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산 거주 학생 입장료는 천 원입니다.”
미술관 입장료가 천 원. 생각했던 것보다 싸서 오히려 이쪽에서 자존심이 상할 정도다. 오늘 있는 관람은 무슨 초상화가? 아니다, 추상화가의 작품전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죽은 사람의 몇 십 주년을 기념하는 그런 자리라고 했다. 사실 누군지 관심 없다. 이름은 듣자마자 까먹어버렸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미술관은 닫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섯 시면 웬만한 곳은 다 닫지 않던가. 그런데도 미술관이 문을 열고 있었다. 그냥 오늘이 우연찮게 토요일이었을 뿐이고, 미술관은 우연찮게 토요일에만 문을 늦게 닫았다. 뜻밖이다.
그래도 나는 미술을 관람하는 취미 같은 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래도 천 원이면 눈요기 치고는 싼 거겠지. 그게 내용을 알아먹지 못할 병풍 같은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티켓을 끊었다. 재입장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봤자 그냥 숨어 들어가면 아무도 모를 텐데, 애초에 신경이나 쓰기는 할까.
예상했던 대로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여섯 시 넘어서, 그것도 토요일에 미술관이 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가 이상한 것이리라. 옆에는 미술가의 생애가 적혀 있었지만,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생애 따위에는 크게 관심 없다.
나는 지나가다가 작품 하나에서 멈춰섰다. 제목은 도시. 사각형의 밀집. 그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사각형 테두리가 작은 사각형을 둘러싸고 있었다. 작은 사각형은 안에서 네 등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일정한 편이었다. 작은 사각형들은, 미묘하게 색이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회색이었다.
한참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큐레이터가 다가왔다. 영업 시간이 다 된 것일까. 하고 긴장했는데 작품 설명이 필요하냐는 뜻이었다. 어차피 못 알아먹을 건 뻔했지만, 옆에 서서 대신 떠들어 줄 사람이 생기는 것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큐레이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일본의 주류 화가가 그린 것으로서…….
나는 큐레이터의 알아먹지도 못할 소리를 따라 이리로 저리로 움직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늕 도형들이 자꾸만 나를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이 화가는 수직과 수평을 통해 그림에 무게감을 더합니다. 그것이 이 화가의 특징입니다. 수직을 가로지르는 수평. 그것은 절대에 대한 저항과도 같지만, 수직이 그대로 이어지는 반면에 수평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끊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코마라는 제목의 작품에 다다랐다.
쇠로 만든 작품이었다. 녹슨 가운데 하나의 줄. 그 모습이 마치 몇 달 전에 봤던 영도다리를 떠올렸기에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도다리. 매달린 십자가, 물그림자, 연화. 그 모든 게 갑자기 떠올랐다가 안개처럼 흩어져갔다. 안돼. 사라지지 마. 나를 두고 가지 마. 아무것도 여기에 매달아 줄 없는 현실에서 너마저 나를 떠나지 마.
“손님?”
“아, 네?”
“괜찮으세요?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은데…….”
“아, 괜찮아요.”
아니요, 거짓말이에요. 하나도 안 괜찮아요.
“이번 ○○전은 여기가 끝입니다. 질문하실 사항이 있나요?”
나는 반사적으로 없다고 해버릴 뻔 했다. 당장 이 그림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걸 참아내는 걸음 한 걸음. 차라리 상처를 내는 게 쉬운 한 걸음.
나는 희나리에 대해 물었다.
“희나리요? 당연히 알죠. ‘흔적 없는 소녀’”
“‘흔적 없는 소녀’라뇨?”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가, 어느 날 홀연히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사라졌어요. 거기다가 그녀가 그린 그림은 누군가에 의해 하나 둘 씩 파손되고, 사라지고 있죠. 이제 희나리의 그림은 사진으로밖에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예술성만큼은 뛰어났으니, 다들 그녀를 기려서 ‘흔적 없는 소녀’라고 부르죠.”
“그렇게 유명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혹시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나요?”
“글쎄요, 아쉽게도 저는 없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 중에 그녀를 만나본 사람은 몇 명 있었어요. 사실, 희나리는 갑작스럽게 주목받았다가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바람에 더 크게 주목받은 화가였거든요.”
“혹시, 희나리. 잠깐, 그게 진짜 이름인가요?”
“아뇨, 희나리는 필명이고 진짜 이름은 서아랍니다.”
“네, 서아가 살해당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나요?”
큐레이터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경계심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긴, 대뜸 누가 죽었는데 살해당한 게 아니냐고 묻는다니. 저절로 미심쩍어질만하다.
“음……. 확실히, 실종 전까지만 해도 밝고 활기찬 사람이어서, 아무도 그렇게 사라져버릴 거라고는 예상 못했죠. 아, 그러고 보니까 수상한 일은 있었어요. 희나리가 죽은 다음에, 경매에 희나리의 그림이 한꺼번에 나온 적이 있어요. 원래 작가가 죽거나 사라지면 작품 값이 뛰는 건 오랜 전통이지만, 희나리의 경우에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더 이상 뭔가를 물어볼 체력은 없었다.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나는 큐레이터를 내버려두고 서둘러 전시관 안을 빠져나갔다. 전시관의 마지막에는, 작가의 아틀리에를 재현해놓은 공간이 있었다.
공간에서 잔인함이 느껴졌다. 그림이란 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이 하나의 몸이라면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내장이다. 내장을 억지로 만들어 얼기설기 재현해놓은 기분이 들어 역겨웠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키고 장소를 나섰다.
골목은 인적이 드물었다. 가게 하나 없이, 이렇게 집의 옆면만 있는 골목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여자애 한 명이 걷기에는 좀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집에 가는 데 굉장히 빠른 지름길이기도 했다.
남자는 사각에서 튀어나왔다. 미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미행을 당할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 정도 덩치의 남자에게 미행을 당했다면 진작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냥 자주 다닌다 싶은 길목에 매복해있다가, 이렇게 확 덮친 것이리라.
정신이 없었다. 반응할 틈도 없이 명치에 한 대가 꽂혔다.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삼켜냈다. 그러느라 숨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력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러는 와중에도 머리는 굴러갔다. 단순 강도는 아니다. 단순 강도였다면 어설프게 칼을 들이민 다음에 돈을 내놓으라고 했을 것이다. 이 눈빛은 어설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죽음이다. 죽음이 왔어.
내가 정신도 못 차리는 사이 남자는 손을 뻗어 날 벽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두꺼운 손으로 목을 졸랐다. 숨이 멎고 생각도 멎었다. 발버둥을 쳐 보아도 역부족이었다.
부유감. 포근함.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힌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대로 생각을 그만두면 거기에서 류하라는 존재는 꺾여버리리라.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죽음이다. 애초에 오빠가 길거리에서 목이 잘린 시점에서 똑바로 죽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고, 당장 죽는다고 해도 더 이상 후회할만한 일은 없다. 여기까지 왔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목숨을 붙여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없고, 세상이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주머니에서 급하게 커터칼을 꺼내 사내의 손을 찍은 것은 류하가 아니다. 류하가 아닌, 류하의 속에 있는 다른 무언가다. 이를테면, 본능 같은 것이다.
남자가 류하에게 그랬듯 그것은 남자에게 정신을 차릴 틈조차 주지 않고 남자의 배때지를 쑤셨다. 커터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효타였다. 그 틈에 몸의 제어권을 돌려받은 류하는 달아났다. 토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나는 추하게 기었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하며 사무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