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 늦어!!”
리아는 들고 있던 베개를 벽을 향해 던졌다. 베개는 벽에 부딪히고는 곧 침대 위로 떨어졌다.
리아의 불만대로 마론들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바이올렛이 이상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네. 곧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이 될 텐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시각, 마론 등은 거리에서 한창 소란을 피우고 있는 참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리아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바보들이 어디서 뭘 하든지 상관없어! 중요한 것은 너무 늦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어디서 뭘 하고 있기 때문에 늦는 거잖아.”
바이올렛은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는 리아를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달랬다.
“후, 뭐, 이제 됐어. 바이올렛, 먼저 가서 짐 정리를 해둬.”
“응? 그래도 돼? 혼자서 마론과 만나도 괜찮은 거야?”
“트, 특별히 그 녀석을 본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걸. 더구나 혼자 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기야 하다만…….”
“더구나 저녁 식사 전까지 짐을 풀어두는 게 좋잖아? 마로니에들도 지금 당장 도착한다고 해도 짐을 풀고 나면 침대를 옮길 시간은 없겠지. 나중에 오면 돼, 나중에.”
“흐음, 어쨌든 와달라는 소리네.”
“…….”
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이올렛은 그런 리아의 모습이 굉장히 신선해 보였다.
“후후, 잘 알겠어. 그럼 최대한 빨리 짐 풀고 바로 올게.”
“어? 아, 안 그래도 돼. 천천히 짐 풀고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와도…….”
“남자 셋이면 이런 침대 옮기는 것쯤은 금방이야. 저녁 식사 시간에 딱 맞추거나 넘겨서 오지 않는 한은 힘쓰는 일은 미리 해두려고 할걸?”
“그, 그런거야?”
“그런 거야.”
바이올렛은 위로 오빠가 셋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에 대한 거라면 남자 형제가 없는 리아보다 바이올렛 쪽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아는 바이올렛이 마음 써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나중에 와줘. 아,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어. 마로니에 등도 금방 올 것 같지 않고 말이야.”
“응, 알았어.”
바이올렛은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고 나가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리아 쪽을 바라봤다.
바이올렛의 재미있어 죽겠다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리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뭐, 뭐야?”
“으응, 단지 아까부터 제라늄과 디옴은 싹 무시하고 내내 마론의 이름만 들먹거린다 싶어서…….”
놀린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리아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 얼른 짐 정리나 하러 가!”
“네~”
바이올렛은 크게 웃으며 얼른 나가 버렸다.
“하아아아!”
바이올렛이 나가고 난 뒤 리아는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손을 뻗쳐 아까 던진 베개를 끌어와서 가슴에 꼭 안았다.
“신분 차이? 나 원 참, 다들 이상한 데 신경을 쓰는구나.”
‘그게 마로니에한테는 이상한 일이구나.’
“그래, 이상하잖아.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어째서 신분 차이에 신경을 써야 되는 거야?”
‘그렇지.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그런 이상한 일이 당연한 곳이 귀족 사회라는 곳이래.’
“뭐, 열심히 해라 정도겠지.”
제라늄은 거기까지가 마론의 한계라고 말했지만 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생각하며 리아는 안고 있던 베개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렇게 중얼거리는 리아의 얼굴은 귓불까지 빨개졌다. 아마도 지금 이 모습을 바이올렛이 봤다면 ‘꺄아! 너무 귀여워!’라고 탄성을 질렀으리라.
그리고 아주 잠깐 깜빡 잠이 들었다.
옅은 잠에 빠진 리아는 들었다.
[가문의 수치다!]
리아는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식은 필요 없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오늘부터 정식 후계자는…….]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해! 빼앗지 말아줘! 없애지 말아줘!
그것은! 그것은!
“시, 싫어!!”
리아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아! 하아! 하아!”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그런 꿈을…….”
기분이 나빴다.
“하아! 하아!”
