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휘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중인 도담의 모습이 질리지도 않는 모양인지, 줄곧 지켜보며 커피를 담은 머그잔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질기도록 보고 있었다.
모든 일에 쉽게 익숙해지는 편인 다휘는 쭈욱 내밀고 있던 고개를 점점 옮기며, 어느새 그의 옆에 앉아서 함께 서류를 보고 있었다.
“여기, 오타요.”
“그래.”
간혹 서류가 잘못되어서 도담이 노트북으로 서류를 다시 만들 때면, 옆에서 오탈자를 함께 봐주곤 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이게 원래는 전부 연호 오빠가 하는 일이에요?”
다휘가 테이블의 한쪽에 정리해 둔 서류들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도담에게 물었다.
도담은 타자를 치다가는 그녀의 질문에 가벼운 기지개를 키면서, 다휘의 시선을 따라 함께 서류를 봤다.
“그래. 어떤 사소한 일이든,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큰 사고로 변할 수 있으니까. 몇 년 전부터 이렇게 해오고 있던 거다.”
“힘들겠네요···.”
다휘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두 눈동자를 마주친 도담은 일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다휘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뒤로 하고, 천천히 다휘의 시선을 피했다.
“··· 그래도 그 덕분에 이렇게 잘 유지되고 있는 거니까.” 도담이 말했다.
다휘는 도담과 함께 서류를 보면서, 이 조직에 대해서 몰랐던 비워져있는 부분들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아까 서류에서 봤는데요, 비전투 일원 분들도 기본 전투 훈련은 한다고···.” 다휘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녀의 물음에 도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투 일원도 자기 자신은 지킬 줄 알아야 해. 최소한은 하는 거야. 적이 전투 일원과 비전투 일원을 나누어서 공격하지는 않으니까··.”
“아···.”
도담의 대답에 다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을 흘렸다.
그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곧장 들었다. 그녀도 전투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반인이자, 자신들이 지켜줘야 하니까.
“··· 그래도 최대한 그런 일이 없도록, 우리들은 더 많은 노력을 해. 애초에 차연호가 보스가 된 것도·· 아니다.”
“아?”
도담은 서둘러 다휘에게 말을 덧붙였지만, 이어서 나온 말은 꺼내지 말아야 할 주제였던 건지 입을 닫았다.
그러자 이야기가 끊겨 찝찝한 기분이 든 다휘가 고개를 홱 돌려 도담을 다시 바라봤다.
“얘기해주세요!”
“아니·· 이건 좀···.”
“비밀 이야기라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요! 저 어차피 여기에만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얘기하는 사람도···. 도담 씨랑 은호랑 연호 오빠밖에 없는걸요.”
그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조금 부풀린 볼을 하고 도담을 은근슬쩍 올려다보면서, 필살기인 두 눈을 마구 빛내며 도담에게 동정심을 사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전은 곧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통하는 모양이었다.
“··· 그건 나중에. 대신 다른 걸 말해주지.”
다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도담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휘는 이 사람들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몇 되지 않았기에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는 기분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담과 대화를 통해 이 조직, bloody ellipse의 사람들에 대해 알 기회였다.
“·· 나는 원래 blood bones 소속이었다. 지금도 물론 잘나가지만, 한때 정점을 찍고 있을 때 내가 19살 이었고, 그 때 파트너가 있었다. 그 사람이 차연호의 삼촌이자 이곳의 전(前) 보스였지.”
도담이 고개를 젖혀 기하학적 무늬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죽었지만,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좋은 사람이었어.’ 도담은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휘는 그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던 덕분에,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감정이 없는 매정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볼수록 표정이 의외로 다양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는 데 정신이 팔린 다휘는 어느새 도담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가지면서 어느새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도담은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 치며 씩 웃었다.
“며칠 전에 서은호만 내 얼굴이 넘어온 줄 알았더니, 너도 아닌 척 했던 거였지?” 도담이 말했다.
그의 말에 다휘는 며칠 전 연호와 도담과 영화와 연극을 즐기고 온 날 밤, 야외 훈련장 옆 정원에서 도담이 했던 말보다는 포텐이 터졌던 도담의 외모가 생각났다.
그건 도담도 마찬가지였다. 다휘가 달 아래에서 했던 말도 예뻤지만, 당시 무언가 그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다휘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휘는 도담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제에서 벗어난 도담의 관심을 다시 주제로 돌리기 위해, 자신이 놀랐던 부분을 기억해냈다.
“흠···. 도담 씨는 언제부터 그·· 마피아 일을 하셨기에, 전성기가 19살이었어요?”
“나? 음··. 올해로 18년 째 종사중이지.”
다휘는 도담의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커다랗게 뜬 두 눈으로 그를 보면서, 다휘는 ‘왜 그렇게 놀라?’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담의 태연한 얼굴에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 그렇지만·· 도담 씨, 나이가 그렇게··· 많으세요? 저는 도담씨가 29살 정도일 줄 알았는데···. 18년이면 11살에···?”
“뭐야. 너 내 나이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
도담의 반문에 다휘의 미간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다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나··· 서른 셋.” 도담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다휘의 시선을 피했다.
턱을 괴고 있는 도담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래··. 휘원이나 연호보다 조금 많아서 실망 했겠지. 내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건가.’ 도담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렇게 어린 애에게 감정을 가져도 되는 걸까 싶었다.
다휘는 그의 생각과 달리,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럼 15살에··· 이 일을 시작하신 거예요?”
