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의 식당에는 전원이 모이지 않아 꽉 차진 않았지만, 점심시간의 삭막했던 분위기는 없었다.
연호는 마침내 들어온 다휘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다휘야. 오늘은 편한 자리를 가지려고 이렇게 했어. 어서 와.”
연보라색의 무릎까지 닿는 길이의 단정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다휘는 연호가 뻗은 손을 잡았다.
연호는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휘를 천천히 이끌었다.
모두 가벼운 느낌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자켓까지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선우와 은국, 그리고 도담은 정장 베스트를 입고 있긴 했다.
다휘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차림이 연회 같다고 느꼈다.
사실은 추리닝 바지에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오려고 했는데, 은국에게서 온 메시지가 그녀를 살렸다.
「여은국 씨 : 사람 시켜서 옷 보냈으니, 그걸로 입고 오도록 해.」
그의 메시지와 동시에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자 조직에서 일하는 여자가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원피스를 들고 있었다.
순간 ‘이렇게 예쁜 옷을 입고 가는 거라고?’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와서는 후회되지 않았다.
식당 안은 기다란 테이블은 어디로 갔는지, 둥글고 커다란 테이블이 두 개 있었다.
각 테이블에는 의자가 4개씩 있었고, 연호와 다휘의 자리를 제외한 6개의 의자에는 모두 주인이 앉아있었다.
두 사람을 위한 테이블의 다른 두 자리에는 선우와 도담이 앉아 있었다.
다휘는 낮에 민환과 선우가 다퉜던 것을 떠올리며, 그것 때문에 따로 앉은 것이라고 멋대로 이해했다.
다른 테이블에는 민환과 은국, 그리고 아까 마주쳤던 기준과 호수가 있었다.
다휘는 연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착석했는데, 어쩐지 호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자리에 앉힌 연호는 자신은 앉지 않고, 다휘의 앞의 비어있는 와인글라스에 적색 와인을 천천히 따라주었다.
다휘의 잔에 붉은색 와인을 따라준 연호가 그녀에게 글라스를 들라며 손짓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던 다휘는 글라스의 스템을 잡고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연호는 자신의 와인 잔을 높이 들었다. 글라스를 들고 있지 않은 팔은 자신의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었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일단 기준이랑 호수는 다음 주 훈련 과정이 끝날 때까지는 암살부가 아니라, 8인의 안개와 다름없는 간부처럼 있어줘.” 연호가 말했다.
“예, 보스.”
그러자 호수와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가 대표인 듯 대답했다.
연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 출장 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다들 그간 일이 많아서 수고했다는 의미로 간단하게 준비했어. 술이랑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많이들 먹어.”
그리고 그가 잔을 더 치켜들자, 각 테이블의 모두가 잔을 맞추었다. 청아한 소리와 함께, 적색의 와인을 목뒤로 넘겼다.
자리에 앉은 연호가 다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틋한 연인을 보는 시선이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린 건 같은 테이블의 도담 밖에 없었다.
“다휘야. 많이 먹어.”
“네, 네. 오빠도 어서 드세요.”
다휘의 말에 연호는 기분이 좋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포크를 들고 큐브 모양으로 잘린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선우는 두 사람의 미묘한 분위기에 의문이 조금 들었다. 곧 그의 의문은 확신으로 변했다.
다휘는 연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의식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연호는 꾸준히 다휘의 모습을 지켜본다던가,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선우는 어제 다휘의 담당이 연호였던 것을 기억해내며,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
.
시간이 30분 정도 흐르자, 점점 취기가 오르는 듯 식당 안이 후끈거렸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량이 센 은국은 한쪽 벽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몇 개의 창문을 전부 열었다.
환기가 조금씩 되면서 얼굴이 붉어졌던 다휘를 포함한 몇 명은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열을 식히고 있었다.
“아. 다휘야. 기준이랑 호수하고는 인사했어? 저번에 암살부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이지? 그때도 제대로 인사 못 주고받았고.”
연호가 기준과 호수를 가리키며 다휘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두 사람과 다휘의 시선이 맞았으나, 가장 먼저 피한 건 기준이었다. 그러자 다휘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런 다휘의 표정에 연호는 다휘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하고,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었어··?”
그의 물음에 다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연호가 도담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담은 다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연호의 귓가에 작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 어어? 그래서?”
“ㄱ··ㅏ···어, ㄷ··· 지.”
도담의 간결한 설명에 연호가 고개를 휙 돌려 기준을 노려봤다. 그의 불같은 시선에 기준이 삐걱거리며 연호의 시선을 마주했다.
연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열렬하게 노려보고 있었고, 기준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오해가 눈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두 사람 -도담과 연호- 의 시선을 알아챈 은국과 민환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호수에게 작게 물었고, 호수에 의해서 기준은 다시 한 번 나쁜 놈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준은 그런 호수의 어깨를 붙잡으며 작지만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네가 여기서 내 편을 안 들면 어떻게 해!”
“제가 뭘요? 저는 사실을 말한 겁니다.”
“내가 언제 쟤 손을 세게 쳤어?!”
“사실 부정?”
“아니, 오해라니까!”
두 사람의 투닥거리는 대화가 점점 언성이 높아져 갔다.
어느새 기준은 혼자 흥분해서 호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저렇게 예쁜 애가 영화처럼 걸어와서 손 내미는데! 너 같으면 안 당황하겠냐?!”
그리고 식당 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었다.
모두가 기준을 보고 있었다.
기준은 아뿔싸,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쟤가 지금 뭐라 한 거냐?”
도담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기준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 가장 즐거운 건 호수인 듯 했다. 그에게 새로운 가십거리가 들어왔다.
* * *
“아니 술김에 그런 게 아니라, 남호수! 그 망할 놈이!”
