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과 4월은 집회보다 강연회나 토론회, 인권영화제 중심으로 기획하면 좋겠어요. 무겁고 부담되는 행사는 신입생이나 복학생이 접근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개강 이후 하루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회의가 소집되었다. 대외적으로도 어지러운 시기였다. 한총련 주도 시위에 대한 정부의 강도 높은 진압이 연일 계속되었다. 문민정부가 임기 말에 이르면서 부패의 실체들이 속속 드러나는 한편 노동계의 총파업도 예고되어 있었다.
“지난번 신영복 선생님 강연회 때 예상 외로 신입생의 호응이 좋았잖아요. 차후에는 신입생만을 위한 행사도 별도로 추진했으면 합니다. 내일 회의 때 각자 구체안을 얘기해보는 걸로 하죠.”
어두운 객석에서 홍조를 띤 채 서있던 여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배, 뭐가 그리 좋아요? 혼자 실실 웃네.”
“형, 연애하는 거 아냐?”
민정과 병국의 놀림에 콧등이 흥건해졌다. 마음을 들킬 새라 흘러내린 안경을 황급히 치켜 올렸다.
“내가 말 안 했나? 우리한테 연애는 사치야!”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요.”
숙취로 괴로워하던 명우도 관심을 보였다. 총학생회 선거 당시 ‘태사모(태영을 사랑하는 여학우 모임)’를 몰고 다니며 여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나였지만, 연애에는 통 관심이 없다는 걸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뭘 어쨌길래?”
“요즘 회의 때마다 혼자 실실 웃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에요. 그리구 경식이 선배한테 들었는데 형이 어떤 여자랑 서점엘 왔었다며?”
명우는 경식의 정외과 후배로 그 역시 ‘북두칠성’ 서점의 골수 단골이었다.
“그, 그앤 그냥 우리 과 후배야.”
“책 선물까지 하구?”
“후배한테 책도 못 사주냐? 에이, 경식이 형 정말 안 되겠네. 사생활 보호가 안 되네.”
“형이 여자 후배한테 책 사주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명우의 시답잖은 장난에 내가 왜 이리 긴장하는 걸까.
“그거야 친하게 지내는 여자 후배가 없어서 그랬지.”
“그 후밴 친하단 뜻이네?”
그의 입꼬리가 양옆으로 헤벌쭉 벌어졌다. 나는 주섬주섬 회의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서 명우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태영이 형!”
학생회관 앞 ‘청년’ 광장을 가로지르는데 어딘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영이 형! 여기예요.”
벤치 위에서 여경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봄바람에 사정없이 흩날렸다. 뒤엉킨 머리칼 사이로 투명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봄 햇살만큼이나 눈부셨다.
“수업 없어?”
“있어요.”
“왜 안 들어갔어?”
“햇살이 너무 좋아서요.”
봄 햇살을 빨아들일 것처럼 그녀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햇살이 좋아서’라는 변명에 신빙성을 더하려는 듯.
“임마, 햇살 좋다고 수업 빠지면 언제 공부하냐?”
“그러는 형은 과에서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던데 대체 언제 공부하세요?”
“그러게. 너무 바빠서 수업 들을 시간이 없네.”
그녀가 활짝 웃었다. 강한 동지애라도 느끼는 듯 흡족한 표정이었다. 앙증맞게 팬 보조개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스무 살의 풋풋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 주었다.
“우리 영화 보러 갈래?”
나의 느닷없는 제안에 그녀가 당황하진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놀라는 기색조차 없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장 대학로의 예술전용 극장으로 향했다. 고심 끝에 선택한 영화는 ‘베를린 천사의 시’.
“신입생 때 선배들이랑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봤거든.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오늘에야 보게 되네.”
“와우, 너무 기대돼요.”
영화를 보면서 4년 전 그때와 같은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닿을 듯 말 듯한 한쪽 무릎,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스크린에 집중하는 그녀의 옆모습 때문에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 정말 미안한데요.”
“뭐가?”
“영화의 반도 이해를 못 했어요.”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이야기 구조가 두 개여서 좀 복잡하긴 하지.”
“메시지도 너무 철학적인 거 같아요. 영화 보고 나서 이런 무거운 기분은 처음이에요.”
“인간의 모습이 천사에 가장 가까운 때가 언제인 줄 알아? 바로 어린 시절이야. 영화에선 아마 그런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거 같아.”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변해가는 것에 대해 뭔가 한탄하는 느낌도 있구요.”
“맞아. 제대로 이해했네.”
“형, 영화 보고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져도 되는 거예요?”
“편식하면 건강에 안 좋은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너무 헐리웃 영화에만 익숙해져서 그래. 가끔 이런 영화도 봐주면 균형이 맞지 않을까?”
밖은 어느새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산책하는 이들만큼 비둘기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비둘기 떼를 쫒으며 깔깔거렸다. 영화관에서 긴장했던 내 마음도 일시에 평온해졌다.
