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한 손에는 선글라스를,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냈다.
누구에게도 숙여본 적 없는 고개도,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도, 한쪽으로 올라간 선명한 입꼬리도 모두 다 여전했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한 것치고 내 몸은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다. 그때와 똑같이 당할 수는 없기에 나는 바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의 미소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고 내게 물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요. 덕분에 새로운 적성을 찾았거든요."
"그거 잘됐네요. 그럼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고마워한다, 라. 그때도 지금도 말은 참 예쁘게 하는구나.
여기서 사람의 입을 바늘로 꿰매버리면 아마 내일 아침에 사회면 기사로 나겠지?
참으로 어이없는 상상에 나는 그녀의 앞에서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진해연은 깡을 빼면 시체란 사실을.
나는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등 뒤로 감추고 입술을 매끄럽게 말아 올렸다. 이름을 잊어버려 마땅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지만 아무려면 어때.
"그쪽이야말로 잘 지내고 있죠? 아, 돌쟁이 아들을 두고 파티에 나올 정도라면 말 안 해도 알겠네요."
"오랜만에 바람 쐬고 오라고 진영 씨가 아이를 봐주고 있어요."
"참 가정적인 남편이군요."
"그렇죠? 얼마나 다정한지 몰라요."
비꼬는 말을 그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지, 아니면 구렁이처럼 넘어가는 건지.
내가 아는 그녀는 말 속에 담긴 뜻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참으로 다정한 남편의 이야기를 입에 담은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소의 의미는 승리. 그녀는 이번에도 내가 이겼으니 알아서 꺼져달라 말하고 있다.
그녀의 도도한 와인 빛 입술이 다시금 열리려던 찰나, 설탕을 묻힌 가느다란 선율과도 같은 소리가 가로막았다.
"어, 해연 씨! 연두랑 벌써 인사하고 있었네요? 마침 우리 셋이 동갑인데 잘 됐다!"
세상은 참 좁고도 신기하다. 이 엄청난 여자가 아이처럼 순해 보이는 차승아 씨의 지인이라니. 아, 방송국장 딸이니 어울릴만도 한가?
가루약을 털어 넣은 것처럼 입안이 쓰다.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기를 쓰고 숨어다닐 필요도 없었잖아.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을 들킬 뻔했다. 아니면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았거나.
"승아 씨, 전 이만 가볼게요."
"왜요? 더 있다 가요! 여기 있는 사람들, 나도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홍 기자님?"
돌아간다는 말에 승아 씨가 호들갑스럽게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 바람에 밀가루가 생일에 선물해주었다는 향이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럼. 우리 디스했지에서 기사로 내면 무조건 포털 메인을 독차지하는 대단한 사람들이지."
"승아야. 그보다 평범한 사람은 아예 이 레스토랑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주는 게 순서 아닐까?"
승아 씨의 만류에 빼빼 마른 하이에나를 닮은 홍 기자라는 사람과 완두콩을 떠올리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돌아가며 말을 보탰다.
물론 이 공간에 있는 이들이 인터넷 뉴스로만 보던 유명한 사람들인 건 분명하다. 이 레스토랑이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란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그 사실을 굳이 나에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지?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저번에 서포트 도시락 배달 때문에 만났는데, 마침 동갑에 도준이도 알고 있다고 하셔서 친해졌어."
"아, 그래? 도시락 배달?"
"너도 형부랑 먹어봐. 진짜 예쁘고 맛있어."
해맑은 얼굴을 한 승아 씨의 대답을 들은 여자가 보조개 가득 미소를 띄웠다. 도도한 미소에서 비릿한 혈향을 느끼는 건 나뿐이겠지.
나는 숨이 막히는 그녀의 미소에서 시선을 거뒀다. 고개를 돌리다 언제부터인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두 개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깊고 검은 눈이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만큼 빠르게 차오르는 수치심에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맞다! 도준이도 와있어요. 인사 하실래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도준아, 해연 씨 알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아 씨는 가까운 자리에 앉은 밀가루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었던 눈이 한순간 얼음조각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짧게 대꾸했다.
"응."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모델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모습이었다.
갈비뼈 안쪽이 시큰거린다. 아니야. 심한 말을 한 건 나야. 내가 섭섭해할 이유는 없어.
밀가루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녀는 옆에 놓여있던 클러치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명함을 받지는 않고 그녀의 잘 정돈된 검보라빛 손톱에 한 번, KBC 사회부 기자라 적힌 낯익은 이름에 또 한 번 눈길을 주었다.
"연예인 서포트만 해요?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남편 생일이라 회사에 선물 좀 돌릴까 했는데. 도시락도 괜찮을 것 같네."
"우린 예약제예요. 그런데 한 번 방송을 탔더니 9월까지는 예약도 꽉 찼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남편인데 어떻게 안 돼요?"
"글쎄요. 그쪽 남편이 내 남편은 아니잖아요?"
순간 눈썹을 들어 올린 그녀가 곧 재미있다는 듯 작은 미소를 그렸다. 태풍이 도착하기 전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미소에 나는 숨을 참았다.
여태껏 잘 버텨오던 두 다리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심장을 통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가야 한다.
"과외가 있어서 정말 가봐야겠어요."
"학원 강사는 이제 안 하나 봐요?"
"개인적으로 봐달란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굳이 학원에 갈 필요가 없네요."
나는 한쪽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려 마지막 대꾸를 한 후,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차마 학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노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대화에 끼지 못하고, 와인을 홀짝이며 지켜보기만 하던 승아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연 씨, 내가 이 앞까지 배웅해줄게요. 같이 나가요!"
