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수, 아침부터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이수 곁에는 자칭 영원한 흑기사 '하태오'가 이런 어려움에 대비해 항시 대기 중이 아닌가?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뗀다.
"이사님. 늘찬은 학교 잘 갔나요?"
"하늘찬? 등교 잘했지. 오늘은 글쎄.. 아빠 없이 혼자 학교 간다고 고집을 부려서.. 교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내려줬더니 신나게 뛰어가더라고.."
그래서 아까 늘찬이 혼자 교문으로 뛰어 들어왔구나.
아이는 파란색 우산을 쓴 채 오르막길을 달려가다 앞서가던 시아와 태준이와 마주쳐 반갑게 인사하곤 나란히 걸어갔다.
작은 어깨에 기댄 알록달록한 우산을 빙그르 돌리며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던 아이들.
"어제 집에 잘 들어갔지?"
"네, 덕분에..(잘 놀고 잘 돌아왔답니다.)"
이수의 때 이른 연락이 몹시 반가웠는지 쉴 새 없이 말을 잇는 태오. 그는 아마도 집에 홀로 있는 듯하다.
"간밤에 비가 어찌나 퍼붓든지.. 아까 차 몰고 집에 오는데 동네 마트 앞 하수도가 역류했는지 콸콸 넘치더라고.."
하수도? 역류? 넘쳤다고? 이수는 애초에 태오에게 전화한 이유를 떠올리고는 물난리가 난 거실 발코니로 걸음을 옮긴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창턱을 넘을 듯 찰랑대는 물을 보고는 결심한 듯 말문을 연다.
"하 이사님. 오전에 쉬는 중에 죄송한데요.. 주위에 도움 청할 데가 없어서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지난밤 내린 폭우로 인해 물이 넘친 집안 상황을 전하는데..
"사실 어제 꿈자리에 당신이 얼핏 나왔는데.. 표정이 안 좋더라고.. 무슨 일 생겼나 했는데.."
"꾸, 꿈에 제가 나왔어요?"
"당신이 두 손으로 내 멱살을 그러잡고는 뭐라고 외치는데..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네.
그리고 이런 일 생기면 언제든 날 부르라고. 필요한 공구 챙겨서 갈 테니 10분만 기다려."
"네, 고마워요. 이사님."
"고맙긴, 뭘.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면서 사는 거지."
통화가 끊어지고, 10여 분 후.. 홀로 남은 이수의 조용한 집을 요란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
(무슨 10분 출동 대기조도 아니고..)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현관문을 열어 주는 그녀의 눈에 훤칠한 키의 사내가 눈에 들어오고..
"이제 비가 좀 그치는 거 같네."
단정히 빗어 올린 짧은 머리칼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내며 현관으로 들어서는 하태오.
얼룩덜룩한 워싱이 들어간 타이트한 스트레이트 진을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골반 아래.. 벨트 없이 비스듬히 걸치고,
빳빳한 재질의 푸른 셔츠 밑단을 깔끔하게 허리춤에 접어 넣었다.
덕분에 터프한 하체 운동으로 다져진, 어느 한 쪽의 처짐 없이 절묘한 균형을 이룬 두 볼기짝이 도드라져 보인다.
셔츠의 소맷부리를 두세 번 바짝 말아 올려, 터질 것처럼 비어져 나온 굵은 팔뚝과 불룩하게 솟아오른 이두박근이 이수의 시선을 끈다.
(영락없는.. 사, 상남자 아니.. '배관공'으로 변신한 이사님이라니..)
옆집에 홀로 사는 여자의 꽉 막힌 파이프를 손 보러 온 배관공이라는 야릇한 상상이 그녀의 두 볼을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게 하는데..
이수는 달뜬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그의 시선을 황급히 피한다.
"대체 어디가 말썽이야?"
"아, 이쪽이에요."
태오는 큼지막한 공구 상자를 들고, 다소 과감하게 파인 V 넥 라인의 연빨간색 린넨 원피스를 걸친 그녀의 뒤를 따른다.
"참나. 보기만 해도 심란하네."
밤새 내린 비가 그쳤음에도 발코니 바닥을 덮은 노란 장판 위를 가득 채운 물은 좀체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자세히 보니.. 저 파이프 틈에서 물이 솟아 나오더군요."
"그래? 아무래도 저 '우수관'이 막힌 거 같은데.."
그는 망설임 없이 양말을 벗어던지고 청바지 밑단을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는, 동그랗게 솟아오른 자신의 복숭아뼈 아래까지 차오르는 물속으로 첨벙 들어간다.
"100미리 PVC 관.. 이게 원래 잘 안 막히는데. 아파트 옥상에서 정원을 가꾸는 것도 아닐 테고.."
조심스럽게 아이보리빛이 감도는 파이프 하단을 두드려보고 쓰다듬어 보는데..
이수는 쭈그려 앉은 태오의 듬직한 등 뒤에서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본다.
"물이라도 드릴까요?"
"괜찮아. 작업 끝나고 마실게. 우수관 하단 밑둥을 이렇게 위로 들어 올리면.. 막혔는지 알 수 있거든."
