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형, 요즘 뭐 좋은 일 있나 봐?"
녹음실 컨트롤룸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그녀와 문자를 하는 내게 방금 녹음을 마치고 나온 성일이가 말을 걸었다.
"나한테? 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다가오지 말란 아우라를 살벌하게 풍기더니 요 며칠은 봄바람이 불잖아."
"형수님이랑 화해했나 보지."
"아항!"
소파 한쪽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기태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던졌다.
그러자 성일이가 단번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화해라니?"
"시현이 형이 그러던데. 형수님 화나게 해서 형이 아주 똥줄이 타고 있다고."
여전히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한 기태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크큭대는 성일이를 한 번 쏘아주고, 녹음실에 들어가 있는 시현이 녀석을 향해 눈을 흘겼다.
눈을 가늘게 뜬 성일이가 실금실금 웃으며 궁둥이를 붙여 앉는다. 나는 내 핸드폰을 기웃대는 녀석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수님 기분은 어떻게 풀어준 거야?"
"야, 뻔한 걸 뭘 물어. 성인 남녀가 화해하는 데 그것만 한 게 어딨냐."
"그것?"
"둘만의 밀실에서 뜨겁고 진득한 몸의 대화를 나누는 거지. 안 그래, 형?"
게임이 끝났는지 기태도 본격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이젠 쪽쪽 소리까지 내고 있다.
두 녀석이 짓궂은 웃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스물네 살 동갑내기 막내 녀석들의 장난은 한숨을 불러일으킨다.
"몸의 대화라..."
그래, 대화를 나누긴 했지. 문제는 대화만 나눴다는 거다. 키스 이상은 꿈도 못 꾼다고!
"안 그래도 욕구불만 상태니까 자꾸 자극하지 마라."
"오호!"
"이거 봐, 이거 봐. 내 말 맞지?"
이제 겨우 잡아놓았는데 더 밀어붙였다가는 그 성격에 도망가 버릴 수도 있다.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나던 쇄골에 입을 맞추고 싶은 것도 허벅지를 찌르며 참아야 했다.
컴백 준비로 연습실과 녹음실에 갇히는 바람에 그녀를 못 본 지도 벌써 5일이나 됐다. 감질나는 문자와 통화만으로는 도저히 타는 듯한 갈증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직 컨셉이 정해지지 않아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이 눈썹 아래로 내려와 눈을 가린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 미치겠네. 그동안은 대체 어떻게 참은 거지?"
*
2015. 8
"날 믿고 만나줄래요?"
"아, 형. 그만 해요."
"이야, 상남자 문도준! 다시 봤어."
요즘 한창 바쁜 모델 출신 배우 성우현 형이 영상편지 속 대사를 따라하며 내 등을 두드린다.
"그거 나도 봤어."
"난 오글오글, 손가락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
우현이 형만이 아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영상편지 얘기로 날 놀리고 있다.
오죽하면 처음 기사가 나갔을 때만 해도 별말 없던 고등학교 친구 서진이와 지석이 마저 어서 자리를 만들라고 아우성이다.
그녀는 이 영상편지를 봤을까? 방송이 채 나가기도 전에 그녀에게 대차게 차이는 바람에 영상은 졸지에 허공으로 뜬 고백이 되어버렸다.
"얼굴 좀 펴라. 그래도 명색이 생일파티인데 그 얼굴로 축하해 줄 거야?"
"......"
"야아, 문도준."
내가 원해서 온 자리가 아니란 걸 뒤늦게 알아챈 우현이 형은 가라앉은 내 기분을 띄워주려 애써 노력하고 있다.
그녀에게 차인 다음 날, 승아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와 다툰 원인 중 하나가 누나라는 사실에 그저 짜증이 난 나는 일방적으로 잡아버린 저녁 약속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가 거절할 수 없도록 우현이 형을 통해 자신의 생일파티에 데려온 것이다. 나는 레스토랑에 도착해서야 누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란 걸 알았다.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승아 누나와 만날 때부터 나의 연애를 캐고 다니는 디스했지의 홍 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뭐 같은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다. 홍 기자의 의심도 사지 않고, 우현이 형이 무안하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1시간 정도만 버티다 가야겠다.
