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맛은 스페인만 못하네."
"당연하죠."
설탕을 가득 묻힌 일자 모양의 기다란 츄러스는 스페인의 것에 비할 바가 못 됐다.
하지만 바삭한 식감과 따뜻하고 달콤한 맛은 놀이공원의 느낌을 살리기에 더없이 좋았다.
어스름히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머리 위를 지나는 롤러코스터에서 쏟아지는 경쾌한 비명을 들으며 먹는 츄러스는 나에게 소풍 날 먹는 김밥과도 같은 존재다.
"그래도 맛있죠?"
"나랑 먹어서 그래요."
말인지 밥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뻔뻔하게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무는 날 보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내 얼굴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입술 주변을 훑는다.
내 입에 붙어있던 반짝이는 하얀 가루가 팬클럽 회원처럼 그의 손을 따라갔다. 나의 눈길도 늦게나마 쫄래쫄래 뒤따라갔다.
밀가루는 자신의 손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새빨간 혀가 천천히 손가락을 핥았다.
'달다. 너를 닮은 향기가.'
얼마 전 여심에 진도 8.7도의 대지진을 일으켰던 커피 CF와 똑같은 손짓, 똑같은 눈빛으로 이번에는 설탕 CF를 찍는다.
와, 이놈이 마지막 날이라고 아주 작정하고 누나를 아찔하게 만드네.
그리고 손가락을 여전히 입술에 댄 채 눈을 똑바로 마주친 그가 내뱉은 말은 끝내 누나의 심장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제 보니 우리 애인 애기네. 다 묻히고 먹고."
"서, 설탕이 묻는 게 당연하지! 문도준 씨도 여기 묻혔거든요!"
"어디? 그럼 나도 떼어줘요."
밀가루가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런 실물깡패 시키. 방어태세도 안 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오면 어떡해? 심장폭행으로 신고할 테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쫀득한 찹쌀떡 마냥 탱글탱글한 볼을 털다가 나는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기 재패니즈 스피츠 마냥 똘망똘망 뜬 눈이 자잘한 빛과 함께 웃음을 머금었다. 젠장, 너무 귀여워서 더는 버틸 수가 없다.
"자기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알아서..."
"잠깐만."
"응?"
"다시 해봐요. 방금 한 말."
밀가루가 제 얼굴을 떠나 내려가는 손을 제지했다.
방금 한 말이 왜?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금세 소심해진 나는 밀가루의 눈치를 보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었다.
"자기는 손이..."
쪽!
재패니즈 스피츠 한 마리가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볼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멀뚱히 서서 보행자를 재촉하는 신호등처럼 눈만 껌뻑였다.
쌍꺼풀이 없는 기다란 눈을 고운 초승달로 만들어 빙그레 웃어 보인 그가 허리를 숙여 태연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달다."
"지금 뭐..."
"오늘은 계속 그렇게 불러줘요. 자기♡"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내 볼에, 달다고, 자기라고... 으아!"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재밌게 감상하던 밀가루는 찡긋, 윙크를 날리고 한 걸음 떨어졌다.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청히 쳐다보며 나는 화끈거리는 두 볼을 감쌌다.
"자기라니..."
전 남자친구에게는 항상 선배라 불렀기에, 자기란 말이 이렇게나 떨리고 화끈거리는 말인 줄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이 남자의 입에서는 자기란 말이 참 자연스럽게 나온다. 매일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처럼.
그녀에게도 똑같이 불러줬을까? 아니 그녀에게는 더했겠지. '연인처럼'이 아닌 진짜 연인이었으니까.
설탕을 듬뿍 뿌린 츄러스를 닮은 달달한 상상의 끝이 돌연 시큼해졌다.
"얼른 와요."
앞서가던 그가 돌아서서 모히토를 연상시키는 상큼한 미소를 던진다. 살짝 내린 검정 마스크 위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입꼬리가 가볍게 넘실거린다.
멀찍이 떨어져 내민 커다란 손이 어서 오라고 내게 손짓한다. 간질간질, 마음 밭에 심은 씨앗에서 자란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기분이다.
그래. 딱 오늘만이야. 오늘 하루만큼은 저 손만 보고 가보자. 내 마음이 닿는 곳으로.
"지금 갈 테니 딱 기다려요."
*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야간개장임에도 사람은 제법 많았다. 줄이 짧은 놀이기구만 찾아다니던 우리는 마침내 관람차를 발견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람차에 달려간 우리는 무슨 색 차에 탈 것인지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아싸! 노란색!"
