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다휘는 우목과 함께 정원을 떠나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의 디저트들을 모조리 해치웠고,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의 공감대는 꽤 형성되고 있었다.
우목은 생각 외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내어 기쁜 모양이었다.
커다란 본관 뒤로 붉은 해가 비치는 모습이 장관이어서, 다휘는 우목과 함께 그 장면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문득 스친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다시 오고 나서, 사실 무서웠어요.”
“어?”
우목이 고개를 돌려 다휘를 바라봤다.
붉은 노을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보이게 했고, 우목은 이목구비가 굉장히 뚜렷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다휘의 뒤로 연호와 도담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모른 체를 하며 다휘의 눈을 직시했다.
“··다들 항상 총을 들고 다니고, 아침 식사 때는 어딘가 다쳐서 들어오구요.”
“그건·· 우리에겐 일상이기도 하고, 일이니까···.”
우목이 짧은 변명을 했다.
그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연호와 도담을 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에게도 며칠 전 임무에서 얻은 옆구리의 상처가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다휘가 당시 저녁 식사 때에 미묘하게 신경을 쓰는 것 같긴 했다.
다휘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우목을 올려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납치되었을 때만 해도 그래요. 민환 씨가··· 저 때문에 그렇게 다치셔서-”
“-너 때문에 다친 거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그런 태도였던 거야?”
“아, 연, 연호 오빠···.”
본관 앞에 서 있는 우목과 다휘의 뒤로 예상보다 일찍 복귀한 연호와 도담이 걸어오고 있었다.
연호는 어딘가 심통이 난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연호와 도담은 다휘와 우목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연호는 두 눈을 감고 짧은 한숨을 쉬며 단단하게 맨 넥타이를 풀면서, 다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 일이라면 네가 여기로 돌아온 날 얘기했잖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널 구한 건 우리의 의지였어.”
연호가 다휘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다휘는 연호를 보다가는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연호는 그런 다휘의 모습에 씁쓸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마피아인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다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는-”
“-그런, 그런 게 아니에요!”
다휘가 연호의 말에 다급히 소리쳤다.
다휘의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억울하면서도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표정이었다.
“여기 분들이 무서운 건 아니에요··! 다들 저에게 잘 해주시고 신경 써 주시는걸요··. 저는·· 그냥 마피아란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고, 여러분 모두 항상 다쳐서 오시니까··. 걱정도 되고, 솔직히 무슨 일들을 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다휘가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담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왔다.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름 휘원의 동생이기도 했고 조직에서도 보호해야 할 사람이니 신경은 쓰고 있긴 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우목은 다휘의 말을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날’의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 느낌이었다.
“저도 이제 이곳에 살게 되었고·· 여러분들과 함께 겪고 싶어요···. 무슨 걱정이든 일이든 ‘같이’요··!”
그래. ‘같이’라는 말.
그 말을 하지 못했던 11년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만약 그때 다휘에게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면···.
한편, 연호는 어느새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다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등을 토닥거렸다.
“서두를 것 없어, 다휘야. 천천히 하자. 그런 너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해서·· 미안해.”
세 사람 모두 다휘를 참 눈물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돌아온 당일 저녁 내내 울었지만, 다음 날부터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또다시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
도담은 그런 다휘를 계속 바라보더니, 결국 자켓 속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물며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우목도 도담의 뒤를 따랐다.
다휘는 그렇게 붉은 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호의 품속에서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제 완전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다휘는 안심이 되자 눈물이 서서히 그쳤고, 그녀는 맥없이 연호의 품으로 쓰러졌다.
“··· 보고서는 담이 형한테 쓰라고 해야겠네.”
연호는 다휘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그녀의 고개가 연호의 가슴팍에 기댔고, 어쩐지 단 향이 마구 느껴졌다.
연호는 우목이 디저트를 사와 그녀에게 먹인 것으로 예상하며 숙소로 향했다.
* * *
연호는 다휘의 방에 그녀를 눕히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민환이었다.
“아, 형님.”
“민환아. 저녁 식사에 가는 길이야?”
“네. 지금 돌아오신 겁니까?”
“응. 아까 도착했어. 오늘 다녀온 조직 말이야, 다시 검토해야겠어. 재정 부분 확실한 거 맞아?”
“네. 일단은 blood bones 본부에서 받은 자료입니다. 차이가 많이 나던가요?”
“어, 좀 이상했어. 우리 쪽 애들 시켜서 자체적으로 조사하도록 하고, 그 조직엔 2주 후에 다시 일정 잡도록 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숙소에서 나와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은호를 마주쳤다.
“보스? 일찍 왔네요. 도담 님은요?”
“아까 담배 피우는 것 같았는데··. 식당엔 아마 올 거야.”
연호의 대답에 은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파일을 마침 잘 됐다며 연호에게 내밀었다.
“유 환이 NEU와 2년 전에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고 세웠던 초기 계획이에요. 10년 전에 자신이 보스가 되면서 만든 유령 회사인 LAON이란 가구 수입 회사에요. 본격적으로 자금원으로 쓸 생각인 것 같고요, 제휴 론칭은 1달 뒤라고 해요.”
연호는 복도 중간에 멈춰 은호가 건넨 서류를 훑어보았다.
