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이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니?”
지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산책 중인 환자나 동료들이 나를 알아보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 좀 낮춰줘. 여긴 내 직장이잖아.”
“미안해. 네 말에 흥분했나 봐.”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된 거 같아.”
“우린 6년을 만났어. 양가 모두 허락한 상태구. 우리 형 때문에 결혼이 미뤄지긴 했지만 그 또한 서로 양해를 구한 거였잖아.”
그의 쌍둥이 형 시환이 결혼 날짜를 잡았다. 맞선 한 달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다. 오랜 세월 닫혀있던 그의 마음이 순식간에 열린 셈이었다. 이는 그동안 미뤄왔던 우리의 결혼이 본격화됨을 의미하기 했다. 시환으로 인해 예기치 않게 가졌던 유예기간은, 오히려 결혼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돼주었다. 나는 진정 지환을 사랑하는 걸까. 그와 함께라면 평생 동안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까.
“신중히 생각해서 나쁠 건 없잖아. 결혼은 우리한테 중요한 일이니까.”
“양가 가족들한테도 그렇지.”
“아니, 가족들보단 지환 씨랑 나한테 제일 중요한 일이라구.”
“무슨 뜻이야?”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초록빛이 옅어지기 시작한 자작나무 잎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난감한 상황에 봉착할수록 놀라우리만치 차분하고 담담해지는 그였다.
“미안해.”
그와 만나면서 일관되게 느껴오던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이 순간 역시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단 말은 무언가 잘못했을 때 하는 말이야.”
“…….”
“넌 잘못한 게 아니잖아. 우린 지금 서로 소통이 안되는 것뿐이지.”
제법 선선해진 늦여름의 바람을 타고 차분한 중저음이 흘렀다. 소통. 현재의 우리에게 그것만이 문제일까.
“괜찮아. 상대에 대한 이해와 애정만 있으면 소통은 언제든지 가능한 거니까.”
상대에 대한 이해와 애정에 확신이 없다면? 이마가 저릿하게 편두통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코끝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왜? 머리 아파?”
“응.”
그가 내 머리칼을 찬찬히 쓸어주었다. 그의 다감한 손길이 싫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잠깐 기댈래?”
“아니야. 들어가 봐야 해. 2시부터 환자 있거든.”
“그래. 우린 나중에 얘기하자.”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건너편에 있는 태영과 태희가 보였다. 태희에게 먼저 눈인사를 보냈다. 지환과 같이 있는 모습을 그들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 먼저 들어갈게.”
“같이 들어가. 찬호 형 방에 잠깐 들러야 해.”
자꾸만 태영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차라리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다가갈까.
“태영이 형!”
그가 휠체어를 돌리려는 찰나, 나는 애써 그를 돌려세웠다.
“누구셔?”
“같은 과 선배 신태영. 이쪽은 동생 신태희.”
지환이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김지환입니다. 여경이 약혼…….”
“지환 씨, 환자 올 시간 돼서 나 먼저 들어갈게.”
나는 지환의 말을 가로채고 후다닥 병원 로비로 향했다. 등 뒤에 남겨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안이 벙벙할 지환과 태희, 그리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태영의 표정…….
***
“소현아!”
이혼 후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났던 소현이 귀국한 다음날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디 보자. 유럽 물이 좋긴 좋은가 봐. 신수가 훤해졌는데?”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쪽 학교에서 일하겠다고 했잖아.”
“모교에서도 날 애타게 찾길래 냉큼 달려왔지. 상담학이 한국에선 나름 떠오르는 학문이란다.”
그녀의 얼굴은 다소 그을려 있었지만 떠나기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이혼의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가 힘겹게 유학길에 오르던 5년 전이 생각났다.
“정소현, 너 그때 정말 용감했어.”
“내가 그랬나?”
“나 같으면 그런 선택 못했을 거야. 우왕좌왕하며 무기력하게 세월만 보냈을 텐데. 넌 역시 달라.”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녀가 친구라는 사실이 진정 자랑스러웠다.
“개강이 코앞이라 귀국하자마자 정신이 없네. 넌 잘 지냈구?”
“그럼.”