"아아, 난 파란색이 좋은데."
결국, 가위바위보에 이긴 나의 선택에 따라 노란색 차의 문이 열렸다.
둥실 떠오른 관람차는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하늘과 가까워졌다.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동그란 별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무서워요?"
"조금은."
맞은편 등받이에 딱 달라붙어 조금은 무섭다고 솔직히 말하는 그가 귀여워 엄마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나를 본 밀가루는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불룩 튀어나온 체리 색 입술 사이로 불퉁한 소리가 나왔다.
"웃지 마요."
"아, 미안. 비웃은 건 아니에요. 난 그냥 귀여워서..."
"그게 아니라, 내가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자기가 한 말에 흠칫 놀란 밀가루는 헛기침을 하고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겨울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빨개진 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려주었다.
곱씹어보면 결코 귀엽지만은 않은 발언. 그럼에도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 보이는 건 찹쌀떡을 닮은 얼굴 때문일 거야.
"그럼 울까?"
"아니. 그건 더 싫어."
재미 삼아 슬쩍 찔러본 질문에 1초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말랑말랑 우유부단하더니 이럴 땐 단호박이네.
그런데 어째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하필 관람차 안에서 어색해져 버리면 어떡해.
"......"
"......"
그와 나는 그저 각자의 손가락을 옴찔거릴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대화 한 번 없이 땅에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그날,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관람차가 절반보다 조금 더 올라왔을 즈음, 드디어 밀가루가 말을 꺼냈다.
너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나까지 진지해져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솔직한 답을 원하는 거죠?"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요."
특유의 담백한 음성과 함께 그는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진실보다도 마음을 살펴주는 말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을 털어놓게 했다.
"그냥, 옛날 생각을 조금 했어요."
나는 조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었던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어둠에 잠긴 공원의 곳곳을 밝히는 불빛들이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다.
이 안에서 바라보기에는 똑같지만, 밖으로 나가면 우린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야겠지.
그래서인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마음이 술술 풀려나온다.
"한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이 더는 그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더라고요."
내게 사랑한다 속삭이던, 처음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갔던 남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따라간 해바라기 같은 남자.
처음 돌아섰을 때 이미 깨달았어야 했다.
나는 무엇이 아쉬워 그를 다시 받아주었던 걸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나의 잘못이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사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이란 부질없는 생각을 수천, 수만 번은 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 남은 건 가족, 그리고 신념이란 말로 포장한 알량한 자존심뿐이었어요."
"......"
"그런데 그거라도 지켜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날 보니 너무 웃긴 거예요."
"그게 왜 웃겨?"
그만의 향기가 부쩍 가까워졌다 생각할 찰나, 달콤한 온기가 등 뒤에서 나를 덮었다. 언제 건너왔는지 모를 정도로 기척 없이 다가온 그가 날 안았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일 때 꺼내곤 하던 낮은 미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니, 심장을 파고들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인데."
"정말?"
"그럼. 누가 뭐라고 하면 데려와요. 내가 증인으로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나는 어깨를 감싼 팔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마음을 내맡기고 싶은 향기가 배인 옷깃을 붙잡고 얼굴을 묻었다.
애초에 그에게 사람을 데려올 마음도 없지만, 생각만으로도 배 속이 든든하다.
나보다 3살이나 어린 남자도 이렇게나 든든할 수가 있구나.
"해연 씨, 저기 봐봐요."
"아, 달 떴다!"
"별이 하도 많아서 어디가 하늘이고 땅인지 모르겠네요."
어느덧 우리는 동그란 세상의 꼭대기에 올랐다.
내려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 아름다운 시간, 아름다운 사람이 이 순간을 붙잡는다.
관람차가 마술을 걸었나 봐.
레몬 보이가 건네준 은색 실이 땅에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연결되어 바람결에 넘실대는 것 같다.
"멋있네요."
"배경이? 아니면 내가?"
"둘 다요. 그런데 도준 씨가 조금 더 멋진 것... 같아요."
"이제야 진실을 말하네."
"뭐라고요?"
쿠쿡, 잘게 부서진 웃음이 어깨에 묻어 간지럽혔다.
에잇, 든든하단 말 취소다! 역시 진지함을 5분도 끌어가질 못하는 남자라니까.
웃음을 거두고 내 몸을 돌려 마주 본 그가 다시금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숨이 막혔지만 그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온기가 머문 너른 등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그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
"우리 애인,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
"도준 씨도..."
당신도 세상에서 제일, 따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