“음··. 그렇지.”
“그건··· 어째서요?”
다휘는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보다는, 그의 어린 시절과 마피아에 대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담은 그런 것까지 말 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기운 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다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런 표정은 안 지어도 돼.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 나이에 데뷔한 게 빠른 건 아니야.”
도담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휘와 더 시간을 보냈다가는 뼛속까지 털려서 전부 말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녀석들이랑 회의 좀 하고 올 테니, 방에서 얌전히 쉬고 있어라. 필요한 거 있으면 메시지 해.”
도담은 그녀가 비운 머그잔을 카트에 실었다.
거의 다 끝난 서류들과 자신의 노트북도 챙긴 후, 다휘를 한 번 더 보고 나서 도담은 카트를 밀며 다휘의 방에서 나갔다.
다휘는 도담이 남긴 여파에 빠져있었다.
이 사람들의 과거가 궁금했다.
무엇이 그들을 어린 나이에 마피아가 되도록 했던 걸까?
어렴풋이 은호가 했던 말이 거짓인 것도 느끼고 있었던 다휘는 의심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연호는 자신에게 누군가의 사정을 전부 말해주면서 동정을 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담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은호는 잘 모른다며 내뺄 것 같았다.
그런 와중 머릿속에 기준의 얼굴이 스쳤다.
그와는 대화가 필요한 관계이기도 했다.
다휘는 파티에서 기준이 폭탄 -고백-을 터트리기 전에 전화번호를 교환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채팅 앱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 * *
연호와 민환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차선에서 빠져나와,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운전대를 잡은 민환은 시간을 확인하며, 약속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누군가의 모습을 찾는 듯했다.
“··· 형님. 저 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차를 세우고 걸어갈까요?”
“응. 혼자야?”
“네. 블본스의 표식이 중절모에 있습니다.”
“얼굴은 보여?”
“아뇨. 잘 안 보입니다.”
“·· 그래. 피스톨 가져왔지?”
민환이 차를 세우고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호를 바라봤다. 어쩐지 굳은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여보였다.
연호는 씁쓸한 미소를 띠면서, 어울리지 않는 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정장을 입고 골목의 어둑한 곳에 검은 우산을 쓰고 서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민환은 연호가 비에 맞지 않도록 그의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는 세차게 내리지는 않았고, 아주 얇은 비였다.
두 사람은 정장에 중절모를 쓴 남자와 마주했다.
“··· bloody ellipse의 차 연호입니다.”
연호가 우산 밖으로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장 자켓의 소매와 그의 손이 비에 젖어 들어갔지만, 연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혼자 서있는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우산을 뒤로 조금 기울였다.
그리고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연호의 손을 붙잡았다.
“··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남자가 말했다. 아주 굵은 목소리였다.
연호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민환이 우산을 들고 있는 팔을 건드렸다.
민환은 천천히 우산을 들어올렸다.
“··· 오랜만이군요.” 남자가 연호의 두 눈을 보며 씩 웃었다.
연호는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민환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서 있어서,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곳은 보는 눈이 많습니다. 가져오신 차량으로 들어가시죠.” 그가 말했다.
연호는 그의 말에 뒤를 돌았다.
민환은 적은 아니지만 같은 조직 소속이 아닌 남자의 앞에서 쉽게 뒤를 보이는 보스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은 믿고 따를 뿐이었다.
민환은 연호의 발걸음에 맞추면서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는 사람입니까?”
“···.”
그러나 연호는 민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의 말대로 이곳에는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빗소리에 기척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순발력은 좋지만 직감은 좋지 못한 민환이 눈치 채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호는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의 차로 향했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민환은 그를 태운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뒷좌석에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의심의 기운이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민환은 연호의 손짓을 보고 운전석에 탔다.
세 사람이 탄 차의 내부는 조용했지만, 밖은 비가 때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줄기가 바닥을 모두 적시고 있었다.
남자는 뒷좌석의 창문에 달린 검은 암막 커튼을 쳤다.
그러자 연호가 민환에게 눈짓했고, 민환이 버튼을 누르자 모든 창문에 달린 커튼이 쳐졌다.
앞 유리는 검은 막이 밖에서 유리를 감싸며 올라왔고, 뒷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곧 차량 내부는 어둠으로 가득차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숨소리가 가득했다.
“··· 로이드가 간부가 됐다면서요?” 남자가 말했다.
민환은 그가 어떻게 최근에 일어난 일을 아는 건지, 미간을 찌푸렸다. 연호는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음을 알고 침으로 목을 축였다.
“네. 그 전 간부가 살해당해서.” 연호가 말했다.
민환은 그런 기밀로 부친 일을 이렇게 술술 말하는 연호가 이상했다. 그러나 자신은 충신일 뿐.
“··· 이 분은 제가 누군지 모릅니까?”
“저번에 본부에 오셨을 때, 이 친구는 출장 중 이었습니다.”
“아하.”
남자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 들리더니, 남자는 민환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건지 민환의 어깨를 정확히 잡았다.
“헉!”
갑자기 어깨를 잡힌 민환이 놀라자, 남자가 킥킥거렸다.
“처음 뵙습니다. 로이드 실버스의 형입니다. 휴 실버스라고 합니다. blood bones에서 S급 요원으로 있고, 현재 한국 지부에서 암살 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현재 블립스의 위치가 꽤 위험한 편입니다. 저는 blood bones의 소속이지만, 동생이 블립스에 있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지요.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휴가 조곤거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그의 말에 집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