠올라서였다. 얼마 전 그가 더블린에서 보내온 엽서를 여경이 보여준 적이 있었다.
“태영아!”
서균이 커다란 배낭을 들고 병실로 들어섰다. 눈에 익은 푸른색 배낭이었다.
“이거 받아.”
“어, 이 배낭은…….”
“맞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메고 있던 거지.”
배낭 안에는 빛바랜 앨범 한 권과 대여섯 권의 책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건 왜?”
“우리가 처음 만난 게 너 까까머리 고딩 때였지. 이 배낭 갖고 싶어 했던 거 기억나?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네.”
앨범에는 농촌봉사를 왔던 당시의 서균과 그의 친구들, 간간이 나의 앳된 얼굴이 등장하는 사진들로 빼곡했다. 문익환, 백기완, 조정래…… 낡은 책표지 위의 저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구닥다리 물건들을 굳이 챙겨다준 그의 속내가 충분히 전해져왔다.
“재활 치료 열심히 받는단 얘기 듣고 어찌나 기분 좋던지. 널 영영 잃는 줄 알고 나도 모르게 마음 졸였었나 봐.”
“언제는 날, 믿는다더니. 그건 거짓말이었나 봐?”
“믿는 건 믿는 거고 걱정은 걱정이지, 임마.”
우리는 오랜만에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잠시 잊었던 걸까.
“미팅 얘기 들었어. 권력 있다고, 병원에 압력이라도 넣으려구?”
“오호, 농담하는 거 보니 이젠 살 만한가 보네. 압력은 무슨 압력! 철저히 네 보호자 입장에서 상담한 거지.”
“형이 내 보호자? 웃긴다, 웃겨.”
그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직책이 직책이다 보니 그를 찾는 데가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너 빨리 회복해서 일 좀 도와줘. 나 혼자 힘들어서 못하겠다.”
“형, 나 독일…….”
밖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가 못 기다리겠다는 듯 병실로 들어왔다. 쫓기듯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지난번과는 사뭇 달랐다. 내 뒷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을까. 몸이 회복되면서 자꾸만 무거워지는 마음이 내 뒷모습에도 담겨 있을까.
***
“새가 날아가고, 사람들이 캠핑을, 하네요. 공놀이하는 아이들이, 즐거워서 웃네요.”
“좋아요. 문장이 많이 길어졌어요. 다음부턴 속도를 조절하면서 자연스럽게 발화하는 연습으로 들어갈게요.”
그녀와의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형,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응?”
“아까부터 뭔가 망설이는 거 같아서요.”
“맞아.”
치료실로 내려오기 전 독일의 몇몇 대학들을 검색해 보았다. 갈등하고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라면 이런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뭔데요?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때 만난 남자랑, 결혼할 거야?”
뜻밖의 질문에 그녀는 짐짓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1303호 김귀옥 님요. 치료시간 오후로 미룰 수 있나 해서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녀가 환자 스케줄을 조정한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내게로 다가왔다.
“잠깐 산책할래요?”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서둘러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산책로로 들어섰다.
“김지환이랬나? 인상 좋던데.”
사실이었다. 잠깐 인사만 나누었지만 그는 유순하고 따뜻한 인상을 풍겼다.
“신경 쓰였나 봐요?”
“…….”
그녀가 천천히 휠체어를 돌려 고정시켰다. 며칠 전 그녀가 약혼자와 함께 앉아 있던 벤치였다.
“나도 벤치에 앉을래.”
악착같은 재활 치료 덕에 오른쪽 마비가 꽤 완화된 상태였다. 조심조심 몇 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우와, 정말 많이 좋아졌다.”
그녀는 박수까지 치며 탄성을 질렀다.
“맞아. 신경 많이 쓰여, 그 사람.”
그녀가 정면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스무 살의 투명함에 깊이가 더해져 그녀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예뻤다.
“왜요?”
그녀는 정말로 몰라서 묻고 있는 걸까.
“왜 신경 쓰이냐구요?”
‘왜’냐는 추궁에 마음이 후두둑 내려앉았다. 그때의 나는 ‘왜’ 그녀를 떠났으며, ‘왜’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했으며, ‘왜’ 그녀를 아프게 했던가! 수많은 ‘왜’들이 내 폐부를 앙칼지게 파고들었다.
“형은 그때도 그랬어요. 날 납득시킬 만한 어떤 변명도 안 했었죠.”
“미안해.”
그녀의 긴 한숨이 내 어깨를 타고 전해져 왔다. 결국 부질없는 말을 꺼내고 만 걸까.
“어떤 마음 때문에 궁금한 건지 모르겠네요.”
“…….”
“그 사람이랑 오랜 시간 만났어요. 이젠 우리 결혼에 누구도 의문을 던지지 않아요. 나만 빼고 말이죠.”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흩날리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건 오로지 내 마음뿐이었다.
“그 사람과는 자신이 없어요. 평생을 함께 살려면 이 정도의 감정으론 부족할 거 같아요.”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무언가 결연한 표정을 지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마음먹기 쉽진 않았어요.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많구요.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리는 게 맞을 거 같아요.”
“그래.”
“형이랑은 상관없는 결정이에요.”
“응, 알아.”
나와 상관없는 결정이라는 말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누군가의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상처로 남는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적어도 우리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괜찮겠죠?”
“뭐가?”
“모두 다 괜찮겠죠?”
“그럼.”
쉽지 않았음을 알기에 무슨 위로든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빠! 여기 있었어?”
태희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치료 끝날 시간인데 안 올라오길래 걱정했잖아.”
그녀는 여기저기 날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태희야, 미안. 내가 연락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치료 끝나고 언니랑 있을 거란 생각도 했어요.”
질끈 묶은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셋이 이런 시간 갖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러네.”
태희가 고 3때였던가. 어머니와 심하게 다툰 후 나를 찾아온 그녀를 북두칠성에 데려갔었다. 우리 셋은 그날 처음 만났다.
“언니가 일하는 서점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서점 이름이 은하수던가? 아, 북두칠성! 그날 언니가 사다준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랬나? 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때 생각했죠. 우리 오빠 옆에 천사가 강림했구나.”
내가 피식 웃자 여경이 살짝 눈을 흘겼다.
“스무 살 땐 내가 천사 비슷하긴 했지.”
“19살 어린 눈엔 진짜 그렇게 보였다니까요. 저런 언니가 평생 우리 오빠 옆에 있어주면 너무 좋겠다 싶었죠.”
태희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천사를 내 옆에서 밀어낸 건 다름 아닌 나였기에.
“오빠, 근데 이건 뭐야?”
그녀의 손에는 민영이 두고 간 팸플릿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독일어로 쓰인 그것들로 여경의 시선이 옮겨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