은호는 그에게 짧은 설명을 덧붙이며 말했고, 민환은 연호의 어깨너머로 함께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아까 다휘 생각나서 찾아보다가 발견했어요. 다휘가 유 환을 처음 만났다고 한 날은 사업을 시작하려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고, 사업 확정은 2달 전에 난 결과라고 해요. 현재 진행 중인 내용은 정보부에서 정리 중이라, 내일 오전에 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이고요.”
은호의 말에 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파일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식당을 향해 걸었다.
“그래, 고생했어. 이건 밤에 내가 좀 더 보도록 할게.” 연호가 말했다.
은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걷다가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휘는 못 보셨어요? 오늘도 안 나오려나··.”
은호의 물음에 연호가 생각이 난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민환을 바라봤다.
“민환아. 오늘 우목이랑 다휘가 같이 있는 거 본 적 있어? 아까 만나긴 했는데·· 아니, 다휘 얘기는 식사하면서 다시 해 줄게.”
“아. 네. 아까 점심시간 조금 지나고 정원에서 케이크 같은 걸 먹는 모습을 봤습니다. 얘기도 곧잘 하는 것 같던데요.”
민환은 자신이 몇 시간 전에 본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휘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아 보이는 것 같았다.
은호는 민환의 말에 두 눈이 점점 커졌다.
우목이 성공했단 뜻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다휘를 걱정하며 졸였던 마음이 붕 뜨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그럼 오늘 먹으러 오겠네?”
은호의 신난 목소리에 연호는 고개를 저었다.
세 사람은 어느새 식당의 커다란 문 앞에 당도했다.
“지금 울다가 지쳐서 자고 있어. 아마 못 나올 거야. 내가 밤에 간단하게 음식 챙겨서 가 볼게.” 연호가 말했다.
은호는 그의 말에 조금 의문이 들었다.
방금 복귀한 연호가 다휘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니?
물론 최근 연호가 다휘를 꽤 챙겨주긴 했다.
처음에는 휘원의 동생이기도 하고 참사를 겪은 아이니까 신경 써주는 줄 알고 다행으로 여겼다.
연호가 챙기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보스이니, 다른 사람들도 나름 신경을 쓸 테니까.
그런데 그녀가 느끼기엔 연호에게 다른 의중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흐음···.”
은호는 연호를 향해 입술을 삐쭉거리며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한 연호는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스, 요즘 좀 수상하단 말이죠···?”
“어, 어어? 뭐, 뭐가?”
“이거 봐. 말 더듬는 거. 보스 설마·· 다휘를···”
“다, 다휘? 내가 다휘를 뭐, 뭐··?!”
은호의 얼굴이 점점 연호에게 가까워졌다.
연호는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챘을까봐 괜히 쫄려서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한편, 민환은 자신의 ‘형님’에게 의심을 하며 캐물으려는 은호가 난감했다.
연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다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은 없었지만, 연호에 대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을 했기 때문에 은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환은 결국 연호와 은호의 사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자, 잠깐. 은호야. 오빠 말 좀 들어봐··· 보스께 이런 예의에 어긋나게-”
“-오빠는 비켜봐. 중요한 얘기란 말야.”
하지만 민환이 내민 팔은 은호가 휙 쳐냈다.
은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연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보스. 혹시 다휘를 조직 일ㅇ-”
“-뭐 하냐, 너희.”
그리고 연호와 민환의 구세주가 등장했다.
도담은 우목과 함께 그들의 뒤에 서있었다. 도담이 멈춘 말에 은호가 그를 확 째려봤다.
“아,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는데요! 도담 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뭐가?”
은호의 말에 도담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반문했다.
다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알았지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뭐긴요, 보스가 다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제 예상 적중률 99%란 말입니다!”
“내, 내가 다휘를 뭘 생각해!!”
은호의 말에 연호의 희멀건 한 얼굴이 한순간에 붉어졌다.
그가 두 눈을 꼭 감고 소리치며 도담의 뒤로 달려가 얼굴을 가렸다.
도담은 그런 연호에게 징그럽다며 한 소리 했지만, 은호에게 얘기를 듣고 싶어 별말은 하지 않았다.
은호는 그렇게 네 남자를 앞에 두고 당당하게 말했다.
“보스는 지금 다휘를 우리 조직의 일원으로 탐내고 있다고요! 그래서 그렇게 자꾸 신경 써주는 거죠?”
그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쳐올렸다.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네 남자의 반응은 한참 식어있었다.
“어휴. 그래. 은호 눈치에 난 또 무슨 말 하나 했잖아··. 다들 밥이나 먹자.”
“네, 형님. 아까 주방장에게 들었는데 오늘은 회에 간단한 술로 준비했답니다.”
“뭐? 회?! 진짜 맛있겠네. 아까 디저트 먹어서 속이 너무 달아. 오늘은 술 마시고 쉬어야겠다.”
“서은호, 뭐 해. 얼른 들어와.”
은호는 네 남자의 반응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명 적중이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다들 오늘 걸어서 못 나가요! 의사 퇴근했어! 보스에게 술 먹이고 알아낼 거예요!”
그녀의 다짐 뒤로 식당의 문이 닫혔다.
사실 연호는 나름 태연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하지만 느끼고 있는 그 감정에 익숙하지 않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