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어무 자주 오, 오지 마.”
“오빠, 이제 말 너무 잘하네. 여경 언니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태희가 배식용 식탁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너도, 네 생활, 있어야지.”
“내 걱정은 마. 내 생활은 내가 알아서 챙기니까.”
나는 종이와 펜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말이 길어질수록 습관적으로 종이와 펜을 찾게 되었다.
“찾아봐도 없을걸. 여경 언니가 종이랑 펜은 전부 치우라고 했어. 한번이라도 더 말로 해야 한다구.”
사라진 종이와 펜. 여경의 배려였다. 전문가로서의 배려인지 사적인 배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뒤로 내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나의 언어가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면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을 만큼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그녀를 향해 예전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오빠 상속 문제 때문에 내일 변호사가 오기로 했어. 여경 언니한테 좀 도와달라고 부탁할까?”
“아, 아니야. 괜, 찮아.”
“하긴 오빠 후배니까 대화가 잘 안되더라도 불편하진 않겠다.”
기자라는 명목으로 전 세계를 떠돌던 아버지는 10년 전 돌연 출가를 했다. 부탄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다운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여름,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제법 많은 유산과 자신의 재산 전부를 내게 상속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끈은 오직 그뿐이었다. 자식에 대한 물질적 배려.
“나, 1인실 아, 아녀도 돼. 옮겨어, 도 된다구.”
“엄마가 1인실을 고집하잖아. 오빠한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진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병실을 찾지 않았다. 내 재활 치료가 완료될 때까지 모든 비용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전언뿐이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의 끈도 오직 그뿐이었다. 자식에 대한 물질적 배려.
“직장, 직장은 어, 어떻게 됐어?”
“응. 을지로에 있는 노인병원에서 일하게 됐어. 오빠가 서울시내 어디에 입원해도 접근성이 좋을 거 같아.”
“그, 그래? 잘 됐다.”
“말 하지 말랬는데. 실은 여경 언니가 도와줬어.”
여경에게 상처를 안긴 후 내내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지금의 여경에게는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죄책감을 넘어 그녀에게 자꾸만 닿고 싶은 욕망. 이것이 과연 정당한 마음일까. 파렴치한 나만의 이기심은 아닐까.
“정민영 씨 제안 말이야.”
“…….”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 정민영. 3년을 동거하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는 내게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녀. 그녀의 독일행은 끝이 보이지 않던 우리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방법 같았다. 내 발병 소식을 듣고 그녀가 한달음에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민영에 관한 내 감정은 언제나 ‘글쎄’였다. 미안하지만 다가갈 수 없고, 고맙지만 열리지 않는 마음. 첼로를 대할 때만큼이나 당차게 다가오던 그녀 앞에서 나는 언제나 주저하곤 했었다.
***
“오늘은 말 속도를 천천히 하면서 3어절 문장을 연습해 볼게요.”
오늘 아침 회진 때 찬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경이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어요.”
“…….”
“이제 와서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흔들리진 않을 거라 믿어요.”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아직 미혼이라는 얘기에 놀랐었다.
“신태영 님! 치료할 땐 집중 좀 해주시죠!”
“미, 미안.”
발병 이후 주의력이 흐려질 때가 많았다. 이런 나를 알아챌 때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다.
“형, 이거 한번 볼래요?”
그녀가 내민 자료는 진보 성향의 신문과 잡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자료집 등에 기고한 내 글들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연습할 말 자료는 형의 글들을 활용할 생각이에요. 괜찮겠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상태를 직시하고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상, 여경의 제안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기로 했다.
“난 이 글 참 좋더라.”
몇 년 전 진보 야당 소식지에 ‘복지와 이타심’이라는 주제로 썼던 글이었다. 여경은 소리 내어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는 말했다. 타인을 도우려면 그의 온전한 고유성 안에서 도와야 한다. 개인의 고유성을 무시한 채 도움을 주는 것은 자기연민에서 출발한 이기적 행동에 다름 아니다. 이기적인 연민이란 상대의 아픔에 ‘나’는 결코 연루되지 않았으며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시선의 폭력이다. 작가의 말에 필자 역시 동감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름 모를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면 이제는 그 시선을 거두어야 한다.』
“이 글 읽고 나 역시 폭력의 가해자가 된 적은 없었나 생각하게 됐어요.”
“나도 그으래.”
공감의 표시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과 결혼할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며 왔다.
“결혼하면 나, 한테도 청, 청첩장 줘, 꼬옥.”