얼마나 잔 것일까? 어느새 해가 졌는지 방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리아는 간신히 진정하고, 방구석에 세워진 마법 구슬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마법 구슬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밝아졌다. 리아는 방구석마다 세워진 마법 구슬 전부를 빛나게 했다.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지자 그제야 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그곳이 아니야. 여기는 기숙사 방이야. 후우.’
진정이 된 리아는 싸늘한 감각을 느꼈다.
흘러내린 식은땀에 속옷까지 흠뻑 젖어서 몸이 차가워진 것이다.
“춥고 기분 나빠.”
어린애 같은 말투고 투덜거리며 리아는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옆에 구비된 바구니에 옷을 벗어 던져 넣으며 리아는 무언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였지?’
하지만 마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물을 머리부터 끼얹자 무언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후아! 기분 좋아~”
리아는 몇 번 더 물을 몸에 끼얹어서 땀을 씻어냈다.
기숙사 방에 딸린 욕실에는 기본적으로 마법 물통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마법으로 겨울에는 늘 따뜻하게, 여름에는 적당하게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는 이 물건은 먼 옛날 위대한 마법사라 불리던 마법사의 작품으로 지금은 중산층의 일반인에게도 널리 보급된 편리한 물건이다.
타월에 비누를 묻혀 몸을 닦는 리아는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기분 나쁜 꿈을 꾼 직후인데도 어쩐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평소 그런 꿈을 꾸었다면 온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있으리라.
다시 한 번 리아는 무언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뭐였지?’
몸에 물을 끼얹어서 비누를 씻어내고 리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노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응?”
리아는 커다란 타월로 몸을 감싸고 욕실 밖으로 나와서 문 쪽을 쳐다봤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너무 작아서 노크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리아가 다시 욕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으며 리아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 아까는 고민을 하느라 노크 소리를 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바이올렛이 오기로 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누구? 바이올렛이니?”
리아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이 기숙사에서 아는 사람은 바이올렛뿐이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가문 때문에 자신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뿐. 그래서 리아는 자신의 방에 바이올렛 이외에 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와.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난 이제 막 샤워를 마…….”
리아는 웃으면서 바이올렛을 쳐다봤다. 그러나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바이올렛이 아니었다.
“헉!”
리아의 방문 앞에 서 있던 마론이 헛바람을 삼키며 눈을 크게 뜨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어… 라?’
지금 앞에 있는 건 누구?
어째서 바이올렛이 자기 방에 오겠다고 했더라?
아, 그러고 보니 나 혼자 자는데 침대가 두 개.
누군가에게 침대를 줘야 한다고…….
바이올렛이 웃으면서 날 놀렸었지.
날 놀리던 주제가 뭐였더라?
아니, 애초에 바이올렛이 날 놀렸던 이유가…….
열심히 하라고 말해줬던 남자가 있었지.
아침에 그 남자에게 팬티도 보였고.
샤스타 선생님은 화내면 엄청나게 무서웠어.
사사건건 거슬렸지만 그래도 듣고 싶은 말을 해줬던 남자.
온갖 생각과 기억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리아의 뇌를 휘저었다. 그러나 곧바로 모든 생각과 기억이 사라졌다.
리아의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가 돼버렸다. 더 이상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문을 열던 모습 그대로, 미소 짓던 표정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마론은 한 번 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수건으로 틀어 올린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홍조를 띤 볼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마론의 시선은 무심코 그 물방울의 궤적은 쫓아갔다. 천천히…….
물방울은 머리카락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목덜미를 지나 쇄골을 거쳐 지금 리아의 몸을 가린 한 장의 타월로 흡수됐다.
타월은 물을 많이 흡수해서인지 리아의 몸에 딱 붙어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몸을 닦지 않고 바로 문을 연 것 같다.
