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장미인 줄로만 알았던 꽃들이 낮 동안 숨겨두었던 불을 밝히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어둠에 말을 걸듯 꽃은 수줍고 앳된 빛을 꺼냈다.
꽃밭 위로 완벽한 어둠이 깔리고, 반대로 빛이 가장 선명해지는 시간이 되자 야간개장의 백미,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밀가루와 나는 인파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온 세상의 모든 빛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찬란하고 눈이 부신 행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 추워요?"
"응. 괜찮아요."
그의 물음에 나는 기계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서 앙다문 입안에서는 퍼레이드 음악에 맞춰 탭댄스 무대가 펼쳐졌다.
차에 탔을 때부터 시작된 두통에 으슬으슬 한기까지 더해진 걸 보니 감기가 확실하다. 카디건이라도 하나 챙겨올 걸 그랬나 봐.
"하아, 역시 안 되겠네."
그의 팔이 사뿐히 나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그를 돌아보려던 정수리 위로 웅얼웅얼, 26개월 어른아이의 옹알이가 쏟아진다.
"내가 추워서."
"근육이 이렇게나 많으면서?"
"아, 몰라. 지금부터 우리 둘 다 추운 거로 해요. 레드썬!"
"그게 뭐야."
손끝에서 톡 터진 봉선화 씨앗처럼 작은 웃음이 알알이 터져 나온다.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도 푸스스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어깨 위로 얹어진 날렵한 턱이 어울리지 않게 오물거리며 내게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이어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을 멀게 만드는 온갖 색의 빛깔과 비누 향기에 취해갈 뿐이다.
"야, 저기 문도준 같지 않아?"
낮게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또렷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퍼지는 불빛과 함께 잠시 나른해지려던 정신이 도로 또렷해졌다.
"문도준이 미쳤냐?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오게."
"맞는 것 같은데. 여자친구랑 같이 왔을 수도 있잖아."
"여자친구?"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에 내게 머물던 온기가 스윽 멀어졌다. 등을 스치는 한기를 타고 허전함이 몰려온다.
"해연 씨, 혹시 달리기 잘해요?"
"응? 갑자기 웬..."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요."
밀가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가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내 머리 위에 얹은 것이다.
그는 턱 끝에 내려온 단추를 야무지게 여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로써 나는 영락 없는 조선 시대 아녀자가 되었다.
그가 비밀스러운 밀서를 전하는 이처럼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댔다.
옷에 가려져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귀가 뜨거워졌다.
"내가 셋 하면 무조건 뛰는 거예요."
"그럼 도준 씨는?"
"하나, 둘..."
뒤돌아서 길을 낸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의 손을 그러쥐었다.
"...셋!"
부드럽게 감싸 쥔 손에 단단한 힘이 가해지며 나를 잡아끌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문도준이라는 이름이 한데 뒤엉켜 들려온다.
몸을 절로 움츠리게 만드는 무서운 소리가 들려오는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나는 그저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하아, 하아..."
전력으로 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쁜데 얼굴을 감싼 달콤하고 시원한 향기가 가슴을 더욱 빠르게 두드린다.
숨이 코까지 차올라 시야를 막자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렸다. 마스크는 이미 벗어버린 지 오래다.
스페인에서 제작진을 뒤로하고 골목을 올랐을 때 보았던 희고 너른 등이 눈앞에 있다.
햇빛을 받아 시리도록 빛나던 그의 뒷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을 발하고 있다.
"있잖아, 밀가루 씨."
나는 말이야. 신데렐라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과연 왕자님은 재투성이 신데렐라의 모습을 보고도 그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을까?
"난 잘 모르겠어."
나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이내 미끄러지고 만다.
그러자 그가 마치 나의 질문에 대답하듯 묵직한 힘으로 손을 끌어 고쳐잡았다.
매듭처럼 단단히 얽힌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리고 얽힌 손가락만큼이나 단단히 내 심장을 묶어버렸다.
서로 다른 크기의 가락들이 나란히 엮인 두 개의 손을 보며 깨달았다.
이제 나 혼자서는 그의 손을 놓을 수가
없다.
*
깊은 잠이 내린 골목 안으로 고급스러운 외관을 자랑하는 포르쉐 박스터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누구도 차가 들어온 것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차의 내부 역시 두 사람이나 타고 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적막하다.
놀이공원을 나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PM 11 : 56
"이제 정말 마지막이에요. 그동안 나랑 하고 싶었던 거 없었어요?"
모든 마법이 풀리는 자정. 왕자님과 손을 맞잡고 춤추던 신데렐라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내게는 벗어놓고 갈 유리구두도 없다. 무도회는 끝났어. 이제 내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현실인 어젯밤을 떠올리자.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가득했던 그의 온기가 사라진 빈손은 무엇을 찾는 건지 자꾸만 헛손질을 한다.
"없는 게 당연하잖아요. 도준 씨 같은 톱스타랑 내가 뭘 하길 바라겠어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네."
좌석에 기대어있던 그가 느른한 동작으로 핸들에 몸을 기댔다.
지나치게 수려한 동작이 하나하나 망막에 박힌다. 마치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동작만큼이나 수려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핸들 위에 팔을 얹고 몸을 기댄 그의 눈은 전혀 느리지도 나른하지도 않았다.
"난 분명히 말했는데. 오늘도 거짓말하면 책임지지 못한다고."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솔직하지 않다는 거예요?"
"눈과 입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요."
내 속을 들여다보듯 올려 뜬 그의 눈에 속이 뜨끔했다.
