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진짜, 연애?
귓속을 파고드는 생경한 단어에 나는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12시 지났어요."
"그게 무슨 상관..."
"어제가 지났으니 계약은 끝났고, 난 오늘의 진해연에게 다시 고백하는 거예요."
꽃다발을 내밀던 그 날처럼 또다시 장난이라 치부하기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과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가득하다.
그는 나의 이마와 눈, 코에 자잘한 입맞춤을 뿌렸다. 그의 다디단 숨결이 코 위로 내려앉았다.
"어깨를 조금 넘긴 반곱슬 머리. 내가 좋아하는 초코색 눈동자. 관심 없는 척, 불퉁한 척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린 성격. 아이들과 꽃을 참 좋아하는 천생 여자."
"......"
"내가 아는 진해연은 이 정도뿐이에요. 난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요."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나조차도 모르던 나의 모습을 열거했다. 그 목소리가, 그 눈빛이 너무 달아서 목구멍이 달큼해진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기분 좋은 손길에 아득해지려던 찰나, 눈 앞에 어른거리는 기억의 조각들 때문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안 돼요."
나는 이 남자가 좋다. 정성껏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고 품에 안기고 싶을 만큼.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만남을 지속하는 건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당신이기에, 누구나 바라보는 찬란한 태양 문도준이기에. 난 차마 당신을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가 없어.
"제발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준 씨는 날 만나면 안 돼요. 안 된다고요!"
내뱉는 말을 따라 체온이 떠나간 걸까?
갑자기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려온다. 열기로 달뜬 숨을 내쉬자 불안정한 호흡에 머리가 어지럽다.
깜짝 놀랐지만, 곧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얼굴이 물속에 잠긴 듯 일렁거린다.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감으니 뜨거운 한 줄기의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부탁이에요. 더는 날 흔들지 말아줘요."
"쉬,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울지 말라고 다독이며 나를 안아주었다. 온몸을 감싸는 따스한 온기에 신기하게도 떨림이 잦아든다.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는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혹시 내가 연예인이라 그러는 거라면..."
"아니. 도준 씨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말해줄 수 있어요? 왜 나는 안 된다는 건지."
미안함이 가득 담겼던 말은 곧 달콤하게 변했다. 그는 볼을 적신 물기를 닦아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안 된다고 내치는 말과 달리 나의 손은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다. 엄마에게 매달리는 아이처럼 떨어지지 말아 달라고 나의 몸이 이성을 외면하며 외치고 있다.
하지만 안 돼.
"당신이 아니라 내가 안 돼. 나라서 안 돼요."
나를 좀먹고 있는 상처가 당신마저 아프게 할까 봐 무서워.
당신을 만날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매일같이 후회했지만 요즘처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나는 등을 위, 아래로 훑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사실은 그도 불안해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냈다.
"2년 전 여름이었어요."
모든 것은 2년 전, 아직은 세상을 잘 몰랐던 나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
2013. 7, 서울의 유명한 대학입시 전문학원의 상담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애 성적이 훌쩍 올랐어요."
"아니에요. 수영이가 열심히 한 결과죠."
두 달 전 영어 성적이 통 늘지 않아 학원을 옮겨온 고3 학생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학부모가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벌써 세 번째 방문인 것만 봐도 부모가 얼마나 극성인지 알만했다.
내가 학생 자신에게 공을 돌리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 학부모는 가방 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얼마 되진 않지만 제 성의예요."
"우리 학원 강사들은 사례금을 받지 않습니다, 어머님."
"아이, 몰라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요, 어머님! 어머님!"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는 봉투를 억지로 손에 쥐여주고 달려나갔다.
곧바로 문을 열고 따라나섰지만 어찌나 발이 빠른지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나가던 동료 강사가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보고 발길을 멈췄다.
솔직하고 쿨한 이미지로 수강생들이나 동료 강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최 선생님이었다.
"성의 표시니까 받아둬. 애들을 위해서 사용하면 되지, 뭐. 안 그래?"
"아, 최 선생님. 하지만..."
"원장님이 뭐라 하시면 솔직하게 말하면 되잖아. 정 안 되면 내가 말해줄게. 억지로 쥐여주신 거 다 봤다고."
30대 중반의 아이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는 늘씬한 키와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는 직설화법과 명쾌한 실력으로 수강생들의 인기를 얻은, 우리 학원의 대표 강사였다.
개인 관계에서 만큼은 참 내성적인 나로서는 거짓말을 불필요한 것이라 칭하고, 자신과 상대의 실수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그녀의 성격이 참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녀를 존경해왔다.
그런 그녀가 조금 전 학부모가 사라진 곳으로 고개를 고정한 채, 특유의 느른한 눈을 옆에 선 나에게 내렸다.
"나도 이런 적 몇 번 있었어.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엄마들이 던져놓고 간 걸 우리더러 어쩌란 거야. 안 그래?"
"일단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해서 돌려드려야겠어요."
"그러든지. 자기 알아서 해."
며칠 뒤, 나는 한사코 거절하는 수영이 어머니께 이해를 구하며 봉투를 돌려드렸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교사도 아닌 사설학원의 강사니까. 학교에 비하면 학원은 여러 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최 선생님의 말처럼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자신이 없는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돈이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을 그 자체가 아닌 돈으로 바라보는, 변해가는 나 자신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몇 년 뒤에는 지금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오늘의 선택을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초보 강사의 열정 혹은 오기라 해도 좋다.
