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큰일이다. 오늘 정직원으로서 첫 출근인데, 이러다가 지각할 것 같다···!!
다휘는 ‘아침을 만들 때 계란만 태워먹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출근 시간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움직이지 않는 전철이 미웠다.
이윽고 전철이 다시 움직였다.
이럴 때만 시간이 빨리 가는 것같이 느껴져서 다휘의 속은 타들어만 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니고 있는 유명 연예기획사 NEU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회사였다.
대학 4학년 2학기에 운 좋게 NEU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일했었고, 대표에게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서 유례없는 일로 정직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아직 3월이 막 되어 추운 날씨 덕에 가벼운 코트를 입은 다휘의 주머니에서 가벼운 진동이 울렸다.
「오라버니♬ : 동생! 출근 잘 하고 있지?」
「오라버니♬ : 회사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치마 같은 거 입으면 나한테 죽어ㅡㅡ」
휘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다휘는 긴장하던 와중에 가볍게 웃음을 뱉었다.
다휘에게 휘원이란, 그런 존재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그녀를 웃게할 수 있는.
그녀는 코트 속에 입은 남색의 원피스를 떠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휘원의 메시지에 답장했다.
「예예~ 오빠도 일 열심히 하시구요.」
「이번 주말에 본가 가려고 하는데, 오빠도 올 거지?」
다휘가 그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자마자, 전철이 천천히 멈추었다.
“아!”
다휘는 자신이 내려야 할 역인 것을 깨닫고, 사람들에 휩쓸리긴 했지만 전철에서 내렸다.
.
.
핸드폰의 진동이 또 울렸다. 휘원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메시지를 읽지 않고, 다급히 시간만 확인했다. 9시가 되기 2분 전이었다.
“뛰어야 돼!”
다휘는 어깨에 멘 가방의 끈을 잡고 도보 위 사람들의 사이를 힘껏 뛰었다.
그리고 그녀는 ‘NEU ENT.’라고 간판이 걸린 건물로 다급히 들어갔다.
건물의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는 프론트 직원에게 다가갔다.
“다휘 씨!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셔. 14층으로 곧장 가면 돼.”
“아, 네. 감사합니다!”
다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엘리베이터에 오른 다휘는 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누군가의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
닫혀가는 엘리베이터의 문 사이로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것을 확인한 다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남자는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웃으며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로 뛰어오다가 다시 열리는 문 사이로 다휘의 눈을 똑바로 보고 환히 웃었다.
그는 다휘를 만난 게 기쁜 듯했다.
“다휘야!”
“유달아. 기획사엔 웬일이야?”
그의 이름은 유달. 본명은 공 유달.
NEU의 아이돌 그룹인 ‘디온’의 소속이며, 현재는 배우로 활동 중인 다휘의 대학 동기이다.
어두운 갈색의 단정한 머리와 고동색 눈동자의 둥근 눈매가 그를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벽에 몸을 기대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긴! 이번에 찍은 광고가 대박 나서 대표님께 연봉 협상 좀 하러 왔지. 나 이제 완전 슈퍼스타라니까!”
유달의 신이 난 어조에 다휘는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급박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잘 됐네. 요즘 시현이는 본 적 있어?”
다휘는 대학시절 유달과 함께 셋이서 다녔던 다른 여자를 떠올렸다.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였다.
그녀는 NEU 소속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또 다른 기획사인 GPJ의 대표 아이돌 그룹인 ‘그레이시’의 리더였다.
유달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자신과 반대쪽 벽에 기댄 다휘의 곁으로 다가갔다.
“며칠 전에 음악 방송 MC로 갔다가 만났어! 시현이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했어! 이번 컨셉이 섹시라서 살 많이 뺐던데, 홀쭉하더라고···.”
“저런··. 살은 너도 많이 빠졌네. 이번에 드라마 새로 들어가서 그렇지?”
“응! 이번엔 로코물이야! 여주인공의 서브 남자 주인공 역할인데, 감독님이 미소년 이미지를 원하셨거든. 5kg 정도 뺐어···.”
