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 헤어지고 난 뒤에도 변한 건 없었다. 지난 2주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똑같은 나날의 반복이었다.
아, 변화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요즘 파혼이 그렇게 큰 문제라며?"
"역시 꽃뱀을 조심해야 해."
이연두, 그 여자의 글을 시작으로 파혼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글이 계속해서 올라오자 언론에서는 파혼을 또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마녀사냥 끝에 나는 한동안 인터넷을 달구었던 OO녀 대열에 합류했다.
'SUNNY? 진해연? 이름이 뭐든 상관없다. 무조건 해고해라!'
'우리 애들이 부도덕한 강사에게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학원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나를 자르라는 글들이 릴레이처럼 올라왔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우리도 유감이야. 하지만 알잖아. 학원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는 거."
더 버티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반자발적으로 학원을 떠났다.
"내가 그 자식이랑 그 여자 둘 다 싸잡아서 신고할 거야!"
"신문사부터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지."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KBC 사회부 기자입니다. 나와서 해명해주시죠!"
"국민들은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알 권리가 있습니다."
"알 권리 좋아하네. 남의 사생활 훔쳐보면서 떠들기 즐거워하는 관음증 환자들을 내가 알 게 뭐야?"
기자들의 연락을 피해 핸드폰을 꺼놓으니 그들은 집까지 찾아왔다.
해온이가 면전에서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야 그들은 돌아갔다.
그래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방안에 틀어박혀 선배의 말을 곱씹었다.
'우린 각자 지켜야 할 게 있잖아.'
"하나, 둘..."
우리가 지켜야 할 것,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손을 꼽아보았다. 선배의 말처럼 내게도 지켜야 할 게 있었다.
"나의 신념, 자존심, 일상, 친구들..."
무엇보다도 내 가족을 지켜야 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부모님과 해온이는 잘못도 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KBC 방송국장의 딸이라고 했다. 선배를 승진시킨 것도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나서기에 나는 너무나 약하고 또 지쳐있었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던 선배의 얼굴이 눈앞에 맴돌았다.
"나 참, 그렇게 데이고도 애정의 찌꺼기가 남아있나 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평생 나의 첫사랑으로 남을 사람이었다. 혹 지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정말 바보 같게도 나는 날 버린 남자를 지키는 걸 택했다.
"어차피 나는 이미 욕을 먹었으니 그 사람이라도 잘 지내야지."
그것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물론 첫 번째 실수는 돌아온 남자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준 것이었다.
'내가 예전의 한진영이 아니듯, 넌 이제 예전의 태양이 아닌 것 같아.'
진해연이 아닌 태양을 사랑한 사람. 그래서 더 빛나는 태양을 따라간 사람.
마음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더는 누구의 태양이 아니게 된 나는 스스로 만든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깊은 안개 속에는 단 한 줄기의 빛도 닿지 않는 동굴이 있었다.
나는 그 아늑한 동굴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 안에서만큼은 어떤 수군거림도 들리지 않았고, 아픔도 없었다.
"벌써 가을인가 봐."
"그래?"
"하늘이 껑충 올라갔어."
퇴사 후, 2달 동안 나는 방콕 폐인으로 살았다. 사람의 시선이 싫어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물론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집으로 찾아오는 진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깥의 소식의 전부였다.
"이번에 작업한 곡이야. 들어 볼래?"
진이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추궁하지도,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런 진이의 배려가 좋았다.
"어디라도 여기보단 낫겠지."
"그래도 기왕이면 최대한 멀리 가 있어."
보다 못한 부모님이 떠밀다시피 보낸 남미에서 1년을 지내며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다른 이름으로 새 인생을 살았다.
사실 온종일 모래 바람 속에서 몸을 움직이다 보니 다른 일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태양빛이 작열하는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나고 말았다.
"우리가 뭘 헤집어놨다는 거죠?"
참 맑고 환하게 빛나던 사람. 나는 더는 가질 수 없는, 시리도록 밝은 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참 미우면서도 부러웠다. 그가 내뿜는 빛이 나의 상처를 건드리는데도 그 느낌이 참 따뜻해서 계속 눈이 갔다.
모두가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이기에 그의 눈길이 반드시 나를 향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 자리에만 있어 줬으면 했다.
'잊혀질 권리.'
최근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 새로운 단어가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누구도 날 기억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내가 말도 안 되는 명의 연애를 승낙한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의 모습이 2년 전의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와 비슷했기 때문에."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상대를 지켜주기 위해 입을 다무는 모습이 한심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지 알지 못하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는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는 남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겠다던 원칙도 깨버리고 말았다.
만약 그때, 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될 거란 걸 알았더라면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
이야기하는 내내 겹쳐 있던 그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는지 손등에 와 닿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미안해요. 아픈 얘기 하게 해서."
그가 너무나 아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자신은 미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내게 사과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눈을 보고 싶지 않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남자에게만큼은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지금의 관계마저도 끝이 날까 두려웠다.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거 그만할 거예요. 이제 명확히 깨달았어요."
역시 인생이란 순례길은 혼자서 걷는 길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봐야 피곤할 뿐이다. 길은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지, 머무는 집이 아니다.
볼리비아처럼 적당한 선에서 관계를 맺고,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언제고 조용히 내 길을 갈 수 있으니.