어쨌든 일을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SUNNY! 원장님 호출이요."
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원장님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입사 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진 선생, 봉투 받았다며?"
어떻게 알았는지 원장님은 나에게 봉투의 출처와 사용처를 추궁했다.
"얼떨결에 받긴 했지만, 그대로 돌려드렸습니다."
"애초에 받질 말았어야지. 우리 학원 규정 모르나?"
조금 전 돌려주었다고 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뭇매를 맞았다.
원장실 밖까지 다 들릴 정도로 소리가 커지던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싱긋 미소띤 최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구세주를 보았다.
"최 선생님!"
"최 선생이 웬일이야?"
"서류 오늘까지 제출하라면서요."
기대와 달리 책상 위에 서류철을 올린 그녀는 원장님 앞에 죄인처럼 선 나를 힐긋 쳐다보고는 들어올 때의 표정 그대로 휙, 나가 버렸다.
"최 선생님, 잠깐만..."
그녀가 왔다 간 흔적이라고는 서류철 하나뿐이었고, 나를 구해줄 거라 여겼던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을 원장실에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그래서 그 봉투를 받았다고? 진해연, 걔 진짜 답 없다."
내 말은 듣지도 않는 일방적인 지적에 속이 상해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아야 했다.
'지금 내 얘기 하는 거야?'
말을 꺼낸 사람은 같은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김 선생님이었다.
필터링 없이 말을 내뱉기로 유명한 김 선생님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잔뜩 올라간 김 선생님의 말에 느른한 목소리 하나가 덧붙여졌다.
"진 선생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잘 몰라서 그렇지, 뭐."
"그러면서 꼴에 인기 강사라고 얼마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냐고."
"에이, 그러지 마. 한 1, 2년 하다 보면 그 친구도 알게 되겠지."
원장실에서는 말없이 나갔던 최선생님이 이번에는 내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두둔해주는 데도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내 편이라기엔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알게 된다니, 뭘?'
그녀가 말한,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나를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사회생활이 뭔지를."
아, 비로소 나를 두둔했던 그녀의 말이 왜 내게 불편했는지를 알았다. 그 한 마디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구둣발 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수업을 어떻게 마쳤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퇴근 후, 사정없이 흔들리는 길을 따라 걷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뭐란 거지?"
앞과 뒤에서 다른 말을 하는 것? 봉투를 받고 안 그런 척하는 것?
그것도 아니면 이런 말을 듣고도 의연해지는 것?
"해연아."
바닥만 보고 걷던 나는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구두 끝을 피해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내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 선배?"
대학에서 2년간의 연애 후, 지난겨울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
선배는 유명 방송국 소속 기자가, 나는 학원 강사가 되고서 서로 얼굴 볼 시간이 없어 우리는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대로 헤어졌다. 우리의 만남은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난 선배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좋았으니까.
"학원 광고 보고 딱 알아봤어. 멋있더라."
백곰이란 별명답게 선배는 한여름에도 하얀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눈처럼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어서 더 그래 보였을지도.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머쓱하게 웃어 보인 선배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뗐다. 차분한 음성은 마치 일주일 만에 만난 사이처럼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잘 지냈어?"
"보시다시피. 선배는요?"
"나도 보다시피. 그나저나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피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선배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깡소주나 깔까 했던 나는 계획을 변경했다.
"여긴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네."
"그러게. 너랑 똑같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종종 들르곤 했던 즉석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누런 벽지와 식탁, 그릇, 그리고 맛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불편함 없이 오후에 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선생이 너무했네."
"그렇죠? 내가 잘못한 거 아니죠?"
선배는 언제나처럼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간간이 호응해주었다.
비록 원장님 앞에서 내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늦었다. 데려다줄게."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선배는 밤이 늦었다며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예전의 연애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사이.
들리는 말에 따르면 선배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중이라고 했다. 방송국에서 만난 두 사람은 꽤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 선배가 날 찾아온 것에는 그리 큰 의미가 있진 않을 것이다.
"고마워요, 선배. 조심히 가요."
작별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나를 잡아 세운 두 팔이 그대로 포근한 품에 가뒀다.
"선배?"
"미안. 나도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
"널 찾아와도 되는 건지 100번도 더 고민했어. 그런데 답이 안 나오더라."
"......"
"단 하나 분명한 건, 내가 아직 널 잊지 못했단 사실이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놀랍기도 했고, 하루에 워낙 많은 일을 겪은 터라 내 머리는 이미 하루 치 기능을 다 한 상태였다.
혹시 그 사람과 싸운 걸까? 아니면 헤어진 걸까? 그래서 내가 생각난 걸까?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곧 힘을 잃고 사라졌다.
"......"
일단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학원에서 있던 일로 이미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하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에게든 위로받고 싶으니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숨을 끌어올렸다.
난 선배가 그리웠던 걸까?
"난 선배 없이도 잘 살았어요."
"해연아. 나는..."
"그런데 오늘 보니 나도 선배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키 차이가 크게 나 선배에게 안기면 여지없이 품에 폭 들어가는 탓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선배의 감정은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힘이 들 때마다 찾곤 했던 포근한 품에 안기니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선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내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
"나도,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그날, 나는 마음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내게 돌아온 선배를 받아주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돌이켜보니 바로 이날이 비극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