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다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다휘가 앞에 있어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연호가 했던 말들은 그가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까 방에 데려다주시는데, 얼굴을 제대로 못 보겠더라고··.”
다휘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은호는 다휘의 반응을 보며 연호의 언행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이 연결되었다.
게다가 어제저녁, 식사 시간 전에 자신이 추측한 ‘다휘와 연호의 관계’가 틀리자 묘하게 안심하던 모습까지.
그녀의 직감이 뒤늦게 발동되었다.
그리고 다휘의 붉어진 얼굴까지.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이 그린 그림이었다.
은호는 다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은호야··?”
“그래서 넌 어떤데? 보스를, 아니 연호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은호가 다휘의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연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다면, 이제 다휘가 OK 사인만 한다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래··. 관심조차 없었다면, 이런 얘기를 고민이라고 하지는 않았겠지.’
여자에만 한해서 눈치 백단인 은호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녀의 확신이 사실로 드러나기 직전이었다.
“나는-”
“여기서 뭐들 하시나?”
그리고 은호는 또다시 -전날 저녁에 이어- 도담에게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은호와 다휘가 앉은 벤치의 뒤에 서 있는 도담이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다휘는 처음 보는 그의 편한 복장에 -항상 정장을 입은 모습만 봤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편하지도 않나?- 빠르게 그를 훑었다.
남색 트레이닝 바지에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땀을 조금 흘리고 있었다.
야외 훈련 장소에서 계속 들려오던 기합 소리가 멈춘 걸 보니, 쉬는 시간인 게 분명했다.
“아, 도담 님! 왜 요즘 자꾸 방해만 하세요?”
“무슨 소리야? 나는 애들이 정원에 예쁜 여자가 둘이나 있어서 부끄러우니까·· 훈련을 못 하겠다고 해서 온 건데.”
은호가 도담을 확 째려보며 쏘아붙였다가, 그의 살살 녹는 목소리와 말투에 얼굴이 붉어졌다.
칭찬이라고는 “그래.”, “알았다.” 정도가 최선인 그에게 듣는 외모에 대한 칭찬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인 줄 알았는데.
“뭐, 뭐예요! 그 멘트! 완전 구려. 그런 말들로 어떻게 여자들이 넘어갔대요?”
은호가 고개를 돌린 채 퉁명스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날카로운 눈매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굉장히 잘생긴 그의 외모는 조직 내에서 단연 톱이었다.
마피아라는 특성상, 조직에 여자의 비율이 굉장히 낮은데, 그중 도담과 ‘밤’을 보낸 여자가 반이 넘었으니···.
은호의 말에 도담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얼굴을 두고 번갈아보았다.
“서은호, 지금 약간 홀린 거 아닌가? 여은국이 알면 재밌겠는데.”
“아, 아니거든요! 웃겨, 정말!”
그의 말에 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다휘를 향해 말했다.
“다, 다휘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리고는 조금 서툰 걸음으로 빠르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다휘는 ‘도담이 은호를 퇴치한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면서도, ‘도담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마냥 과묵하고, 업무에 철저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면을 발견한 것 같아서 신기했다.
도담은 은호가 떠난 벤치에 앉았다.
그에게서 무거운 땀 냄새가 났지만, 다휘는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에 가벼운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젖혀 다휘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의 말에 곧바로 반응이 보였던 은호와는 전혀 달랐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은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도담은 그런 다휘가 신기한 듯 바라봤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현장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한 다휘가 입가를 가리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 왜?”
도담이 물었다.
“아니, 재밌어서요. 도담 씨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서.”
“그럼 네가 생각하던 이미지는 어땠는데?”
“고집불통에 완벽주의자에 조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요.”
“·· 틀린 말은 아니지.”
그의 대답에 다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도 그런 ‘재미없는’ 농담도 할 줄 아는 분이었네요.”
“··· 뭐?”
그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반문했다. 다휘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벤치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꿀만 잔뜩 발린 말은 너무 가식적이잖아요.”
다휘의 시선은 어두운 하늘에 홀로 있는 반쪽짜리 달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도담은 몇 시간 전, 극장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반복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달이 조금 더 움직이고, 야외 훈련장에서 쉬고 있던 이들이 한 명이 도담에게 다가와 훈련 재개를 부탁하고, 밤 10시가 되어 훈련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었다.
다휘는 훈련을 지켜보며 모두의 노력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가졌고, 거기서 영감을 받아 밤샘 작업에 임했다.
.
.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
간부 식당에는 오랜만에 모든 자리가 채워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은호가 유일하게 비워진 다휘의 자리를 보기 전까지는.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다휘는 안 왔어요?”
은호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으며, 누구에게 향한 건지 목적이 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을 자연스레 받은 것은 먼저 식사를 시작했던 연호였다.
“다휘는 어제 밤새워서 일했나 봐. 점심은 먹겠대.” 연호가 말했다.
그의 대답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지만, 다휘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다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 은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랬구나? 뭐, 다휘 방에 들렀다가 오셨어요?”
“그냥·· 아침에 일어났나 싶어서 잠깐 들르긴 했어.”
연호는 ‘쟤가 또 왜 저러지?’라는 생각과 함께 대답했다.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다른 이들은 ‘그렇구나.’하고 넘겼지만, 은호는 그 와중에 꼬투리를 잡았다.
“그렇구나~ 다휘가 일어났는지 궁금했구나.”
은호의 미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말투에 모두가 ‘쟤는 왜 저러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민환이 대표로 그녀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은호야. 아침부터 또 왜 그래?”
“내가 뭘? 그냥 다휘 얘기한 건데. 다들 다휘 걱정 많이 하고 있잖아?”
은호는 민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녀의 휘어진 눈 꼬리는 ‘은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확신을 모두가 갖게 만들었다.
“그렇지. 오늘 순서는 민환이지?”
“아, 네. 형님.”
“그래도 다휘 상태가 많이 괜찮아져서 다행이야.”
연호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은호의 식사가 준비되었고, 모두가 침묵 속에서 식기와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는 연호는 모두를 찬찬히 살피며, 누가 오늘 무슨 임무를 하는지 되짚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도담을 향했다.
“아 참. 담이 형은 오늘 암살부 갔다가 올 때, 호수랑 기준이 데리고 와 줘.”
“두 녀석은 왜?”
“다음 주에 블본스 본부에서 사람이 올 건데, 특별훈련 과정을 이수하라고 해서. 그 둘이랑 선우, 우목이. 이렇게 넷이 하면 좋을 것 같아. 다음 주 월요일에 올 거니까, 오늘 와서 며칠 여기에 있으면서 다휘랑도 친해지면 좋고.”
연호의 말에 선우와 우목이 그를 바라봤다.
어째서 자신들이냐는 암묵적인 표정에 연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선우는 곧 S 급으로 진급할 거지만, 근거리가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우목이는 직감을 좀 키웠으면 해서.”
그의 말에 이내 모두가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원거리 전투, 특히 사격에는 따라갈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육체적 레벨이 그에 미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우목은 운동선수였다는 과거 덕분에 육체적 레벨은 굉장히 높지만, 전투에서의 직감은 일반인 수준이었다.
이내 아침 보고가 끝난 듯, 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뒤를 지나가다가는 은호의 뒤에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식사 끝나고 잠깐 와.”
연호의 지시에 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호선을 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