타월 위로 강조된 가슴은 옷 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덕분에 가슴을 완전히 가리지 못해 가슴 계곡이 마론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걸 벗으면 의외로 섹시 다이너마이트라고 하던가? 물론 마론이 그것까지 알 리는 없다. 그저 마론은 ‘굉장히 크다’라고 원초적인(?) 감상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허리는 한 손으로도 안을 수 있을 만큼 가늘었고, 큰 가슴에 비해서 엉덩이는 비교적 무난한 크기였다.
그리고 수건 아래로 쭉 뻗은 새하얀 허벅지가 눈이 부셨다. 양말과 신발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가느다란 다리와 작은 발이 앙증맞아 보인다.
그렇게 아래쪽까지 내려가서 모든 감상을 마친 마론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복습을 시작했다.
자라는 청소년에게 복습이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볼 것 다 봐놓고도 마론은 여전히 지금의 상황을 못 믿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얼굴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본 충격이 뇌의 허용량을 넘어서서 머릿속이 완벽히 백지 상태였다.
하지만 마론과 다시 한 번 시선을 마주친 리아는 서서히 제정신을 차렸고, 왜 마론이 자기 방 앞에 서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생각났다.
침대를 가지러 온 것이다. 그리고 혼자서 마론을 만나는 게 껄끄러워서 바이올렛에게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선잠을 자다 악몽을 꾸고, 그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가 지금 막 생각난 것이다.
더불어 지금 자신이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지 간신히 생각해 냈다.
리아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아니, 온몸이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 모습이 또 묘하게 섹시한 것이…….
라는 생각을 마론이 할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꺄!”
리아의 눈망울에 투명한 물기가 어리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고, 입술이 열리고 비명의 전주곡이 될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론은 급히 한 발짝 더 물러나며 손을 저었다.
“저기! 잠깐!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사고야! 알지? 사고라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러니까 조금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줘! 대화를 하자! 대화를 하면 틀림없이…….”
“꺄악아아아아아아아아아!”
교섭이 결렬됨을 알리는 리아의 비명 소리가 기숙사를 뒤흔들었다.
[소년은 여자 기숙사에 들어갔다 4]
“자, 잠깐, 리아트리스! 조용히 좀 해줘! 안 그러면 큰일 난다고!!”
“꺄악! 꺄악! 가까이 오지 마! 변태!”
“가까이 안 갔어! 그리고 난 변태가 아니야!”
“당장 저리 꺼져!!”
크게 소리를 지르며 리아는 왼손을 들어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에 입을 맞추고는 마론을 향해서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엄청난 바람이 리아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어, 어라? 어라? 으, 으아아악!”
이번에는 마론이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속도의 바람에 마론의 옷과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아니,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마론은 바람에 날려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곧 복도 난간에 몸이 걸렸다.
“어, 어, 어떻게 이런…….”
마론은 손으로 얼굴을 막고 리아를 쳐다봤다. 이 마법은 상급계 바람 마법 같았다. 방금 그걸 리아는 아무런 영창도 시도하지 않고 사용했다.
그리고 그전에 리아가 했던 처음 보는 행위, 그것은…….
“스, 스크롤 마법인가?”
스크롤 마법. 보석이나 촉매가 되는 마법 아이템에 마법을 넣어두고 특정한 행동으로 넣어둔 마법을 단숨에 방출하는 상급 마법이다.
이렇게 만든 마법은 긴 주문 영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사용되는 보석이나 촉매용 마법 아이템이 굉장히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그중 말 그대로 일반적인 스크롤을 사용한 마법은 1회용이라는 단점까지 있다. 그러나 보석은 달랐다.
보석의 종류와 순도, 그리고 강도에 따라 여러 개의 마법을 중복으로 넣어둘 수 있다.
물론 그런 보석은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된다.
‘과연 부자는 다르구나.’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꺄악! 꺄악 저리 가! 저리 가아!!”
리아는 거의 패닉 상태로 바람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했다. 마론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복도 난간에서 우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