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하는 아이신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는지 가방을 달라는 듯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신이 말했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해.”
아수하가 곧바로 두 손을 내밀었다.
아이신이 가방을 넘긴 걸 받아 들자마자 아수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헉! 진짜네?”
“어? 저길 봐. 저기에도 똑같은 가방이 하나 더 있어.”
아이신이 박토가 트렁크에서 꺼내 차 뒷바퀴 펜더 옆으로 기대 놓은 배낭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김탄이 촐랑대며 그곳으로 가 배낭을 들었다.
“이것도 똑같이 무거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듯 김탄이 소리치자 아이신이 김탄 옆으로 다가와 배낭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그가 아주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것도 되게 무거워. 김탄 말이 맞아.”
아이신의 말에 아수하가 아이신 옆으로 다가와 배낭을 받아 들고는 소리쳤다.
“우와! 진짜네?”
“이것들이 진짜!!!”
박토가 갑자기 버럭 소리치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지금 박토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왜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냐?’
뭐 이런 표정이었다.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박토를 보고 있는 오운족에게 박토가 마당 끝에서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는 코피를 가리켰다.
“코피 씨 안 보여? 일이 없으면 찾아서 하던지.
너희 오운족은 대체 가방이 무거운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성가시게 여기 붙어서 시끄럽게 구는 거지?”
박토의 말에 아이신은 마당 끝에서 마당을 쓸고 있는 코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찾아 하고 있는 코피.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순간 그 의미를 파악한 아이신이 기가 죽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쓸모없게 굴어서 미안해. 단지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그랬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박토의 말투에는 이상하게 독기가 서려 있었다.
조금 더 그를 건드렸다간 쫓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궁금했던 아이신은 똥인지 알면서도 찍었다.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지?”
박토는 대답대신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던 아이신은 그저 주눅이 들어 눈알만 굴려댔다.
그때 갑자기 아수하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왜 말을 안 해주지? 궁금해. 정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그순간 아이신의 얼굴이 똥 밟은 얼굴이 되었다.
조만간 박토의 입에서 꺼지라는 소리가 나올 차례였기 때문이다.
그가 슬쩍 박토의 눈치를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주먹 만한 고구마를 통째로 삼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던 박토가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위로 들어올렸다.
-쫓아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를 심산인가 보다.-
우선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 아이신은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그의 주먹 사정권에서 슬며시 벗어났다.
이내 안도한 아이신은 그가 한 짓이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박토의 주먹은 오운족이 아닌 그의 가슴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턱. 턱. 턱.
박토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쳐대며 20년 간 이유 없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보다 더 한 맺힌 듯 중얼거렸다.
“으이그. 내 팔자야.”
50대 아줌마나 할 법한 말이 박토의 입에서 쏟아지자 이게 더 무서웠던 오운족.
그저 다시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는 듯 서로 입을 다문 체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드디어 주먹으로 가슴을 쳐 얹힌 심리적 고구마가 내려 갔는지 박토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궁금해하지도 마. 제발.
너희들은 여기서 꼼짝 말고 월을 돌보고 있어.
너희들 내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한다고 했었지?”
노예계약 또 노비 문서를 가졌던 한민족 선조들의 마음이 절실히 공감되는 오운족.
그저 박토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수긍하겠다는 듯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힘없이 중얼댔다.
“시키는 대로 할 게.”
-자, 이로써 더 이상 오운족이 성가시게 할 일은 없다.
걱정거리가 사라진 박토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그런데 가지 나무 많은 나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듯 이번에는 김탄이 그를 성가시게 했다.
“그런데 저렇게 무거운 걸 왜 트렁크에 싣지 않고 차 뒷좌석에 싣는 거지?”
박토는 지금 이순간 그가 월의 양육을 한 게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5살, 6살, 7살, 아이들은 입에서 끝도 없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같이 있으면 뇌가 마비되거나 붕괴되는 느낌까지 드는 영유아의 양육.
박토는 이 모든 걸 극복했다.
즉 양육 유경험자인 그는 이제 겨우 29살이지만 인내심 만렙이란 소리다.
아이신과 아수하의 질문은 남의 새끼가 하는 질문이라 신경을 자극시켰지만,
김탄의 질문은 왠지 내새끼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즉각 인내심이 발휘된 박토는 그의 아이에게 대하듯 친절하게 답을 했다.
“너에게 사용법을 설명하려고. 그건 이동할 때 설명해줄 게. 그러니까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
“뭔데 사용법이 있어? 설마 폭탄이야?”
지금 이 말은 김탄이 아니라 아수하가 한 말이었다.