“결혼?”
스무 살의 그녀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누가 나 결혼한대요?”
“찬호, 가.”
“완성된 문장으로 답해 줄래요?”
“찬호가, 너 결혼, 한다고 말해줬어.”
만족스러운 듯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오늘 치료는 여기까지 할게요. 이건 병실 올라가서 연습해올 자료에요. 연습 안 해오면 태희한테 바로 이를 거예요. 알죠?”
그녀의 으름장이 어쩐지 낯설었다. 대답을 피하고 싶은 걸까. 나는 말없이 휠체어 바퀴를 돌렸다.
***
“이젠, 오지 마.”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국 후 매일 아침마다 민영이 병실을 찾고 있었다.
“이러지 마. 설마 나한테 두 번이나 상처 줄 셈이야?”
“돌아, 가. 독일로 다시, 돌아가.”
“너랑 같이 가려고 온 거잖아. 아버님하고도 이미 얘기 됐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없는 끈이 그녀에게는 있었나 보다. 민영은 언제부터 아버지와 연락하고 지낸 걸까.
“우리 아빠한테 그러시더래. 누군가 네 옆에 있어줘야 한다구. 이번만큼은 꼭 그래야 한다구.”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누군가’가 왜 아버지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지 말이다.
“나도 이런 식으로 귀국하게 될 줄은 몰랐어. 다신 안 돌아올 생각이었거든.”
“다시, 돌아가, 제발.”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뭘?”
“여경 씨도 그러던데? 네 옆에 내가 있으면 안심이 될 거라구.”
“여경, 만났어?”
민영과 만난 여경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마비된 오른쪽 등이 시큰해져왔다.
“나랑 같이 독일 가서 재활 치료도 하고 공부도 하면 좋잖아. 너한테 여긴 너무 복잡한 곳이야.”
“그, 그럴 생각, 전혀 없어.”
“한국 있는 동안 매일 올 거야. 이번엔 나도 그냥 포기하진 않겠다구. 결국 너도 결심할 거라 믿어.”
화가 난 듯 홱 돌아선 그녀가 병실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녀의 마음은 나에 대한 이기적인 연민일까, 사랑일까. 나의 고유성을 무시한 폭력일까, 사랑일까. 새삼 궁금해졌다.
***
“오빠,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좋지?”
태희가 휠체어를 끌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여름의 끝자락도 기울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은 어김없이 올 테지만 지나간 계절이 쉬이 잊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병원 앞 산책로에는 제법 많은 환자들이 나와 있었다. 가족들과 두런두런 시간을 보내는 이들, 창백한 얼굴로 햇살을 쬐는 이들…… 환자복을 입은 이들에게선 좀처럼 미소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도 저들만큼이나 병약한 몸짓을 하고 있을까.
“어, 저기 여경 언니네.”
태희가 가리킨 쪽은 건너편 산책로의 벤치였다. 흰 가운을 입은 여경과 한 남자.
“곧 결혼한다더니 저 남잔가 보네.”
태희가 씁쓸한 듯 말했다.
“오빠, 나 정말 이기적인 거 있지. 여경 언니가 아직 결혼 안 했단 말 듣고 은근히 기대했었나봐. 약혼자 있다니까 기분이 별로인 거 있지? 아쉬운 건지 실망스러운 건지 잘 모르겠어.”
“이기적이네.”
“그렇지? 여경 언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늦여름의 햇살을 등지고 앉은 여경과 남자는 더없이 다정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가끔씩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곤 했다. 봄바람에 흩날리던 그녀의 머리칼이 생생히 느껴졌다. 스무 살의 그녀는 그렇게 내게로 왔었다. 머리칼을 흩날리면서, 봄바람처럼 일렁이면서.
“오빠, 이젠 여경 언니한테 전혀 미련 없어?”
“…….”
“하긴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녀에게 속죄할 기회도, 회한을 추스를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렀다. 기다려주지 않는 건 시간뿐이 아니리라. 서로를 향하던 우리의 마음도 더 이상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좀 더 일찍 만나볼 생각은 안 했어?”
“응.”
“왜?”
“변명할 길이, 없어서.”
여경과 남자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나와 태희를 발견하고는 그녀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남자와 몇 마디 주고받던 그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와 함께 나란히.
나는 휠체어 바퀴 위에 손을 얹었다. 어서 휠체어를 움직여야 해. 허둥대는 내 모습이 수치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