"역시 고급 레스토랑은 스테이크 때깔이 달라. 육즙이 장난 아닌데?"
"많이 드세요."
고급스럽게 세팅된 식탁에 올라온 먹음직스런 스테이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한 접시에 최소 3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음식들이지만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아, 도시락 먹고 싶다."
이런 것보다는 그녀가 가져다준 도시락이 먹고 싶다. 그녀가 직접 만들어 준 애플 시나몬이 마시고 싶다. 그녀가 정성껏 말린 꽃과 정갈한 글씨가 담긴 편지를 받고 싶다.
그녀는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다. 과거의 상처에 나를 대입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이 여자야."
그러나 나와의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으니 이 상황이 갑갑하기만 할 뿐이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실내 공기마저 목을 조여오는 듯하다.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문으로 눈을 돌린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아, 승아 씨. 잠깐, 잠깐만요!"
진해연, 그녀였다.
승아 누나의 손에 끌려 들어와 다소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 여자는 그녀가 분명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두 사람이 친한 사이였나?"
스치듯 짧은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 모진 말을 듣고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떼고 싶지 않다.
홍 기자의 눈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서 서둘러 표정관리를 했지만, 내 심장만큼은 도저히 관리가 되지 않는다.
젠장,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뭐야?
왜 하필 승아 누나의 생일파티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며, 그녀에게 말조차 건넬 수 없는 것인지. 욕지거리가 나온다.
"그나저나 도대체 누구야? 문도준을 반하게 만든 여자가?"
"있어요.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도 못 쉬게 만드는 대단한 여자."
우현이 형이 말을 걸어준 덕분에 나는 겨우 그녀에게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관심은 그녀에게 쏠려 있어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다행인 건지, 2칸 정도 떨어진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직 아무도 앉지 않아 마음껏 훔쳐볼 수는 있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요. 덕분에 새로운 적성을 찾았거든요."
"그거 잘됐네요. 그럼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연두, KBC 방송국장의 딸이라 우리 사장님의 부탁으로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여기까지 풍기는 향수 냄새에 눈이 절로 찌푸려진다
흘깃,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내리뜬 내 눈에 식탁 아래로 꽉 쥔 조그마한 주먹이 들어온다. 떨지 않으려 애쓰는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그녀는 노력하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여자의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떨게 만드는 건데?
그녀를 따라 내 마음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는 겉으로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양이었지만, 속으로는 칼과 방패를 든 채 싸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도준아, 해연 씨 알지?"
"... 응."
수많은 비즈니스 관계가 얽힌 이 자리에서 대놓고 그녀를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홀로 싸우고 있는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그녀를 숨기기로 했다. 정보 캐내는 방법이 지저분하기로 유명한 홍 기자에게 그녀를 기삿거리로 내어줄 수는 없다.
"해연 씨, 내가 이 앞까지 배웅해줄게요. 같이 나가요!"
그녀가 간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하필 승아 누나가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넘어졌다. 의도치 않게 누나를 안은 꼴이 되었다.
홍 기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나는 곧바로 누나를 떨어뜨렸지만 이미 그녀는 돌아서서 나간 뒤였다.
"하아, 어디로 간 거야?"
그녀의 상처받은 눈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대로 자리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거리의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택시 타고 간 건가?"
작업실의 불은 꺼져있었다. 그렇다면 집으로 간 것일지도. 차를 돌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여보세요?
이 목소린, 최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발끝에서부터 거센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열등감이었다. 이 감정은 처음 이 남자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는 걸 본 날부터 시작되었다.
"이 남잔 왜 항상 나보다 먼저인 거지?"
진해연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철벽을 치면서 왜 이 자식만큼은 예외인 거야?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답이 나오지 않는 수많은 질문과 감정들은 점점 더 많아져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문도준 씨가 여긴 어떻게 왔죠?"
"해연 씨와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자리 좀 피해주시겠습니까?"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최진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마뜩잖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나는 그가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시간까지 저 남자랑 있었어요?"
"네."
"밤이 얼마나 위험한 줄 몰라요?"