태오는 두툼한 양 손으로 파이프 하단을 감싸 쥐고는 힘껏 밀어 올린다.
"꾸, 꿈쩍도 않네."
발 끝과 엉치에 힘을 주고는 다시 한번 '끄응' 하고 온 힘을 다해 보지만, 원통 모양의 우수관 하단부는 일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고 집에서 가져온 게 있지."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능숙한 배관공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구 상자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그것은 바로 수평 손잡이가 달린 5인치 원형 톱날이 장착된 핸드 그라인더였다.
"멋지네요. 이사님."
"이 정도는 가지고 다녀야 아마추어 배관공 흉내라도 내지. 폼도 나고 말이야."
이 시점에서 태오의 친조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그 꼿꼿한 노인네는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강남과 경기도 일대의 알짜배기 땅을 아우르는 거부가 되었다.
말년에 이른 그는 한적한 교외에 자리 잡은 자신의 별장을 찾은 어린 손자에게 사내 아이가 익혀야 할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를테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따뜻하게 해 줄 마른 장작을 날 선 도끼로 패고 다듬는 법이라든지.
문명과 동떨어진 야외에서 텐트를 세우고, 불을 피우며, 잭나이프를 이용해 음식을 마련하는 방법이라든가.
오늘처럼 사랑하는 여자의 집이 물난리가 났을 때, 그라인더와 같은 전동 공구를 다루는 유용한 기술 따위를 전수해 준 것이다.
"우리 같은 (상)남자는 말이다.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지 않게, 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지 않도록..
이런 '무기'들을 네 몸의 일부처럼 능숙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알았니, 태오야?"
강골의 노익장은 세월의 거센 흐름을 못 이기고 얼굴 곳곳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빈틈없이 치열을 메우던 튼튼한 치아 몇몇은 뿌리 채 흔들려 빠졌지만, 상대의 뒤통수를 꿰뚫는 듯한 송곳 같은 눈빛은 여전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미국 남부의 대도시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더라면, 어린 내 손에 전동 공구 대신 반자동 리볼버를 기꺼이 쥐어 주었으리라..)
[진정한 사내라면.. 사랑하는 여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힘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그녀를 수렁에서 구해내야 한다.]
[만약, 그녀의 신변을 위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주저 없이 그 놈의 뒤통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태오는 친가에 내려오는 암묵적인 신조를 되새기며 100%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선 그라인더의 바디와 손잡이를 단단히 휘어 잡는다.
빨간 스위치를 켜자 강력한 바이터보 모터가 동작하고, 3 단계로 높이자 디스크 톱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한다.
"자, 뒤로 물러서요. 잘못하면 날 튕겨나가서 사고 나거든. 흔히 킥백이라 부르는.."
이수는 그의 경고에 거실 창틀 안쪽으로 물러나 그라인더의 은빛 날이 맹렬히 회전하며 플라스틱 관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바라본다.
"위이이잉~ 끼이익 끽!"
우수관 하단부 30cm 위를 가로로 컷팅하는 톱날이 절반쯤 들어갔을까?
갑자기...
요란한 굉음을 내는 절단면 아래에서 '하악' 대는 날짐승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데..
태오는 즉시 그라인더를 파이프에서 멀리 떼고는 스위치를 내린다.
"뭐야? 정이수, 혹시 소리 들었어? 이 아래에 뭔가 있는데.."
그녀도 그 기척을 들었다. 고양이가 위협을 느꼈을 때 털을 곤두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하는 '하악질'
바로 그 소리였다!
"일단 조심히 마저 잘라낼까? 절단면 아래에 있어서 다치진 않을 거 같아. 이 좁은 우수관에 어쩌다 이 놈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발견한 이상 구해줘야지. 안 그래?"
그는 우수관 안에 갇힌 의문의 '생명체'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을 걸고는 3분의 1쯤 남은 커팅 작업을 계속한다.
남자의 두 손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생기자 태오는 핸드폰 플래시를 그 안에 비추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한껏 몸을 구부린 채 뻣뻣하게 긴장한 털 뭉치가 그의 두 손에 안겨 밖으로 나오는데..
"니아옹~!"
그 좁은 공간에 갇혀 옥상에서 쏟아지는 빗물에 잠기면서도 질긴 숨이 붙어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작은 울음을 내뱉는 고양이.
"넌 어쩌다 이 속에 들어갔니? 희한한 놈일세?"
그는 짙푸른 단모를 지닌 고양이의 양 어깻죽지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고는 밝게 빛나는 타원형의 두 눈동자를 마주 본다.
"이 놈 눈빛이 오묘한데.. 한쪽은 사파이어 같고.. 다른 쪽은.. 마치.."
태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몸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더니, 바닥으로 사뿐 착지한 '러시안 블루' 묘종의 야옹이는 이수의 발치로 천천히 다가온다.
"다, 다가오지 마. 난 고양이 싫어한다고.." 소스라치듯 기겁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사실 그녀가 모든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집 발코니의 우수관에서 난데없이 뛰쳐나온 '이 고양이'만 꺼려할 뿐..