"볼리비아, 딱 그만큼이 좋았어요. 난 그냥 이방인으로 살 거예요. 조용히,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어둠 속에서만 걸어 다닐 거예요."
"그래요. 해연 씨는 가만히 있어요. 내가 끼어들게요."
그가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내 인생에 끼어들겠다 말했다.
세상에 이리도 달콤한 선전포고가 있을까? 겨우 다잡은 마음이 또다시 힘을 잃고 흔들리려 한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속삭이는 음성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불과 몇십 분 전 거침 없이 손을 잡고 몰아붙이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온유온유한 목소리였다.
등의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한숨을 토해냈다. 혹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변할까 불안했던 마음도 함께 토해냈다.
"지치지 않고 진실을 간직해줘서 고마워요."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가 나를 자신에게로 더욱 끌어당겼다. 나를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끌어안으니 숨이 턱 막힌다.
"숨 막혀요."
나는 불퉁한 말과 함께 몸을 비틀었다.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숨이 막혔다. 그의 커다란 몸에, 마음에 압도되어 호흡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촉촉한 입술인지 쫀득한 피부인지 모를 따스한 것이 닿는 느낌에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놔, 놔줘요."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뒤척이자 천천히 멀어진 그는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거 알아요?"
"뭘요?"
"이 세상에서 빛나는 건 태양만이 아니에요."
"......"
"그 사람은 태양을 따라갔지만 난 달이 더 좋아."
새하얀 보름달을 닮은 그의 얼굴에 두 개의 작은 초승달이 떴다.
어둠 속을 은은히 밝히는 달이 차창 안으로 들어와 우리 두 사람을 비추었다.
달빛이 비치는 길을 따라, 등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어깨와 팔을 지나 손까지 내려왔다.
두 손을 마주 잡은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초승달이 사라지고 진지함만 남았다.
"이젠 도망가지 마요.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
"내 말 못 알아들었어요? 사람들에게 난 한 가정을 파탄 내려 한 여자라고요. 나랑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도준 씨를 어떻게 말할지 상상이 안 가요?"
"정말 그래요? 해연 씨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는 눈으로 다시금 물었다. 담담한 눈은 나를 다그치지 않았지만, 그 눈을 바라보는 나는 조급해졌다.
"아냐. 아니야. 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당신만큼은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푹 숙인 고개를 나는 세차게 저었다. 또다시 코끝이 아려온다.
"그것 봐. 진실은 다르잖아요."
그의 손이 내 볼을 감싸 눈물길을 지워준다. 온기가 스민 눈빛을 보니 본격적으로 눈물이 터져 나온다.
입술을 세차게 깨물어봐도 소용이 없자 나는 아예 그의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불평 없이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난 그거면 돼요. 혼자 버티는 건 그만하고 나한테 기대줘요."
"하지만..."
"쉿! 한 마디만 더하면 입 막아버릴 거예요."
짐짓 엄한 표정을 한 그가 날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치, 어떻게?"
"이렇게."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이 목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그대로 날 그에게 데려갔다. 속절없이 끌려간 나는 하얀 얼굴에서 짓궂은 미소를 보았다.
"아, 이런."
사뿐히 내려앉은 입술에서는 짭조름한 바다 맛이 났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소금물은 그가 가져갔다.
소금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달콤한 위로만 남았다.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이 조심스레 전해주는 따스한 위로를 받은 나는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애정이 가득 담긴 입맞춤의 끝에 그는 다시 나를 꼬옥 안았다.
이번에는 나도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에서 도드락 거리는 심장박동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참으로 편안한 침묵 속에서 나는 할 말을 골랐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해요."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고마워요."
"우리 애인 정말 애기네. 울보야, 울보."
나는 나름 서둘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는데, 그는 울음이 맺힌 목소리를 알아챘나 보다. 역시 가수는 다르다니까.
그가 내 코끝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나는 일부러 아픈 척 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더 좋아. 내가 이렇게 안아줄 수 있으니까."
예쁜 눈을 더 예쁘게 접은 그는 씨익, 잘생긴 웃음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댔다.
금세 강아지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이리 믿음직스러운지 모르겠다.
그가 볼 수 없도록 살짝 미소 지은 나는 그의 등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러자 움찔, 등을 굳힌 그가 자잘한 웃음을 나의 어깨 위로 떨어뜨렸다. 나는 그게 또 간지러워 그의 품 안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커다란 품은 아름드리나무처럼 참 단단해서 세상 무엇이든 무섭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포근해서 오히려 눈물이 나.
나, 사랑 받고 있는 거지? 당신 말대로 이제는 당신에게 기대도 되는 거지?
♬♪
지치지 않기 포기하지 않기
어떤 힘든 일에도 늘 이기기
너무 힘들 땐 너무 지칠 땐
내가 너의 뒤에서 나의 등을 내줄게
언제라도 너의 짐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혼자라고 생각 말기 힘들다고 울지 말기
너와나 우리는 알잖아
니가 나의 등에 기대 세상에서 버틴다면
넌 내게 멋진 꿈을 준거야
햇살이 참 좋은 날에 그런 날에 하루라도
또 다른 우리가 되어볼까
♬♪김보경 - 혼자라고 생각말기(학교2013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