“지환 씨도 잘 지내지? 두 사람 언제 날 잡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가 주변이라 평일 오후에도 거리는 북적였다.
“둘이 사이 안 좋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뭔지 알겠다. 또 시큰둥 병이 도진 거구나?”
“시큰둥 병?”
“몰랐어? 지환 씨랑 연애하는 내내 넌 시큰둥했던 거.”
몰랐다. 소현이 느낄 정도였다면 그는 어땠을까. 나의 시큰둥함을 느꼈다 해도 그는 한결같을 사람이었다.
“네 말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난 둘이 이렇게 오래 사귈 줄은 몰랐어.”
“나도 그래.”
덧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한 채 6년의 시간을 방치해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럴 수 있어. 양가 가족들도 이미 오가는 사이잖아. 서로한테 딱히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오면 뜻하지 않게 연애가 길어지지.”
“소현아, 나 정말 어쩌지? 결혼은 정말 자신이 없어.”
“설마 태영 선배 때문은 아니지?”
환자가 된 태영과 재회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놀라던 그녀였다.
“새벽에 네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근데 한편으론 걱정도 되더라. 네가 선배 때문에 또 흔들릴까봐.”
“태영이 형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내 고민의 실체를 잘 몰랐어. 지환 씨를 정말 사랑하는 건지 확신이 안 서는 정도랄까.”
“그런데?”
“지금은 지환 씨랑 결혼해서 평생을 산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마음에서 내키질 않아.”
“음.”
소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든 얼음을 와작와작 씹으며 말했다.
“심각하네.”
“그렇지?”
“심각하지만 답은 있어. 아마 너도 알겠지. 다만 결단내리지 못할 뿐.”
“결단을 내리는 게 맞지?”
그녀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위해서 역시 그래야 해, 그치?”
“아니. 누구보다 너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해.”
‘나 자신’이란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 와 닿았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결단. 그것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태영 선배는 그 다음 문제야. 두 사람 문제를 연관 지을수록 결단내리기 더 힘들어져.”
“그렇겠지? 내 생각도 그래.”
그녀는 역시 상담 전문가다웠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끌어내 차분히 경청하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게 상담의 본질이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 어느새 해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만 미처 행하지 못한 해답.
“그리고 태영 선배 문제는…….”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여학생이 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 나 아직 정식 부임 전인데? 날 알아요?”
“이번 학기부터 강의하신다는 얘기 듣고 하반기 석사 과정에 지원했어요. 학부 때부터 교수님이 발표하신 논문들 많이 읽었거든요. 특히 전 가족 트라우마 치료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요? 정말 반갑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나도 잘 부탁해요. 우리 나중에 강의실에서 봐요.”
여학생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학업에 대한 열정을 전하는 그녀의 말과 달리 표정은 사뭇 어두웠다.
“표정이 별로 밝지 않네.”
“저런 학생인 경우 나랑 비슷한 케이스일 확률이 높아.”
“너랑?”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싶은 거지. 나 역시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3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이른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2년을 채 넘기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어. 내 모든 일상에 가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자리하고 있단 걸.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만.”
그녀는 부모님의 잦은 다툼과 이혼으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언과 폭력은 어린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녀의 낮은 자존감과 불편한 인간관계, 가정과 남편에 대한 두려움은 가족으로부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나마 학문에 기댈 수 있었던 게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그녀를 버티게 한 힘이 뜻밖에 학문이었다니 놀라웠다.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실로 다양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날 버티게 한 건 뭐였을까?”
“태영 선배랑 헤어졌을 때?”
“응. 그 사람과 민영 씨가 함께 지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때 말이야.”
“내 기억으론 그 날 이후 넌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만 했어. 다른 건 전혀 거들떠보질 않았지.”
그때가 너무도 아득히 느껴졌다. 열중할 대상을 찾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 부었다는 사실만 기억되었다.
“지환 씨 만나고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지. 그러고 보면 지환 씬 네 열정의 대상이 아니었나봐.”
“그랬을까?”
“더 이상 망설이지 마. 너 자신을 위한 결단이 필요한 때야. 그리고 나서 태영 선배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