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탁이 운전하는 검은 중형 차량이 본부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숲의 끝자락에 다다라 본부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중천에 뜬 해와 화려하지 않은 건물들은 꽤 잘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단 하나의 입구의 무장을 한 두 명의 남자는 저택에 접근해오는 차량을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왔다.
진탁은 자신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만 운전석의 창문을 내렸다. 그의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지만, 감정은 담겨있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경호원을 향했다.
“본부다. 견혜혁은 어디에 있지?”
“들어가십시오. 선우님과 함께 라운지에 계십니다.”
경호원은 진탁의 물음에 대답하고서 차량에서 물어나 깊게 허리를 숙였다. 진탁은 창문을 올리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입구를 지나자, 몇 그루의 관목들이 늘어져있었고 그 너머로 저택의 정원이 보였다. 조금 더 지나자, 가장 큰 저택이 나타났다.
저택의 앞으로는 여러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진탁은 저택의 입구 앞에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 연호를 바라봤다.
“먼저 가 있어. 주차하고 다휘는 내가 데려갈게.”
“·· 네. 부탁드려요.”
어쩐지 이동하는 내내 단 한 사람도 말을 하지 않아 침묵이 길었던 시간이었다. 연호는 굳어있던 표정을 애써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담이 문을 열면서 로빈, 은호, 로이드와 연호가 모두 내렸다. 도담은 가장 문을 닫기 전에 문 사이로 얼굴을 살짝 들이밀었다.
“바로 오지 말고, 그 녀석한테 여기 구경이나 시켜주고 와. 연호의 지시다.” 도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문을 닫고, 연호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진탁은 도담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다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테니, 자신은 다휘를 데리고 시간을 때우다가 오란 거겠지.
그녀도 자신의 일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겠지만, 정확히 무슨 일로 온 것은 모를 테다. 그녀는 끝까지 모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다.
진탁은 다휘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고, 핸들을 돌려 주차를 시도했다.
다휘는 도담의 말에 조금 의문은 갔지만, 자신은 ‘이들 조직’의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기준은 지난 밤, 급하게 생긴 임무를 처리하고 새벽에 복귀하여 해가 중천에 뜰 때 쯤 눈을 떴다.
피곤에 찌든 나머지, 미처 꼼꼼히 치지 못한 암막 커튼의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에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이불을 걷어찼다.
“··· 몇 시야.”
[오후 1시 33분입니다.]
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고, 곧 여자의 기계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답했다.
그는 양손으로 자신의 밝은 금발과 하얀 피부를 문지르며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ㅎ··ㅣ···네··”
커튼과 굳게 닫아놓은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톤으로는 여자인 것 같지만, 이 저택 내에 여자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암살부의 간부들의 성질을 견뎌내지 못해 모두 본부로 전출가거나 일을 그만두었고,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연호는 암살부에는 남자 고용인만 두게 되었다.
그럼 저 목소리는 누가 주인공이란 말인가?
기준은 오늘 본부에서 간부들이 올 거라고 했던 소식을 떠올렸다.
그럼 8인의 안개인 서 은호가 주인공일까? 아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밝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궁금증이 생긴 그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를 향해 걸었다.
커튼을 조금 쳐내자, 햇빛이 들어와 그의 방을 밝게 비추었다.
방과 함께 기준의 반라의 몸도 잘 드러났다.
상체의 이 곳 저 곳에는 여러 상처가 가득했고, 그의 복부를 감싸고 있는 하얀 붕대 위로 붉은 피가 적셔졌다.
새벽에 급하게 들어와 상처를 대충 치료하고 자서,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해보였다.
기준은 아려오는 통각과 함께 벌어진 듯 느껴지는 상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고통을 인내하며 끝내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건물이 본부랑 느낌이 다르네요. 좀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혜혁이가 건물 디자인할 때 관여 많이 했어.”
“우와·· 그런 미적 감각이 있으신 분인가 보네요. 무지막지한 분 일줄 알았어요.”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다.
