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스?"
그제야 밀가루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를 거의 덮치다시피 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밀가루 역시 불편한 몸을 비척거렸다.
그때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의 움직임에 놀라지 말았어야 했다. 일이 벌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닿을 듯 말 듯 떨어져 있던 두 입술이 아슬하게 스쳤다. 짧은 순간, 가볍고 짜릿한 전기가 입술 끝의 감각을 아릿하게 마비시켰다.
그저 살짝 스쳤을 뿐인데 빈틈없이 맞물린 것과 다를 바 없이 홧홧한 열기가 차오른다. 이번에는 심장이, 심장이 마비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 남자와 있다가는 화병이든 심장병이든 무언가 하나는 얻고야 말 것 같다.
"제발 그만 놀려요."
"내가 지금 놀리는 것 같아요?"
"아니면 뭔데요? 내 반응이 재밌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내가 한두 번 속아?"
나의 까칠한 반응에 이번엔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소파의 흔들림이 그대로 피부 안까지 침범해온다.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 그가 깊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공허한 듯하나 생각으로 가득한 저 눈을 나는 차마 마주 볼 수가 없다.
"이번엔 놀리는 것도, 실수한 것도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남자는 호감 없는 상대한테는 장난도 치지 않아요. 더군다나..."
나는 말도 마치지 않은 그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이어지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참으로 유치하게도, 마음속에 꾹꾹 묻어두기만 했던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그럼 차승아 씨는요?"
"여기서 승아 누나가 왜..."
"둘이 사귀었다면서요. 도준 씨가 좋아했다면서요. 나한테 말했던 좋아한다는 사람이 차승아 씨 아니에요?"
그가 입을 한일(一) 자로 다물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시계 소리가 멈췄다.
시간도 함께 멈춰버렸는지 고요한 정적만이 우리의 공간을 일렁거렸다.
한참 뒤 그가 후우,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고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짜증 섞인 손길에 애꿎은 머리카락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맞아요."
터지기 직전까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풍선에서 푸쉬쉬, 바람이 빠져버렸다.
이렇게 단번에 인정할 줄이야. 한 번쯤은 아니라고 뺄 줄 알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치아의 공격에 말캉한 살이 저항 없이 떨어졌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 후, 한숨인지 모를 거센 숨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해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이게 말이야, 밥이야? 남녀 사이에 그렇지 않은 관계는 또 뭔데?
그 여자의 표정, 행동은 대놓고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단 말이야. 그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그 마음을 나눠 갖고 싶을 정도로 예뻤단 말이야.
난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랑했던 여자를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정의하는 그의 언행에 화가 난다.
언감생심,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은 내 처지가 슬퍼서 화가 난다.
"명의 빌려준 날, 도준 씨가 분명히 말했어요. 이성적인 감정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난 그 말을 믿었어요."
"나도 그러길 바랐어요."
"그리고 나랑은 꿈에서라도 입술 맞대는 것조차 싫다면서요. 아까도 실수였다고 했잖아요."
"잠깐, 그 말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그가 그날 밤을 언급하는 나를 제지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의 얼굴에 낭패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별안간 그의 고개가 땅을 향해 푹 꺼졌다. 머리카락도 고개를 따라 바닥을 향해 힘없이 늘어졌다.
"내가 실수라고 한 건, 호프집에서 코알라가 될 정도로 술을 마신 걸 말한 거였어요."
"그럼 나와 그런 꿈 꾸고 싶지 않다는 건 뭔데요?"
"꿈은 반대니까."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든다.
그리고 겨울 공기를 닮은 서늘한 눈을 내게 맞춰온다. 깊고도 짙은, 여름의 한가운데서 한기를 느끼게 하는 눈빛.
어느새 낮에 내 손목에 채워준 팔찌를 매만지며 그가 나지막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귓가를 때렸다.
"꿈에서 키스해버리면 진짜 진해연과는 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은 나와 키... 하고 싶다는 거예요?"
대답 대신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에 와닿았다. 그날 밤과는 대조적인 서늘한 감촉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만의 향기처럼 달콤한 말과 시원한 감촉이 심장을 말캉하게 건드렸다. 눈앞의 한 남자를 제외한 모든 걸 잊게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 밤의 입맞춤을 떠올리게 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눈빛의 깊은 곳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본능적인 불안함에 나는 팔찌에 닿은 그의 팔을 가까스로 밀어냈다. 하얀 팔을 밀어내는 손길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다.
"난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이해해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알긴 아네요."