***
『드라마 작가 임윤미, 유명 패션 디자이너 손 모 씨와 세 번째 결혼.』
조간신문을 훑어보다 한 줄의 제목에 시선이 멎었다. 기승전결조차 없는 한 줄의 토막 기사는 어머니의 세 번째 결혼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아들인 나보다 언론이 먼저 알고 있는 어머니의 결혼. 어이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신문을 접은 채 마시던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희의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오빠. 소식 들었겠지? 으음…… 기분 참 그렇다.』
그녀의 한숨소리도 고스란히 녹음되어 있었다. 태희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태희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 다시 말해 그녀는 나의 이복동생이자 유일한 형제였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나의 두 번째 양부는 아버지의 죽마고우였다. 그래서일까. 어머니가 택한 두 번째 결혼은 가족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해외로 떠도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것이 그의 친구를 남편으로 맞은 이유였을까. 나는 아직도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경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서점만한 곳이 없었다.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을 정화시켰다.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경식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찌이잉. 그가 계산대 옆에 놓인 미니 컴포넌트에 시디를 갈아 끼는 소리가 들렸다.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흘러나왔다.
“너 그 애 좋아하지?”
“누구?”
멜로디에 젖어들던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저번에 책 선물해준 여자 후배.”
“…….”
“그럴 줄 알았어.”
“괜찮을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그는 알 수 있을까.
“글쎄, 쉽진 않겠지.”
“아무래도 그렇, 겠지?”
“연애란 게 원래 세상만사 중에 제일 어려운 일이잖아. 더구나 우리 같은 상황에선 사치지.”
경식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8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결혼을 약속했던 그의 연인은 그런 경식을 끝까지 견뎌내지 못했다. ‘연애는 사치’라는 말의 연원을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경험이 일궈낸 소중한 교훈임에는 틀림없다.
“참 맑아 보이던데. 너 같은 늙수그레한 선배랑 사귀기엔 너무 아깝더라.”
그의 농담 섞인 한마디에도 웃을 수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던 그녀의 머리칼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침에 읽은 어머니의 결혼 기사도 생각났다. 수감 중인 서균의 지친 어깨도 그려졌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이 질문에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전쟁터’, 철학은 ‘무한한 변증법의 안개 속’, 사학은 ‘시간의 축적’이라 답했다고 한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전쟁터이자 안개 속. 나의 오늘이 축적되어야만 온전한 내가 완성되는 걸까.
무심히 눈길을 돌린 서가 한구석에 낯익은 시집이 꽂혀 있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집을 뽑아들었다. 경식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한 채 황급히 서점을 나왔다. 오늘도 그 벤치에 그녀가 앉아 있을까.
***
서균의 재판 날짜가 잡혔다. 어떻게든 그가 돌아와야 했다. 6년 전, 절망과 방황에서 허덕이던 내게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나에게 서균은 ‘돛’이나 다름없었다.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선 채 배의 항로를 밝혀주는 존재.
“잘 되겠죠?”
“시위 몇 번 주도한 걸로 치면 감옥 안 갈 사람이 어디 있겠어? 괜찮을 거야.”
“혹시 잘 안 될 경우도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작정 총학생회장 대행 체제로 갈 수만은 없잖아요.”
후배들을 안심시키면서도 내 가슴 한편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앞에 놓인 모든 일들을 감내할 수 있을까.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단 여기까지 하자. 민정이랑 명우는 다음 주 인권영화제 준비 잘 하구.”
시간은 어느덧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토요일의 청년 광장은 그 어느 때보다 휑했다. 또다시 떠오르는 그녀의 머리칼.
“형!”
분명 환청일 것이다. 토요일 밤 10시, 캠퍼스에 그녀가 있을 리 만무했다.
“태영이 형!”
이상했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믿을 수 없었다. 그곳에 여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 정말 형이네.”
“그럼 귀신인 줄 알았어?”
그녀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발그레했다. 밤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다음 주 입대하는 동기 환송회가 있었거든요. 동기 중 첫 번째 타자라 애들이 많이 모였더라구요.”
“그랬구나. 술 못 마신다면서 꽤 늘었나 보네.”
“2월보단 대여섯 배쯤 늘었을 걸요.”
그녀의 너스레에 후훗 웃음이 났다.
“통금시간 있다고 하지 않았어?”
“부모님은 학회 때문에 스웨덴 가셨어요. 일주일은 해방이에요, 해방.”
“해방인데 겨우 청년 광장 벤치 신세야?
“여기 앉아 있으면 혹시 형 볼 수 있을까 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슴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잠깐 눈 감아볼래?”
“네? 왜요?”
“눈을 감아야 바람을 잘 느끼지.”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고 밤하늘을 향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게 그녀의 머리칼인지 내 마음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 오른손은 어느새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있었다. 여경은 숨이 멎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