김탄은 아수하의 말에 얼굴색이 사색이 되었고 박토는 듣기 싫은 오운족의 질문에 머리가 아픈 듯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김탄의 얼굴이 사색이 된 이유는 폭탄이란 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가방에 폭탄이 들어 있을까 온 신경이 그곳에 가 있었다.
한편 아이신은 아수하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정말 눈치 없는 그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던 박토의 명령을 어떻게 5분도 안 돼서 까먹을 수 있는지..
그도 그녀가 그의 쌍둥이 여동생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아수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수하야. 우리는 지금 바룬족 노비라는 걸 잊지 마.”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아수하.
부잣집에서 곱게 만 자라 납의 집 종살이에는 서툴렀다.
나름 노비란 주인에게 겉 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주제 넘게 질문을 했으니..
그저 그녀는 선처를 바라는 듯 박토를 쳐다보며 애절하게 웃어 본다.
그런 그들에게 박토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한 마디도 하지 마. 아수하. 아이신.”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신과 아수하.
박토가 그런 그들에게 손으로 배낭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무언인지 알 거 없어.
너희들은 알앤디 센터가 가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오지랖을 떨고 촐랑대며 얼쩡거리는 거지?
너희들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아수하 네 생각대로 이건 폭탄은 아니야.”
박토의 말에 사색이 된 김탄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심했는지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이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박토가 트렁크에 나머지 짐을 마저 싣고는 김탄에게 다시 말을 했다.
“자, 빨리 타. 이제 출발할 거니까.”
김탄과 박토가 차에 올라타자 마당 끝에서 마당을 쓰고 있던 코피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김탄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탄아!”
박토가 차에 시동을 걸자 김탄이 박토에게 부탁했다.
“잠깐 기다려. 형. 코피 형이 오고 있으니까.”
“시동만 건 거야.”
거짓말이었다.
시간이 지체될까 봐 코피를 무시하고 출발하려고 했지만, 지금 무산이 되어 버려 박토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빨리 출발해야 되는데 인간들이 자꾸 발목을 잡아댄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출발하면 김탄은 가는 내내 지랄을 해댈 것이다.
일단 조금만 참자.-
김탄에게 도착한 코피는 숨을 헐떡이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김탄에게 건넸다.
정체 모를 물건을 받아 든 김탄이 물어 봤다.
“이게 뭐야? 코피 형.”
“한 번 써 봐. 모잔데 내가 아끼는 거야. 여름에는 따가운 햇빛을 막아주고 겨울엔 찬 바람을 막아주지. 내가 한국에서 산 최애템이야.”
김탄이 손에 들린 모자를 펼쳤다.
비니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김탄이 그 비니를 머리에 쓰자 코피가 말했다.
“더 내려써야 해.”
김탄이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내려쓰며 물었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
코피가 손수 모자 끝을 잡아당겨 김탄의 턱 아래를 지나 목까지 내렸다.
순간 박토와 아이신 그리고 아수하는 할 말을 잃은 체 코피를 쳐다보았다.
그때 김탄이 당황해 말을 뱉었다.
“형. 이거 은행 강도들이 쓰는 복면이잖아.
“맞아. 그건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고 난 달라.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엔 너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아 주는 거야.
누군가 네 얼굴을 알아보면 안 되니까.”
김탄이 두 눈만 구멍이 뚫린 목까지 가려주는 검은색 복면을 쓴 얼굴로 박토를 돌아보았다.
그때 아이신과 아수하가 키득거렸다.
박토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복면을 쓴 김탄을 쳐다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코피에게 입을 열었다.
“코피 씨의 쓰임의 다름에 대한 철학이 무언인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김탄이 쓰고 있는 복면은 지금 이 상황에서 보편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눈에 더 띌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정말 송구하군요. 어두운 밤이라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자신의 배려가 통하지 않아 시무룩해진 코피가 고개를 떨구자, 박토가 김탄에게 재촉했다.
“벗어.”
“싫은데? 나 이거 쓸래. 대박이야. 코피 형 말이 맞을지도 몰라. 밤이라 쓰고 있으면 더 유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벗으라고 당장!”
박토가 성질이 난 듯 소리치자 김탄이 당황하며 투덜거렸다.
“왜? 내가 좋다는 데 왜 벗으라고 하지?”
순간 박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오오라를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벗으라면 벗으라고.”
-쳇. 예민하네.
난 좋은데..-
김탄은 기분이 상했다.
아쉬운 듯 복면을 벗고 코피에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형. 하지만 쓰지 못할 거 같아. 복면에 예민한 사람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