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로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소녀가 집어 간 종이를 다시 되돌려 받을 생각도 이어내지 못하는지, 그저 멍하니 눈 위에 덧씌워진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현자 다르칸티아 라솔레유만이 겪었다고 전해지는 세상의 진리가 급작스레 머리를 쿵!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 절로 들 정도로, 혹은 종이에 대한 기이한 집착과 즐거움이 일순 잊혀지고 지워져 버릴 정도로, 카일로스는 꼭 천사가 강림한 듯 보이는 하얀 소녀의 모습에 모든 정신, 모든 감각을 빼앗기고 있었다.
시끄럽게 귓속을 파고드는 얇은 페이나스의 외침과 방문객들이 만들어 내는 수백 가지의 잡음, 이따금씩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방사형의 나뭇잎과 마찬가지로 방사형으로 쭉 뻗은 나뭇가지들의 화음이 한데 어우러진 처연한 파도 소리, 그리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오로지 검문소의 개방과 폐쇄를 알리는 종소리로 시작하는 작은 브류나크들의 끊임없는 지저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세상이 조용해지는 그런 기묘한 감각에 알게 모르게 머릿속이 장악당할 만큼, 카일로스의 두 귀는 어느새 소녀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손짓, 비록 다물어져 있지만 앵두같이 붉고 조그마한 두 개의 포개어진 입술 사이에 잔뜩 쏠려 있었다.
대체 어떤 말을 할까?
어떤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걸까?
카일로스는 순간 단지 궁금했을 뿐인 이러한 생각들이 텅 빈 머릿속을 멋대로 헤집어 놓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심한 갈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건 결코 목마름의 갈증이 아니았다. 그건 무언가에 대한 욕구. 인간의 본능을 일깨우는 무언가에 대한 탐욕과 비스무리한 욕구가 빚어낸 더러운 욕망이 토해내는 몸부림이었다.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체가 맞긴 한 건지,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대체 어떠한 청아함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눈을 마주친 채 그저 아무 의미없는 대화라도 한 마디 나눠보고 싶었다.
눈동자의 색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새하얗게 빛나는 손은 또 얼마나 부드럽고 작은 것인지, 대륙 최고의 대신전이라 일컬어지는 모르코스 대신전보다 몇 배는 더 순결하고, 몇 배는 더 깨끗하게만 보이는 저 머리카락은 실로 천사의 날개처럼 한 점 무게 없이 가볍고, 진실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을 두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이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자신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소녀에게 말을 건다는, 그런 간단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취할 수가 없었다.
"…너… …너……!"
분명 구석에 앉아 덜덜 떨고 있어야 할 델리스가 대체 어디서부터 솟아난 건지, 급작스레 튀어나와 카일로스의 눈동자 위에 맺혀 있던 소녀의 모습을 삽시간에 자신의
등으로, 온몸으로 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미처 카일로스가 소녀에게 말을 걸기도 전에, 그러니까 이제 막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기로 결심한 뒤 마음을 다 잡고, 알맞은 인삿말을 고르고 골라 마침내 입을 열어낼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는 상황에 반쯤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어 버린 카일로스는 이내 자신의 두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 또 사람 죽이러 왔어?"
느닷없이 정신을 차렸나 싶더니 감히 상상조차 안 되는 말을 쏟아내는 델리스의 괴이하고도 무례한 행동이, 카르디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던 델리스의 깜짝 놀랄 정도로 표독스럽고 악독한 눈빛이 소녀,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순백의 소녀에게 너무나도 날카롭게 쑤셔 박혔던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