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이 연호의 팔을 잡고서 다휘의 방에서 나왔다.
이어 몇 걸음 복도를 앞서나가면서 연호를 질질 끌어왔다.
“담이 형! 나 진짜 일 시키게?” 연호가 말했다.
그의 말에 도담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자신과 키가 10cm 넘게 차이가 나는 연호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댔다.
“쉿···.” 도담이 은밀한 소리를 냈다.
연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왜, 왜··? 뭔데?”
“백기준이 현다휘에게 무슨 말을 하는 지 들을 거야.”
도담의 말에 연호가 두 눈을 반짝였다.
아주 흥미로운 제안이었는지, 그는 도담의 팔을 도리어 붙잡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연호가 이어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하지만 도담은 그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연호가 그의 목을 당겨 자신의 시선의 높이에 맞추어 설명을 덧붙였다.
“기준이가 다휘를 좋아한다고 한 거. 한눈에 반했다던가, 기준이는 그럴 여유가 없지 않았어? 걔는 그날 다쳤었잖아?”
연호가 그렇게 말하고서,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보며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도담은 자신의 턱을 쓸며 잠시 생각의 굴레에 들어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취하고 있으나, 제자의 고민과 말에는 귀를 기울여주고 함께 생각해주는, 어떻게 보면 좋은 스승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는 도담이었다.
그는 이내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며 다휘의 방에 우뚝 섰다. 그리고 연호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의 의중을 알 리가 없는 연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왜?”
“··· 별거 아니다.”
“으응?”
“어쨌든, 백기준은 나름대로 진심인 것 같더라. 그 녀석은 이미 널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던데.”
도담의 말에 연호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아니야. 그래도 다휘는·· 어? 형. 둘이 얘기하나 봐. 목소리 들려온다.”
“·· 그래.”
두 사람은 다휘의 문에 귀를 딱 붙였다. 웅웅거리며 잘 들리지 않긴 했지만, 두 사람은 가능한 한 감각을 극대화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다휘와 기준의 얘기를 엿듣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방 안의 다휘와 기준은··.
* * *
연호가 도담이 나가자마자, 다휘는 꼼지락거리며 이불을 더 끌어당겼다.
그녀의 이불 밖으로 드러난 두 눈은 기준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기준 또한 다휘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내 애꿎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면서 침대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의자를 가져와 그녀의 왼편에 앉았다.
다휘는 그의 행동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진회색 눈동자는 그를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 어제, 대답 못 해주셨던 거요.”
“어, 어어?”
다휘는 그가 자신의 옆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그에 당황한 기준은 허둥지둥하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 배에 상처 나셨던 거, 괜찮으시냐구요.” 다휘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일순간 기준의 복부를 향했다.
그는 옅은 베이지색의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의 상처는 옷에 완전히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준은 상처의 남은 흔적들이 그녀에게 통찰되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지··. 난 원래 빨리 회복하거든.” 기준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입꼬리는 경련이라도 일어났는지, 그 미세한 떨림이 다휘에게 너무나도 잘 드러났다. 하지만 다휘는 눈치채지 못한 척을 하면서, 이불을 조금 내려 드러난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네. 다행이에요.” 다휘가 말했다. “그때, 피를 그렇게 흘리시고 계셔서, 정말 놀랐어요.”
다휘의 웃고 있는 눈 모양이 꼬리가 내려가면서, 순식간에 침울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기준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다휘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곧장 다휘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다가오는 커다란 손에 당황한 다휘가 입술을 앙다물면서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기준의 손은 다휘의 머리에 안착했다.
“아··?” 다휘가 기준의 온기를 느끼면서, 눈을 굴려 기준을 바라봤다.
“··· 아프지 마.” 기준이 말했다.
그의 옅은 회색의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다. 그는 자칫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기준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고생했어. 앞으론 좋은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슬픈 눈동자지만 입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다휘는 그의 말에 가슴의 깊은 곳에서부터 물기 젖은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의 두 귀와 양 볼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 고·· 고마워요. 기··준 씨.” 다휘가 그의 시선을 조금 피하며 대답했다.
기준은 그런 다휘를 향해 진심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도 웃고 있었다.
* * *
기준은 다휘의 방의 문을 조용히 닫으며 나왔다.
그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지나가는 대원이겠거니 하며 중앙의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단의 난간에 기대고 있는 연호가 있었다.
“··· 연호?”
“·· 다휘는 자?”
“아···. 응. 졸리다길래, 자는 거 보고 나왔어.”
“··그래.”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연호는 난간의 중간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준이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계단을 3개 정도 내려가자, 연호가 계단을 한 개 올라섰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4개의 계단이 벽처럼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 왜?” 기준이 물었다.
두 사람은 이 정도로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다휘가 오고 나서는 어쩐지 계속 어색한 침묵이 맴도는 사이가 되었다.
특히, 연호와 다휘가 ‘특별한 관계’처럼 보인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로, 기준의 태도가 변한 게 컸다.
“넌 다휘랑 어쩌고 싶은 거야?” 연호가 말했다.
연호의 브라운 계열의 눈동자가 환한 조명의 힘을 받아 밝게 빛났다. 그의 두 눈은 기준을 보고 있었다.
“···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한 건 너잖아?”
“·· 어젠 일부러 한 게 아닌 거 알잖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잖아?”
연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한 계단을 더 올라섰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3개의 계단이 있었다. 벽이 좀 더 얇아진 셈이다.
“대답하지 말고 계속 들어.” 연호가 말했다. “나는 2년 동안 좋아해왔던 소중한 내 친구의 동생이야.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은 없어. 행복하게 해 주는 건 나야.”
연호의 말에 기준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계단 멀어졌다.
계단의 끝에 있는 벽의 창문은 여전히 어두웠다. 비는 계속해서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빗소리 속에서 정적을 맞았다.
연호는 이내 기준에게서 몸을 돌렸다.
“알아들었다면, 친구로만 다가가도록 해.” 연호가 말했다.
그는 왼손으로 난간을 잡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홀로 계단에 남은 기준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의 빗소리를 들으면서, 창문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손을 뻗어서 창문에 손바닥을 올렸다.
바깥의 한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렇지만 손을 떼지는 않았다.
시원한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밖에 나가야겠다는 연이은 생각과 함께, 계단을 더 내려가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우산은 필요 없어도 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