아주 밝은 색으로 탈색한 긴 머리카락은 꽤 인상적이었다. 베이지 색의 블라우스와 검은 색의 H형 치마는 그녀를 우아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살갗은 자신의 피부보다 더 하얀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피아노의 선율과 같이 들렸다.
기준은 그녀와 진탁이 움직이는 동선을 지켜보더니 이내 고개를 마구 저으며 창문을 쿵 닫았다.
“뭐야, 저 여자는··?”
그는 벽에 몸을 기대고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외모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기준은 수많은 여자를 만나왔지만, 그 어느 누구도 단 한 번도 마음에 찬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그는 양손으로 열이 오른 얼굴을 시린 손으로 덮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 * *
한편, bloody ellipse 암살 전문부 저택의 간부 휴게실(라운지)에서는 휘원의 일에 대한 얘기가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라운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으로, 동그랗고 높은 테이블과 테이블 당 의자가 2개씩 여기저기에 배치되어있었다.
본부에서 온 모두는 각자 편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것은 암살 전문부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호의 얘기를 꼬리하나 달지 않고 끝까지 모두 들은 혜혁은 팔짱을 끼고 짧은 숨을 뱉었다.
“··· 불쌍하군. 그 여자.” 혜혁이 말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얀 가운으로 존재감을 내비치는 은호는 그의 말에 발끈했다.
“·· 조금 있다 다휘가 올 거예요. 그 애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다휘를 향한 동정이 싫었다. 다휘는 그런 시선을 받을 아이가 아니었다.
은호의 톡 쏘아붙인 말에는 혜혁 대신 형주가 반응했다.
“그래. 중요한건 For Luciano의 유 환, 그 몹쓸 새끼지.”
형주의 브라운 색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였다. 그가 누구보다도 For Luciano의 보스인 유 환을 혐오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직 전력에 차이가 나니 함부로 칠 순 없어. 동맹으로 전력을 확보하면, 그 때 친다.” 도담이 한 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형주를 보며 말했다. 지금은 분노 정도로 참으란 뜻이었다.
“알고 있다고, 그 정도는. 젠장.” 형주는 과거의 분노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이 조직으로는 그 거대한 마피아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모(母) 조직인 Blood bones가 세계적인 규모를 가진 조직이라 해도, 자신들 bloody ellipse는 그들의 수많은 스페어 조직 중 열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였다.
게다가 For Luciano의 보스인 유 환은 대한민국의 연예계를 포함한 정치계, 경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그의 영향력은 이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유 환은 몇 년 전부터 bloody ellipse를 심하게 견제해왔다. 덕분의 이들이 입지가 점점 좁아져 산 속으로 본부도 옮겨왔었다. 지금의 bloody ellipse를 유지하는 것은 연호와 도담, 8인의 안개와 암살부의 간부들이 간신히 해내고 있는 일이었다.
“··· 침울한 분위기는 조금 싫은걸. 이제 슬슬 다휘가 올 때도 되었고, 다들 즐겁게 있자. 유 환은 꼭 우리의 손으로 없앨 수 있어.” 연호가 말했다.
그의 억눌린 분노가 담긴 말은 모두의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모두 유 환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포함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 온 유 환에 대해, 다휘는 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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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과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기준은 상처를 부여잡고 꾸역꾸역 최상층에 있는 라운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고통에 젖어 차마 암살부 내에 있는 의료부에 전화 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자신들에게 최고의 치료를 선사하는 은호를 생각하며 그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가 잡고 있는 복부의 상처에서 터져 나온 붉은 피는 하얀 셔츠로는 모자라서, 그의 손바닥에도 묻어났다.
이를 악물면서 ‘조금만 더’라고 생각하던 찰나, 띵 하면서 청아한 엘리베이터 소리가 그를 반겼다.
엘리베이터의 열리는 문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윽··.”
그는 신음을 목 뒤로 삼키며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처참한 몰골을 두 눈으로 보게 된 엘리베이터 안의 진탁과 다휘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준아!” 진탁이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시선도 흐릿해진 기준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의 시선에 마지막에 비춰진 모습은 흔들리는 다휘의 모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