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카일로스는 종이를 그 이상으로 펼쳐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발치를 뒤덮는 시커먼 그림자도 그림자였지만, 느닷없이 시선을 교란시키는 눈보다 하얀 머리카락이, 나아가 그 아래의 토끼보다 더 붉다고 할 수 있는 새빨간 두 개의 눈동자가 종이를 쳐다보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자신의 눈 앞에 흡사 묘지 부근의 고스트Ghost들이 자주 하는 장난처럼, 불쑥 튀어나왔던 까닭이었다.
"억!"
그에 카일로스가 짧은 비명성을 내지르며 거의 엉덩방이를 찧듯 뒤로 물러섰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만 손에서 놓친 종이가 꼭 고양이의 꼬리처럼 살랑살랑,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미처 손을 뻗어 종이를 낚아챌 새도 없이, 카일로스는 자신을 놀라게 한 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인영,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서너 살 정도는 어려 보이는 소녀를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양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낙엽 같은 종이의 모습을 퍼뜩 인지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쳐박고 다급히 바닥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망연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갓 껍질을 벗겨낸 얌Yam의 속살보다 더 희고, 깨끗한 손 하나가 대뜸 바닥을 훑는 시야 안에 거침없이 침입해 들어오는가 싶더니, 곧 떨어져 있던, 이제 막 손을 뻗어 집으려던 종이를 순식간에 집어 들고 가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카일로스는 그렇게 고개를 듬과 동시에 바짝 얼어 붙고 말았다.
눈보다 더 희고, 호수보다 더 깨끗한 백색의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꼭 어떠한 무게도 가지지 않았다는 듯 가볍게 일렁이는 그 자그마한 모습에서, 잇따라 유려하고 순결한 하얀 어깨선을 타고 흐르는 얼음 알갱이와도 같이 반짝이는 별을 닮은 머리카락이 천연 천사의 날개짓처럼 고고하고, 고결하며, 청아하게 흔들거리는 모습에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직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결코 고통을 수반한 충격이 아니었다. 단지 여태껏 알지 못했던, 그저 옛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현자 다르칸티아 라솔레유가 드래곤마저 모르는 세계의 진리를 처음으로 엿보았을 때 느꼈다고 전해져 오는 온몸의 혈맥을 타고 기어 오르는 극독과도 같은 전율감과, 단 한 모금만으로도 중독이 되어 버리는 마약과도 같은 황홀함,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낼 것만 같은 가슴 떨리는 벅참과 더할 나위 없이 머릿속을 자극하는 아찔함과도 같은 극히 긍정적인 감정들이, 색욕보다 더 깊게, 나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보다 몇 배는 더 진하게 녹아 있는 거대한 충격이라 할 수 있었다.
진정한 미美의 종족이라 불리우는 엘프조차 우습게 뛰어 넘을 아름다움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순백의 소녀가, 지금 바로 눈 앞에, 절로 생각을 멈추게 할 정도의 경건한 분위기를 흘려내며 꿈결처럼 서,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