"그러니 남자랑 있었죠. 그것도 믿을만한 남자랑."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상당히 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혀가 꼬일 정도였음에도 그녀는 나에게만큼은 한겨울 눈보라처럼 매몰찼다.
믿을만한 남자와 있었다며 비꼬는 그녀의 말에 안 그래도 꾹꾹 눌러왔던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좋아하는 여자가 날 차버린 것도 모자라, 밤늦은 시간에 다른 남자랑 술 먹고 오는 걸 본 남자라고.
그런데 당신은 왜 이렇게 상처받은 얼굴이야? 그런 당신을 보는 난 또 왜 이러는데?
"같잖은 가짜 연애 따위 집어치우고 너 좋다는 그 여자한테나 가."
솔직함을 경멸하는 그녀가 솔직하게 내뱉은 말은 나에게 커다란 가시가 되어 박혔다.
"그런데 나는 왜 당신의 말이 거짓말 같지?"
또다시 그녀가 멀어진다.
벌 받나보다, 나. 내 마음 모른 척, 장난인 척했던 벌.
휘청거리는 그녀를 붙잡아 품에 가뒀다. 알싸한 알코올 향과 함께 날아가는 그녀만의 오렌지꽃 향기가 공기를 일렁이게 한다.
하지만 곧 다시 놓아주었다.
"내일 저녁에 다시 만나죠. 감정적으로 실수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는 그녀를 몰아세우기밖에 할 수 없다는 걸, 그렇다면 그녀는 또다시 도망갈 것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돌아서는 길을 비추는 달에게 빌어본다.
부디 내일은 우리 서로 솔직해질 수 있길. 다시는 내 품에서 당신을 놓아주는 일이 없길.
"하아, 죽겠다."
컴백 준비가 한창이라 숙소로 돌아온 나는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대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게 어떤 자식인지 궁금하고 이가 갈려 잠을 청할 수가 없다. 이대로는 밤을 꼴딱 새울 게 분명하다.
"왔어?"
때마침 룸메이트 시현이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물기에 젖어 내려온 머리카락은 같은 남자가 봐도 섹시하다.
남자들뿐이라고 시원하게 드로즈 한 장만 걸친 녀석이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무심한 손길로 물기를 털어내며 물었다.
"아직도 냉전 상태야?"
"하아,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젠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해."
나는 팔로 눈을 가렸다. 따지고 보면 당장 내일이 결전의 날인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다.
"아, 좀 더 생각하게 3일 뒤라고 할걸."
방정맞은 입을 톡톡 때리는 나를 본 시현이가 수건을 의자에 툭 던졌다.
"그럴 땐 한 가지 방법이 있지."
"뭔데?"
"남자의 박력."
남자의, 박력? 사나이, 상남자, 힘! 뭐, 이런 거?
손으로 다시 한번 머리를 툴툴 털어내며 시현이는 연애 기술서를 읊듯 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가 센 여자라도 남자가 세게 밀어붙이면 맥을 못 추거든. 아니, 그런 여자일수록 한 방에 훅 가버리지. 일종의 충격요법이랄까."
"그건 안 좋은 거 아냐?"
"댓츠노노. 훅 간다는 건 홀딱 반한다는 의미야. 특히 너처럼 베실베실 웃어주기만 하던 애가 변해봐. 어떻겠어?"
이제껏 드러낸 적은 없으나 SOUL 멤버 중 연애경력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의 말이라 그런지 묘하게 끌린다.
나는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이 되어 대자로 뻗어 있던 몸을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일단 상대의 의사를 묻지 마. 만나자마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해."
그건 내가 평소에도 하는 방법인데. 그래서 맨날 내 멋대로라고 짜증 낸단 말이야.
시현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팬에게 선물 받은 캐릭터 인형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을 잡거나 안을 때는 은근한 힘으로 밀어내지 못하게. 단, 처음부터 너무 세게 하면 역효과니까 힘 조절 잘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느낌이 오면..."
"느낌이 오면?"
"빡!"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느릿하게 말을 이어가던 녀석이 순식간에 인형을 벽에 밀쳤다.
그 박력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느린 말투만큼 느린 동작으로 유연하게 고개를 돌린 시현이의 고양이를 닮은 눈이 푸른색으로 빛난다.
"그리고 마지막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