내 눈을 보는 건지, 입을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눈길과 굳게 다문 입술은 놀이공원에서 날 안아주던 남자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본 그가 피식,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난 해연 씨랑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아요."
"그럼 어서 말해요. 3분 안에 다 해버리게."
"후회, 안 해요?"
"후회할 게 뭐가 있어요."
당신 말대로 오늘이 지나면 우리의 계약관계는 끝나는걸.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나는 눈으로 그에게 어서 말하라 재촉했다. 그러자 그가 화답하듯 깊게 가라앉은 눈을 맞춰왔다.
먹물을 푼 물처럼 점차 탁해지는 눈빛이 영 불안하다.
그러나 이보다 나를 더 불안하게 하는 건 이대로 나의 회로가 정지될 것만 같은 예감이다.
"내가 당신과 하고 싶은 건..."
뽀드득, 가죽이 내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이 만들어낸 그림자 하나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온다.
"이런 거."
운을 뗀 그가 나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로 올렸다. 족히 1.5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손안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에게 손가락을 내주었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지던 그가 그대로 깍지를 꼈다. 아까 이미 맞춰본 적이 있는 그와 나의 손가락들은 서로를 찾아 틈 없이 맞아들어갔다.
"이런 거."
허리춤을 훑고 들어온 손이 내 몸을 제 주인의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너무 놀라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끌려간 나를 이미 정화는 물 건너간 두 개의 눈이 보이지 않는 밧줄로 꽁꽁 묶었다.
코끝에 내려앉은 그의 숨결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석류를 알알이 터뜨려 물들여놓은 입술의 끝자락이 살짝 말려 올라간다. 여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거."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나는 슬로우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아름다운 꽃잎 하나가 내게로 내려오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려했던 대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철저히 인간의 본능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의 감각뿐이다.
이성의 기능이 멈추니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이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곤두섰다. 심지어 미각마저 발동하기 시작했다.
두 송이의 꽃잎이 서로 맞닿기 직전, 그가 돌연 뒤로 물러났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 지금 당신한테 키스할 거예요."
그런 걸 말하면 나더러 어떡하란 거야!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정신 나간 뇌는 이미 음성 반복재생 버튼을 눌러버렸다.
미성에 쇳소리가 섞인 이질적인 목소리가 이리도 감미로울 줄은 몰랐다.
그의 장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오늘은 차원이 다르다.
"......"
"......"
깍지를 낀 손이 얼굴께로 올라와 나머지 한 손마저 잡아 내렸다. 커다란 손은 두 개의 손을 가두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부끄러움을 가려주던 유일한 장막마저 사라져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바드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아..."
"쉿."
눈꺼풀이 다 열리기도 전, 촉촉이 젖은 그의 입술이 바짝 마른 내 입술을 덮었다. 보드라운 속살을 드러낸 빵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조심스럽고 세심한 움직임은 단 한 번, 우리가 입을 맞추었던 그 날 밤과 달랐다.
순식간에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숨, 눈물이 날 정도로 섬세하고 달콤했던 손길, 그리고 그와 달리 피할수록 더 집요하게 쫓아오던 그의 향기에 몸을 떨었던 그 밤.
그날 그에게서 거친 남자의 향기를 맡았다면, 오늘은 나를 아껴주는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
허리를 감싼 팔이 천천히 나를 그에게 가까이 데려갔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문을 두드리듯 입술 위에서 허락을 구하는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밀고 들어오는 그의 움직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간지러움이 곧 전신을 휩쓸었다.
"으음..."
힘없이 뒤로 밀려나는 목덜미를 감싸 쥔 그가 은밀한 속삭임처럼 더욱 낮고 깊게 들어왔다. 나의 두 손은 자유를 참지 못하고 다시 그를 찾아갔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정말 연인처럼 서로를 찾고, 또 탐했다. 몇 번이나 멀어지던 입술은 곧 자석처럼 다시 그리고 더 강하게 맞붙었다.
"하아..."
"후우."
마침내, 결코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두 입술이 떨어졌다. 아쉬움이 진득하게 녹아내린 숨결이 붉게 달아오른 상대의 볼을 간지럽혔다.
내가 호흡을 고르는 사이 다시 한 번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선물한 그가 깊숙한 곳에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이번엔 실수란 말로 상처 주지 않을게요."
조금 전의 가쁜 호흡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흔들림 없는 음성이었다.
그가 격한 댄스곡을 라이브로 소화하는 아이돌 가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나는 멍청히 벌어지는 입을 그대로 두었다.
그는 음성만큼이나 흔들리지 않는 눈을 내게로 맞춰왔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그의 밤하늘이 맑게 개고, 반짝이는 별들이 돌아왔다.
별들이 내비치는 자잘한 빛을 안은 그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며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진짜 연애해요."
♬♪
처음 그대를 본 순간
슬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이뤄질 수도 이뤄져서도 안 될
혼자만의 슬픈 마음을
그댈 만나러 가는 길
아픈 내 사랑을 난 알았죠
내 몸 깊숙이 전해지는 떨림에
설렘보다 두려움이 커져요
사랑한다 말할까 봐
오늘도 난 내 맘이 두려워
내 눈을 닫고 그대 모습 지워 하루를 견뎌요
가슴 속에 홀로 외치는
사랑해요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 그대에게 말할까 봐
혼자 몇 번씩 되뇌이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 말이
♬♪ 어쿠스틱 콜라보 - 사랑한다 말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