유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1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다휘는 그와 함께 내리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고생하네. 난 저녁에 치킨 먹어야지.”
“야아!! 너무하지 않냐?!”
다휘는 그의 울상에 가볍게 웃으며 대표실 앞의 데스크에 앉은 비서에게 향했다.
안경을 쓴 남자 비서는 다휘와 유달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큰 그는 보고 있던 노트북을 살짝 닫으며,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가벼운 인사를 받으며, 대표실로 향하는 문을 공손하게 가리키며 웃었다.
“다휘 양, 유달 군! 어째 둘이 같이 오네요. 대표님 안에 계시니까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해요. 흠··· 대표님! 다휘 양이랑 유달 군 들여보내겠습니다!”
그가 노크를 하며 말했다.
문 너머에서는 대표인 우진의 목소리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음··· 네. 들어오세요.”
비서는 두 사람에게 얼굴을 가까이 해서 작게 속삭였다.
“안에 거래처 손님이 한 분 계세요. 대표님이랑 워낙 가까워서 괜찮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볍게 인사만 해 줘요.”
“예이~ 알겠습니다.”
“넵.”
그에게 대답한 유달과 다휘는 각자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을 가지고 대표실의 문을 함께 열었다.
“어서와요. 두 사람.” 우진이 말했다.
유달과 다휘는 소파에 앉아있는 풀빛 머리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달은 살짝 다휘의 손을 쳤고, 그들 사이의 메시지인 듯 유달이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저는 디온의 유달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회사의 작곡가인 현다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현다휘입니다.”
두 사람의 간단한 소개에 풀빛 머리의 남자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으며, 소파에 편히 앉으라며 손짓했다.
유달과 다휘는 풀빛 머리의 남자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다휘는 달려와서 머리가 헝클어졌을까봐 뒤늦게 매만졌다.
그녀는 처음 보는 풀빛 머리색에 신기해서 눈을 움직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눈동자가 금색이네·· 왜 이렇게 나를 계속 보는 것 같지?
다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봤다.
우진은 두 개의 서류파일을 들고 와서 1인 소파에 앉았다.
“일단 유달이부터. 이번 광고 반응이 꽤 좋습니다. 매출이 많이 올라서 다음 광고에도 유달이를 쓰고 싶다고 전해왔어요. 그리고 XXXX 피자에서도 유달이를 최종 후보로 올렸고요. 일단 당분간은 22% 정도로 인상 조정 하려하는데, 어때요? 물론 인센티브는 따로 들어갈 겁니다.”
우진이 말했다.
그는 서류파일을 넘기며 유달이 올린 실적들의 그래프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유달은 자신이 최근 3개월간 이렇게 많이 했나 싶으면서도, 그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22%나요?! 저는 생각보다 많이 부르셔서 무조건 좋습니다! 그리고 대표님. 저 7월에 그룹 컴백 정해진 건가요?”
“네. 다음 달부터 회의 들어갈 겁니다. 참고로 디온 이번 앨범은 다휘가 반 이상 전담할 겁니다.”
우진이 다휘와 유달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다휘는 그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예? 제, 제가요, 대표님? 저는 아직 아이돌 곡은 좀···.”
다휘가 난감한 듯 눈썹을 약간 찡그리고,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그렇지만 우진은 태평하게 계속 얘기했다.
“이어서 다휘도 하죠. 다휘는 디온 작업은 4월 말부터 들어갈 거예요. 이번 컨셉은 좀 다운시켰고, 그래서 다휘가 잘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달이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도 다휘의 실력은 직접 느꼈으니까. 호윤이 미니 앨범으로 낸 곡이 차트에서 같은 기획사 그룹을 눌러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나도 그 점 때문에 다휘를 정직원으로 바로 전환했고요.”
우진이 말했다.
그는 다휘를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그녀를 칭찬하는 듯했다.