하지만 의지와 달리 그녀의 몸은 와인잔을 내려놓자마자 종이 인형처럼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던 찰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누구의 손인지는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단단한 품에 기대는 그녀의 얼굴이 와인색으로 발그레 물들었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듯 안고 안긴 두 사람을 보자 이 공간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내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울컥, 목구멍에 뜨겁게 차올랐다.
"취하신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말고 쉬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는 흐트러진 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한 자, 한 자 끊어가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밀가루에게 스치듯 시선을 던진 나는 마른 입술을 굳게 다물고 뒤돌아 방을 나섰다.
*
집에 가는 길,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는 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동네 포장마차로 나왔다.
"......"
"......"
우리는 대화 없이 잔만 비웠다. 맑은 이슬이 한 잔, 두 잔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타는 듯한 속이 가라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빈 병이 3병을 넘어서자 내 가슴 속에는 소방대원 아저씨들이 물대포를 쏜 것처럼 촉촉한 물기만 남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거야."
빌어먹을 기억도, 감정도 모두 다 술로 깨끗하게 헹궈버리면 좋겠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나는 바쁜 이모님을 대신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꺼내왔다.
자리에 돌아오니 진이가 내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누구?"
"아무 말도 안 하고 끊었어. 밀가루가 누구야?"
"그런 거 몰라."
밀가루? 헹, 그 맛도 없고 퍽퍽한 가루 시키 말이지? 아무리 심한 말 좀 했기로서니 누나 앞에서 싸가지 없이 눈을 훽! 돌려버리고!
뭐, 날 좋아해? 그런 놈이 내 앞에서 아무 여자나 막막 끌어안아?
"이런, 흩날리는 가루보다도 지조 없는 밀가루노무 시키. 흥칫뿡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새 병을 돌려 땄다. 따다닥, 하는 경쾌한 소리가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아름다운 초록 병을 기울이려는 순간, 단단한 손이 내게서 병을 빼앗아갔다.
"줘."
"누나 주량 넘었어."
"그래도 줘."
"내가 안 돼."
단호한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손길로 진이는 간절한 내 손을 거절했다. 나를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이 녀석마저 날 무시하나 싶은 서운함에 눈물이 핑글 돌았다.
나는 차려진 안주들을 감당하기에도 간당간당한 간이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 위로 단단하지만, 눈물이 날 만큼 포근한 손이 가만히 얹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따스한 손길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마음을 내려놓고 싶게 만드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매번 항복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인데?"
"나 오늘 그 여자 만났어."
"오늘? 어디서?"
고개를 들지 않아도 내 눈에는 진이의 미간이 접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 진이 이마에 주름지면 안 되는데.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하지 않자 갑갑해진 진이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 녀석이 너무나 가뿐히 들어 올린 탓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누나."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한 진이가 눈을 맞춰왔다.
갑작스러운 아이컨택에 심장이 콩, 하고 내려앉을 뻔한 내가 눈을 도로록, 돌렸지만 진이는 내 얼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자기와 마주치게 했다.
"도시락 배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 여전하더라. 그래서 그냥 나왔어."
"잘했어."
"잘한 걸까? 도망친 거잖아. 모양 빠지게."
"싸움에서 이기려면 공격뿐 아니라 방어도 잘 해야 해. 회피는 자기를 지키는 방어술의 하나고."
그래도. 난 잘 모르겠어. 왜 나만 방어해야 하고, 왜 나만 도망 다녀야 하는지.
이 싸움에서 왜 내게는 단 한 번의 공격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지.
드디어 손을 놓은 진이는 내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워주었다. 우리는 맑디맑은 액체가 쪼르르, 내려가는 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이어 제 것도 가득 채운 진이가 잔을 들어 내밀었다. 챙, 하는 투명한 소리와 함께 아찔한 보라색 맛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크으..."
다디단 첫맛만 있으면 좋으련만 내 인생만큼이나 쌉싸름한 끝맛에 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 상황에 무언가가 입에 쏙 들어왔다. 아삭한 숙주나물과 달짝지근한 불고기의 조화가 기가 막힌다.
어미 새마냥 내게 안주를 물려준 진이는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혹시라도 또 만나게 되면 날 불러."
"네가 어디 있을 줄 알고?"
"걱정 마. 어디서든 달려갈 테니까. 누난 부르기만 해."
그 어떤 말보다도 따스하고 믿음직한 말을 듣는 순간, 코끝이 알코올만큼이나 알싸해졌다.
내게도 어디서든 달려올 테니 부르기만 하라는 사람이 있다.
"그래. 내 곁에 네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너라서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
"진아, 진아! 나 주량 는 것 같지 않아?"
"글쎄."
"이거 봐. 아까 그만큼 마시고도 이렇게 잘 걷잖아. 아나, 뚤. 아나, 뚤!"
"그래그래. 덕분에 나만 좋은 구경 하고 있네."
누가 엔지니어 아니랄까 봐 진이는 리듬을 타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쳇, 아님 마알~고."
"후훗."
"그보다 내 옷깃 좀 놔주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불편하단 말이야."
덕분에 자꾸 발이 꼬여서 누가 보면 취한 줄 알겠다고.
머리 위에서 피식,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내 발이 꼬일 때마다 터지는 웃음소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집 앞에서 한 인영이 보였다.
조금씩 느려지던 진이의 걸음이 끝내 멈추었지만,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해연 씨."
"오잉? 그림자가 말을 한닷!"
심지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어. 이상하다. 나 아직 안 취했는데?
"문도준 씨가 여긴 어떻게 왔죠?"
진이가 나를 대신해 그림자에게 대답했다.
오, 역시 난 취한 게 아니었어. 단지 초록색 병의 힘으로 초능력을 갖게 된 것뿐이었던 거야!
진이의 말에 그림자 분신술을 하고 있던 남자가 그림자에서 나와 정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인영 속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어두웠다.
"해연 씨와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자리 좀 피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