그도 그럴 듯이.. 딸 시아의 꿈에 나타났다는 루시드의 깜짝 선물이 저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지난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 물을 마시는 중에 마주친, 이웃집 옥상에서 자신을 주시하던 눈동자의 주인이 이 고양이였을까?
종종 꿈에 나타나 자신을 스토킹하는 루시드의 발 밑을 어슬렁거리는 '그 괴물'도 저 놈과 흡사한 고양이였는데..
(하지만, 이 고양이는 퍼덕대는 날개도 없고, 기다란 꼬리에 날카로운 칼날도 달려있지 않잖아?)
곁으로 다가온 고양이는 흠뻑 젖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번갈아 휘감으며 부비댄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가까운 사이였던 것처럼..
"당신이 좋은가 보네. 보통 길고양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친근감을 표시하진 않는데.."
태오는 거실 한 켠에 놓인 마른 수건 두어 장을 가져오더니 밤새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 수난을 당했을 고양이의 오그라든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감싸준다.
"길냥이가 아닐 수도 있어요. 누군가 기르던 냥이일 수도 있죠."
그녀의 말이 옳다는 듯 작은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는 푸른 눈의 고양이.
"그럼 이 놈 때문에 당신 집에 물난리가 난 거야? 하마터면 그라인더로 컷팅하다가 유혈 사태 날 뻔했네. 완전 어이없군."
그는 이제야 누수의 원인을 찾았다는 듯.. 반은 허탈하고 나머지 반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바짝 솟구친 동그란 두 귀 사이를 쓰다듬는데.. 다시금 그의 품을 발버둥치며 뛰쳐나와 이수의 따스한 품으로 향하는 야옹이.
"어쨌든 저 놈이 옥상에서 여기까지 우수관을 타고 내려와 꽉 막아 버린 거죠. 그 바람에 빗물이 내려가지 못하고 여기 8층에서 넘쳐버린 거고.."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 아닌가? <세상에 저런 일이> 같은 TV 프로에 제보하면 당장 달려올 거 같은데.."
"어휴.. 제보라뇨? 이사님. 그냥 조용히 지낼래요. 이거 뒷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등골 빠지거든요."
그녀는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자신의 품에 꼭 안긴 그 고양이를 욕실로 데려가 따뜻한 물로 씻기고는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털을 말린다.
군데군데 털이 뭉쳐 동네 쓰레기 봉투를 샅샅이 뒤진 듯한 볼품없던 모습이 사라지고, 풍성한 진회색 속털이 보송보송 일어나며 러시안 블루 특유의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길거리에서 함부로 굴러 먹기엔 아까운 고양이네.. 넌 어쩌다 우리 집에 오게 된 거니? 이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을까?)
드라이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바람에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성가신 걸까? 눈가를 찌푸리며 한쪽 발을 들어 연신 발길질을 한다.
"정이수, 고양이에 정신 팔린 거야? 이거 마무리해야지?"
보송해진 고양이를 욕실 앞 매트에 내려놓고, 발코니로 다가가니 그는 잘라 낸 파이프 관을 다시금 절단면에 맞대고는 실리콘과 방수 테이프로 꼼꼼히 마감하고 있다.
"원래는 통으로 갈아야 되는데.. 일단 야매로 이렇게 해 놓고 두고 보자고. 아마 괜찮을 거야."
마침내 작업이 다 끝났는지 주섬주섬 실리콘 건이며 공구를 상자 안에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수는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는 그에게 컵에 담긴 찬물을 권한다.
"수고하셨어요, 이사님. 덕분에 우수관 누수도 해결하고..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당황했지만요."
"그러게. 보통 고양이가 아닌 거 같은데.. 여유가 되면 곁에 두고 길러보는 것도.."
그녀는 손을 가볍게 저어대며 그의 말을 끊는다.
"고양이가 알아서 선택하겠지요. 저희 집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들어온 놈이니.. 지 인연이 아니면 억지로 붙잡는다고, 없는 정 붙일 놈도 아니구요."
"하긴, 고양이는 개처럼 사람이 거둔다고 함부로 정 주고, 머무르는 동물은 아니거든.."
태오는 목이 말랐던 듯 냉수를 벌컥 들이켜고는 빈 컵을 건네주는데..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간 이수는 물기를 머금은 발코니 바닥이 얼음처럼 미끄러웠는지..
두 발이 '미끄덩' 공중을 헛돌더니 온 몸이 기우뚱하고 기울며, 순식간에 그녀의 시선이 동그란 천장 램프를 향해 뛰어오른다.
일촉즉발의 순간.. 대대로 내려온 친가의 신조 아니 가훈을 순발력 넘치는 리액션으로 보여주는 하태오.
재빨리 상체를 굽혀 바닥에 거꾸로 넘어지는 이수의 잘록한 허리를 한 팔로 든든히 받치고는 컵을 든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 아래를 지지한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여자를 추락의 위험에서 구해낸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살짝 벌린 입술 가까이..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가뜩이나 (후끈) 달아올랐는데.. 이거 난감하군."
- 34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