다휘는 그의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이 붉어지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다휘는 우진과 유달 이외에 누군가 -풀빛 머리의 남자-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진의 칭찬에 전혀 신경쓰지 못하는 듯 했다.
우진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계속 말했다.
“다휘는 이제 정직원이니까, 이번 디온 작업 잘 되면 급여는 인상할 수 있을 겁니다. 다휘도 호윤의 앨범이 터져서 저작권료의 대단함을 느꼈겠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두 사람의 파일을 책상으로 가볍게 던졌다.
다휘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들고 우진을 바라봤다.
“네, 대표님··!”
우진은 두 사람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이내 그는 눈썹을 들썩였다.
“이제 가 봐도 좋아요. 다휘는 10층에 개인 작업실 만들어뒀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됩니다. 그리고 10시에 회의에도 이제 정식으로 참석하도록 해요.”
“넵.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두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나 우진과 풀빛 머리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들뜬 걸음으로 대표실에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대표실, 풀빛 머리 남자의 시선은 문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우진이 낸 커피 잔을 들었다. 식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먹을 만 했다.
“헤에·· 능력 좋은 직원들을 뒀군요, 대표님은.”
풀빛 머리 남자, 유 환은 흥미로운 미소로 일관하며 우진을 쳐다봤다.
우진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슨 건으로 오셨습니까?”
“아. 전에 말씀드렸던 계약 건의 조건을 조율하러 왔습니다. 여기 이건 외국의 다른 체결의 보고서인데, 그래프를 보시면-”
.
.
대표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며, 짧은 만남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다휘, 밥 잘 챙겨먹으면서 일 해!”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할 말이야? 너도 무리하지 말고 쉴 땐 확실히 쉬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유달은 10층과 1층을 차례로 누르면서 그녀를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나는 걱정 마시라! 다음에 시현이 만나면 안부 전해줄게!”
“그래. 회사에 오게 되면 말해. 커피나 한 잔 하자.”
그녀의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멈추었다.
다휘는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자아자, 현다휘!”
“그래. 공유달도 파이팅.”
그리고 문이 닫혔다.
다휘는 자신의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어 넓게 펼쳐진 복도를 따라 걸으며, 자신의 이름이 팻말로 걸린 방을 찾고 있었다.
조금 걸은 다휘는 가장 안쪽의 문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휘는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를 돌렸을 때, 복도의 저 끝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다휘? 현 다휘 양!”
“네?”
다휘는 문고리에서 손을 놓으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실에서 잠깐 함께 있었던 풀빛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향해 조금 다가갔다.
“정직원 된 거 축하해요.”
“아? 아아··. 네. 감사합니다.”
이 남자가 왜 자신에게 축하를 하는 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회사의 큰 거래처인 것 같아 일단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유 환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까 다휘 양을 봤을 때, 한 눈에 반했어요. 괜찮다면 나랑 만나보지 않을래요?”
“··· 네?”
내가 잘못 들었나? 한 눈에·· 뭐라고?
“제,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
“아니, 잘들은 거 맞는 것 같은데요? 다휘 양이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다휘는 갑작스런 그의 고백에 당황스러웠다.
만난 지 10분은 됐나? 뭐지, 이 사람?
“아뇨·· 저기,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연애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다음에 오면 또 물어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다휘 양.”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쿨하게 몸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굉장히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다휘는 다시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이 일은 그녀가 겪을 불행의 시작이었다.
* * *
- 다시 현재.
“그래서, 그 이후로 여러 번 회사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 때마다 교제 신청을 받아서··. 전부 거절했지만요.”
다휘의 긴 이야기에 끝이 올랐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두는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 환과 직접 대화를 했던 민환과 은국은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 5분 뒤에 본부 도착한다. 로이드, 본부 상황실로 연결 해줘.”
“네에.”
헬기 안은 각자의 생각으로 침묵이 흘렀다.
민환과 은국은 환이 다휘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더더욱 이상한 사건들이었다고 생각했다.
다휘는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환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민환과 은국이 왜 자신과 그를 떨어뜨려놓았는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