"해연 씨를 헷갈리게 한 건 미안해요. 그때는 나도 헷갈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요."
"문도준 씨, 설마 나 좋아해요?"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말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이건 자폭이다. 내가 죽든, 둘 다 죽든. 누군가는 죽어야만 하는 폭탄을 던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답은 단 하나. 허나 웃음기 뺀 진지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다 못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맙소사. 내가 원한 답은 그게 아니야.
무슨 소리냐고, 착각하지 말라고 말했어야지. 비릿한 미소로 내 마음을 접게 했어야지.
아니라고 말해. 지금 한 고백이야말로 실수였다고 말해줘. 제발.
그런 눈 하지 마. 당신의 마음이, 내 마음이 진실이라 믿고 싶어지잖아.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분명한 건 당신이 점점 좋아진다는 거예요."
'나도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가 아직 널 잊지 못했단 사실이야.'
이마를 붙잡고 낮게 읊조리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핑글 돌았다.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말이 애써 덮어두었던 과거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탓이다.
내 몸은 그와 같은 말을 한 남자를 기억하고 있나 보다.
나를 바닥으로 내친 잔인한 말을, 지워버리고 불태워버려도 모자랄 목소리를 미쳤다고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해연 씨는 날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러게. 도대체 난 이 남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면 얼마 간은 참 행복하겠지. 오색 꽃이 만발한 꽃밭에 선 기분일 거야. 사랑받는 여자가 되었다고 느낄 거야.
하지만 착각하지 마, 진해연. 꽃밭 같은 건 다 거짓이고 허상이야. 몇 개월만 지나면 깨야 하는 유리온실 속의 꿈이라고.
놀이공원쯤이야 몇 번이고 함께 가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다칠 게 뻔하다면, 둘 다 죽는 폭탄이라면 애초에 끌어안지 않는 게 나아.
내 앞에 앉아 초조해하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목구멍에 까슬한 먼지가 내려앉는다. 메마른 목을 타고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쉰소리가 갈라지듯 삐져나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두 부류의 남자가 있어요."
"......"
"첫째,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남자. 둘째, 여자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는 남자."
나는 손목에 투박하게 감긴 한 파란색 팔찌를 풀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 때문인지,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지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밖에선 들리지 않을 주문을 연거푸 외우며 나는 팔찌와 함께 엉킨 마음을 겨우 풀어냈다. 그리고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그의 손에 얹었다.
"애석하게도 내가 본 문도준 씨는 둘 다네요."
그는 손바닥에 얹어진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연신 나를 찾았다.
"그 말은, 나를 경멸할 정도로 싫어한다는 뜻이에요?"
"......"
"나는 해연 씨도 날 신경 쓰고 있다고, 조금 전에도 우리 둘이서 같이 설레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팔찌를 든 채로 펼쳐져 있던 손이 힘겹게 닫혔다. 애처로울 정도로 잠긴 목소리가 가슴을 찌른다.
가득 채워본 적도 없으면서, 고작 바닥을 찰랑거리던 감정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헛헛해진 가슴은 실바람이 드나드는 자리마다 시린 속내를 드러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릎을 내어주지 말걸. 작업실 문을 열어주지 말걸. 아니, 그 전에 아예 이 남자와 엮이지 말걸.
"순전히 내 착각이었던 건가?"
"맞아요. 그러니 더는 착각하지 마요, 우리."
당신은 누구보다도 더 뜨겁고 환하게 빛나는 만인의 태양, 나는 겨우 남겨둔 희미한 빛마저 감추고 살아가야 하는 그믐달.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어. 태양과 달이 같은 하늘에 뜰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 여기까지만 해요. 서로를 위해서 더는 엮이지 말아요, 우리.
♬♪
꽃향기를 좋아하지는 않아
하지만 때로는 나도 꽃을 안고 싶어
눈치 없이 달콤한 것은 싫어
하지만 이 순간 난 네 곁에 앉고 싶어
늘 꿈꾸던 건 홀로 있되 서럽지 않은 것
깃털같이 나비처럼 바람결을 탈 것
진한 색깔, 향기를 쫓아가지 않는 것
앉는다면 바로 그 자리에 활짝 피게 할 것
넌 내 세상을 바꿀 거야
네 등 뒤로 감춘 꽃다발 하나면
아마 충분할 것 같은 걸
한없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어린 소년 시절 깜빡 놓쳐버린
헬륨 풍선처럼 아득히 아련히
♬♪ 가을방학 - 나비가 앉은 자리