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보았던 인간 소년입니다. 사제와 마찬가지로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특별한 인간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여태껏 받아 온 보고서와는 조금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소유 님이 원하신다면 바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칫 눈이 멀 것만 같은 푸른빛이 한차례 세상에 퍼져나감과 동시에, 딱딱한 마더의 말이 곧장 소년의 말꼬투리를 붙잡고, 마치 더러운 것을 발견해 화들짝 놀라 치우는 것처럼 순식간에 따라 붙어 소유의 머릿속을 눈 깜짝할 새에 뒤덮어 버렸지만, 정작 소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입을 열어 특정한 대답을 뱉어내지도, 그렇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떤 것에 대한 궁금증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쥔 종이, 펼치고 펼쳐도 도저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종이에 좀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자신의 키보다 살짝 더 크게 펼쳐진 종이를 묵묵히 다음 크기로, 두 팔을 양 옆으로 쭉 뻗어 펼쳐낼 뿐이었다.
"내 말 안 들려? 또 사람 죽이러 왔냐고 묻잖아!"
그러자 무시를 당했다 생각한 것인지 소년이 약 두어 걸음의 차이로 거리를 좁혀내고 더욱더 악을 쓰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온 하얀 포니테일의 소녀, 알파의 무감정한 대답만이 높낮이 없이 담담하게 흘러나올 따름이었다.
"이 이상, 접근을 시도하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더 이상 발을 떼지 않는 걸 추천한다."
당치도 않다는 양 눈길을 돌린 소년의 바락바락한 두 눈이 알파의 새빨갛고 잠잠한 두 눈과 허공 중에 맞물렸다.
"추천? 적? 내 얼굴을 뜯어낸 시점부터 난 이미 적 아니었어? 왜? 여기선 마음대로 못하나 보지? 보는 눈이 많아서 그래? 원래 이렇게 남의 시선을 걱정하는 분들이셨나? 왜 그래? 그때처럼 막 사람 몸 터뜨리고, 가죽 벗겨내려고 온 거 아니야?"
그리곤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독하게, 달리 잔뜩 빈정거리는 어투로 악어처럼 물고 늘어지는 소년을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파가, 이내 고개만 슬쩍 돌려 자신의 옆에 선 청년, 마찬가지로 하얀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부드러운 눈매를 지닌 베타를 조용히 우러러보았다.
그런 알파의 시선을 따라 덩달아 고개를 움직여 베타에게 마찬가지의 눈길을 보내던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진 종이 비스무리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돌연 괴상한 신음 소리를 흘려 내며 부르르 몸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꼭 천적을 앞에 둔 왜소한 체격의 동물들이 그러하듯, 이성이 아닌 본능 속에 뿌리 내린 절대적인 공포감과 두려움이 다시금 재발해 천연 진한 향수와도 같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그토록 기세가 등등하던 소년을 베타는 그냥 마주본 것만으로 순식간에 겁쟁이로 변모 시켜 버린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소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재차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끔찍하고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이 정신을 겉잡을 수 없이 살아나 마구잡이로 뇌를 흔들어 대는 모양인지, 소년은 물러나다 못해 털썩 주저앉아 연신 크디큰 신음 소리를 토해 내었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상념들이 모두 지워진 것은 물론이요, 혈관 속엔 무슨 독이라도 퍼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마비된 소년에게서 발생하고 고착화되는 유동적인 흐름은, 단지 듣는 이조차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잠자코 지켜보던 알파가, 이윽고 소년과 다를 바 없이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는 경비병, 허나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겠단 표정으로 소년, 자신의 주인을 번갈아 바라보는 경비병에게 말했다.
"언제쯤 차례가 오지?"
그러나 듣지 못한 듯, 푸른 머리칼의 경비병에게선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약 2초 가량을 기다리던 알파가 거듭 똑같은 질문을 경비병에게 날렸다.
"언제쯤 차례가 오지?"
"…어, ……아! 그, 그러니까……."
이번엔 알파의 물음에 반응을 했지만,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떠듬떠듬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하던 경비병의 귓속으로, 순간 제 3자의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다음!"
바깥의 상황을 전혀 전해 듣지 못한 건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얇은 검문관의 목소리가 때맞춰 우둘투둘한 성벽 사이사이를 스치며 퍼져나갔다.
"지, 지금… 드, 들어가시면 됩… 니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경비병이 자신의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재빨리 말을 이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