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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트리플 러브
작가 : 이류수
작품등록일 : 2017.11.6

한 번, 두 번, 세 번...... 수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완전한 사랑, 트리플 러브가 펼쳐진다.

 
제 14화. 뜨악한 고백 - 1997년, 태영
작성일 : 17-11-29 10:20     조회 : 371     추천 : 0     분량 : 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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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경호가 집요하게 묻더란 거지?”

 “네.”

 

 어젯밤 만취한 채 자취방을 찾은 경호는 오늘 아침까지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왜 여경에 대해 묻지 않았을까.

 

 “이것 좀 먹어봐.”

 

 나는 등심 돈가스를 먹기 좋게 잘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늦은 저녁식사. 학기 초라 그런지 학교 앞 술집이며 밥집은 연일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걸 피해 우리는 인근 여대 앞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경호 선배가 알면 안 돼요?”

 “걔가 입이 좀 싸야 말이지.”

 “형은 우리가 사귀는 걸 누가 아는 게 싫어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란 걸.

 

 “고루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운동권한텐 암묵적인 룰 같은 게 있어.”

 “그게 뭔데요?”

 “드러내놓고 연애하는 걸 꺼리는 경향이랄까. 위험한 상황이 생길 때도 있구.”

 “어떤 상황이 위험한데요?”

 “…….”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었다. 논리나 사실에 기반한 룰이기보다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 나도 모르게 체득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문득 경식과 서균을 떠올렸다. 그들이 나름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결국 ‘지키지 못한’ 연인들…… 나는 어쩐지 두려웠다.

 

 “너 시집 못 갈까봐 그러지. 나랑 사귀는 거 학교에 소문 나서 좋을 게 뭐냐?”

 

 그녀가 어물쩍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나 엄청 인기남인 거 알고 있지? 회장단 선거 이래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게 다 누구 덕이게? 나한텐 지켜줘야 할 여학우 팬들이 있다구.”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실없는 농담이었다.

 

 “서균 선배란 분은 어떻게 됐어요? 그 선배가 복귀해야 형이 좀 홀가분해지는 거 아닌가?”

 “이번에 나올 줄 알았는데 잘 안 됐어. 2년 형 받았거든.”

 

 걱정은 했었지만 실형을 선고받을 줄은 몰랐다. 임기 말 정부의 마지막 방어일까. 2년 간 비어있을 그의 자리가 벌써부터 크고 휑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분이라구요?”

 “응. 선배이자 스승 같은 존재지. 어떨 땐 아버지 같기도 하구.”

 

 그녀의 접시가 비워져가고 있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부럽네요.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부럽긴.”

 “어쩌면 나한테도 그런 존재가 생길지 모르겠어요.”

 “누구?”

 “글쎄요.”

 

 그녀가 짧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웃어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

 

 “형!”

 

 누군가 빼꼼히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구석 자리의 컴퓨터만 켜놓은 채 불을 꺼둔 상태라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구?”

 “저예요, 지영이.”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훅 누그러들었다. ‘형’이란 호칭은 여경만 쓰고 있는 게 아니었지.

 

 “이 시간에 아직 학교 있었어? 여긴 웬일이야?”

 “형이 아직 있을 거 같아서요.”

 

 지영은 같은 과 2년 후배였다. 경호와 동기인 그녀는 신입생 때부터 유독 눈에 띄었다. 당시 학생회장이던 나는 신입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사회과학 학회 모임에서였다.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던 그녀였기에, 강경하고 논리 정연한 비판으로 토론을 주도해가는 모습에 모두들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게 뭐야?”

 “집에서 보내주신 것들이에요. 주꾸미랑 소라.”

 “또? 매번 이럴 필요 없는데. 이 상자는 뭐야?”

 “노래 몇 곡 시디에 구웠어요. 지난번에 책 추천해준 거 고마워서요.”

 “…….”

 

 고맙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고향은 완도. 사시사철 그녀의 집에서 보내오는 어패류들은 언젠가부터 내 자취방 냉장고에도 쌓여가고 있었다. 작년 가을에 받은 전어와 낙지, 크리스마스 무렵 받은 참돔과 굴 따위가 냉동실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그래. 고맙다.”

 “고맙긴요. 형이랑 나눠먹는다니까 집에서도 넉넉히 보내와요.”

 “근데 내가 너한테 책 추천해줬어?”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 개강 파티 때 소주 마시면서 ‘녹색평론’ 책 추천했잖아요.”

 

 그녀의 의도적인 착각일까. 개강 파티 때 내 앞자리의 신입생 하나가 환경 관련 책을 추천받고 싶다고 했었다. 신입생 옆에는 지영이 앉아있던 기억도 났다. 나는 분명 신입생에게 책을 추천했었다.

 

 “좋은 책은 누가 읽든 유익한 거니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총학생회실을 휘이 둘러보았다. 내가 아직 불을 켜지 않았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불 켜지 마세요!”

 

 문 옆 스위치 쪽으로 걸음을 떼려는 나를 막아선 건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실은 형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거든요.”

 “근데?”