“일은 이미 났는데, 수습할 생각하지 마.”
민환과 기준은 본부 내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한 캔씩 마시고 있었다.
이쪽 세계 -마피아들- 에서는 나이가 비슷해서 친해지는 경우는 거의 찾기 힘들다. 대부분 능력에 의한, 또는 이해관계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민환과 기준, 그리고 우목은 세 사람의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어쩌다 보니 같이 있는 상황이 많았다.
기준의 특출한 친화력과 우목의 눈치 없는 성격으로 친해진 세 사람은 자신들의 속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
민환은 기준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맥주 캔을 들어 보였다.
그의 행동에 기준은 씁쓸한 한숨을 내뱉으며 서로의 캔을 부딪혔다.
“진짜 좋아하는 거냐?” 민환이 물었다.
기준은 그의 물음에 뒤통수를 긁적이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기준이 식당에서 엄청난 발언을 한 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 식당 속에서 그를 구출한 건 민환이었다.
민환은 아무 말 없이 기준의 목덜미를 붙잡고 그를 질질 끌고 나왔고, 기준은 상황을 회피하긴 했지만 어쨌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를 데리고 나온 민환은 공원에 기준을 앉혀놓은 뒤, 어딘가로 사라지더니 다시 나타났을 때는 손에 맥주가 4캔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공원에서 30분째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저번에 너희가 암살부에 왔을 때. 넌 그때 못 왔지만, 나 새벽에 급하게 임무 나갔다가 배 찢어져서 왔었거든. 대충 치료하고 피곤해서 잤어. 그리고 오후에 일어났지. 본부 사람들이 온다는 게 생각나서 가봐야겠다고 하고 일어났는데, 건물 밖에서 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는 맥주를 더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쪽엔 여자 대원이 없잖아. 그래서 네 동생인가 싶다가도, 목소리가 좀 다른 것 같아서 궁금했지. 그리고 창문 밖을 봤는데··· 진짜. 너무 예뻤어. 모델 일 할 때 봤던 여자들보다 훨씬 예쁘더라.”
어느새 비운 맥주 캔을 테이블 위로 올려두며 기준이 벤치에 몸을 맡겼다.
민환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준이 불쌍하다기보다는 안쓰러웠다.
“··· 타이밍이 좋지 않았네. 걔는 지금 형님께서-”
“-그래. 알고 있어. 소문을 들었거든. 주간 현황 보고 때문에 여기에 들렀던 대원들이 그러더라. 본부에 온 여자랑 차연호랑 사귀는 거 아니냐고.”
기준은 아직 따지 않은 맥주 캔을 찾아 들었다. 그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새로운 캔을 열었다.
“그러다 아까 본부에 도착해서 마주쳤는데··. 아까, 말했듯이··. 진짜 천사가 걸어오는 줄 알았다. 나보고 상처는 괜찮았냐면서 묻는데, 손잡고 사랑의 도피 할 뻔했어.”
“풉, 푸핫··. 야.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은데.”
기준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다휘의 얼굴을 떠올리는 듯 말했다.
그의 말에 민환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자, 기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는 진심인 듯했다.
“어쨌든··· 들어 봐. 새끼야. 거기서 차연호 생각이 드니까, 화가 확 치밀어 오르더라고. 그래서 무심코 손 쳐냈지···.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호오··· 그랬었단 말이냐?”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난 도담이 -이 정도면 프로 방해꾼이다- 그들이 앉은 벤치 뒤에 서 있었다.
갑자기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민환과 기준이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맥주를 바닥으로 흘렸다.
민환은 테이블 위로 맥주를 올리고서 도담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했다.
“도, 도담 형님!”
“일과 시간이 아니니까, 대충 해. 백기준, 계속해 봐. 그래서 현다휘랑 사랑의 도피를 하시겠다고?”
도담이 기준을 내려다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말에 기준은 새로 뜯은 맥주라 많은 양을 흘려서, 축축이 젖은 손을 공중으로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면으로 마주하기는 했지만, 당당하지는 못한 기준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도담이 그들이 앉은 벤치의 반대편 벤치에 앉으며, 두 사람을 향해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재밌네. 현다휘, 인기 많네.”
“뭐, 뭐? 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도담이 마지막으로 남은 맥주 한 캔을 가져와 따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자 기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응했다.
그러자 도담이 킥킥거리며 그들을 향해 맥주 캔을 내밀었다. 민환과 기준은 마지못해 그에게 어울려주었다.
“그러게 말이다. 강우목은 현다휘랑 어릴 때 인연이 있던 모양이던데.” 도담이 말했다.
그는 그저께 오후에 다휘가 연호에게 안겨서 울고, 자신은 우목과 함께 담배를 같이 태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휘와 무슨 얘기를 했냐며 물어보다가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도담이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기준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같이 피아노 했다더라. 강우목은 농구하려고 피아노를 그만뒀고. 원래 어릴 때의 첫사랑을 재회했을 때, 스토리가 생기는 법 아니겠어?”
그의 말에 기준이 애꿎은 잔디를 발로 밟으며 중얼거렸다.
“별 파리 같은 게.” 그의 중얼거림에 민환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의 의미인지, 불쌍한 사람을 보는 마냥 민환의 표정을 본 기준은 자신이 놀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야! 그렇게 보지 마. 아직 안 끝났거든?” 기준이 그에게 반박하듯이 소리쳤지만, 도담은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끝났지. 연호는 진심이던데. 이번 돌아오는 주 내로 고백하지 않을까? 그리고 넌···. 오늘 공개 고백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뭐?!”
도담의 추측에 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내내 붉었지만, 이젠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반응에 도담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자신의 진심을 숨기고 있다는 것에 괜히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현 다휘’라는 여자에 대해 모두의 생각이 겹쳐지는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