 “불 켜면 제대로 말을 못할 거 같아서요.”

 

 나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 ‘무언가’가 그녀의 입 밖으로 꺼내어져선 안 되리라는 것도 직감했다. 나는 황급히 스위치를 올렸다.

 

 “지영아! 주말에 대학로에서 집회가 있어. 내가 개회사를 맡아서 지금 좀 바쁘거든. 미안하지만 다음에…….”

 “형 많이 좋아해요!”

 

 막아설 틈도 없이 그녀가 ‘무언가’를 쏟아내고 말았다. 더 이상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형도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치만 마냥 기다리기엔 제가 너무 힘들어요. 신입생 때 형을 처음 본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형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었어요.”

 “지, 지영아, 지금은 그럴 상황이…….”

 

 뒤늦게 수습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먹이를 향해 폭주하는 승냥이와도 같이 몹시도 흥분된 낯빛이었다.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형이 내 마음 알아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껏해야 몇 초에 불과했지만 숨이 막힐 듯 긴장된 시간이었다. 그녀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우리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얘기하자니, 뭘? 내가 내뱉고도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만 가볼게요.”

 

 그녀의 얼굴은 금세 제 빛을 찾았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

 

 어이없고 부적절한 외마디.

 

 ***

 

 『0두칠성.』

 

 간판의 첫 글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받침 ‘ㄱ’이 설핏 남아있었는데. 서점 안을 들여다보았다. 경식이 보이지 않았다. 창고 방 정리 중인가? 누군가가 진열대 앞에 나타났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그녀, 여경이었다.

 

 “형!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요?”

 

 그녀가 출입문을 열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헤헤헤.”

 

 그러고 보니 지난 일주일간 한 번도 서점에 들르지 못했다. 연일 계속된 총학생회 회의와 노동계 파업 연계 집회, 다가오는 축제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 해?”

 “일해요. 일주일 됐어요.”

 

 그녀가 책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회과학 서점에서의 아르바이트라니.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머리 복잡한 일 있어요?”

 “응?”

 “머리 복잡할 때마다 여기 온다면서요.”

 “그랬나?”

 

 머리가 복잡하긴 했다. 지영의 느닷없는 고백을 받고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다. 아직도 머리가 얼얼했다. 철철이 어패류 세례를 맞는 것만큼이나 뜨악한 기분이었다.

 

 “근데 힘들지 않아? 집에서 뭐라고 안 하셔?”

 “스터디 모임 때문에 바쁘다고 말씀드렸죠. 틀린 말도 아니구요. 이만한 공부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녀의 손엔 낡은 목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재고 정리를 하던 모양이었다.

 

 “근데 일하면서 책 볼 시간 있겠어?”

 “형도 알잖아요. 여긴 엄청 한가한 서점인 거.”

 

 북두칠성은 학교 후문에서도 꽤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후미진 골목에 위치해 눈에도 잘 띄지 않았다. 물론 서점이 한가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이 더 이상 인문학 책을 읽지 않는 데 있었다.

 

 “내 손으로 경제활동 해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해요. 무엇보다 책도 맘껏 읽을 수 있어서 좋구요.”

 “그래, 잘 됐다. 근데 경식이 형은?”

 “아까 어떤 여자 분이 찾아와서 같이 나갔어요.”

 “여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아는 한 그에게 여자는 오래 전에 헤어진 수진뿐이었다. 경식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정책부장으로 일하던 1989년 당시 ‘임수경 방북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년 동안 수감됐었다. 졸업 후 수진과 결혼을 약속했던 그는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택했다. ‘사랑하기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 그럼 쪽지에 거짓말한 거네?”

 “제가요?”

 

 서점에 오기 전 우편함에서 가져온 쪽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소쉬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요. 쉬어야겠어요.』

 

 “거짓말 아닌데.”

 “쉬어야겠다며? 바로 집에 간다는 뜻인 줄 알았지.”

 “나도 형 닮아가나 봐요. 여기 오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해져요. 쉬는 거나 다름없죠.”

 

 그녀답지 않은 너스레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몇 시까지야? 많이 늦으면 집에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교대할 아르바이트생 곧 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나와 얼추 비슷한 큰 키였지만 운동을 많이 한 듯 눈에 띄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쪽은 김혁수 선배. 서울대 행정학과고 형이랑 동갑이에요.”

 

 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집이 이 근처래요. 지금은 휴학하고 행시 준비 중이구요.”

 

 우리는 서점을 나와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공부하다 잠시 쉬려고 아르바이트하는 거래요. 신기하지 않아요?”

 “…….”

 “항상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나 봐요.”

 “…….”

 

 대꾸가 없자 그녀가 물끄러미 내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변변한 인사말조차 없던 녀석의 눈빛이 어쩐지 거슬렸다. 예의 고시생답지 않은 말쑥한 차림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지영의 고백이 떠올라서였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여름 방학 때 완도 가기로 했어요.”

 “완도?”

 “지영 언니네 고향이 완도래요. 언니가 얼마든지 놀러 오라네요.”

 

 갑자기 심장이 얼어붙었다. 지영의 상기된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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